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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매성녀 글라라와 아녜스, 루피나와 세쿤다 (퍼옴)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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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삼용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16 조회수2,063 추천수0 신고

re: 자매성녀 글라라와 아녜스, 루피나와 세쿤다

kayoo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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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9 19:58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6&dir_id=60303&eid=O8YkTnGFVYEwE7bwgbKKc5DcBusIukZT

성녀 글라라와 아녜스가 자매였습니다

성녀 글라라 동정,

작은형제회 2회(성 글라라 수도회)창설자

 아시시의 귀족 딸로 태어난 글라라(1194-1253년)는 용모가 뛰어났기 때문에, 열 두 살 때에 혼인을 서두르는 부모의 강권을 물리친 이래, 성 프란치스코의 아시시 설교에 감명을 받고, 그리스도께만 속하기를 간절히 원하여, 수도생활을 결심하고, 주님수난성지주일 밤에 포르지웅콜라 (작은부분,천사들의 성마리아)의초라하고 조그마한 경당에서 거친 모직옷을 받아 입고 자기의 보석 벨트를 매듭이 있는 보잘것 없는 밧줄과 바꿨다.

 그로부터 16일 후에 그녀의 여동생 아녜스가 그녀에게로 왔다.다른 이들도 왔다. 그들은 제2회 회원-글라라 수녀회로서 성프란치스코가 준 규칙에 따라서 속세와는 완전히 떨어져 청빈과 엄격함과 단순한 생활을 지켰다.

 프란치스코는 글라라와 아녜스를 조그만 성당인 성 다미아노로 보내고는 그들에게 생활양식을 주었다.이 생활양식은 성녀 글라라의 회칙의 바탕이 되었다.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의 회(Order of Poor Ladies of San Damiano)가 창설된 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성 다미아노 성당은 글라라가 봉쇄 관상생활을 살았던 곳이었는데,1253년 세상을 하직하던 그 날까지의 한 번도 성 다미아노 성당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삶은 사도적 삶의 엄청난 지평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성녀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여성적으로 표현한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녀의 이름은 “현명한 사람”(the enlightened one)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녀의 이상은 프란치스코의 이상에 부합하는 것이기는 하나, 복음에 대해 참으로 여성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철저한 복음적 삶이 남성들의 사도적 영성에 있어서만 적용되는 특권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동시대의 다른 위대한 여성들의 역할에 필적하는 훌륭한 신비주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낸 독자적인 중세여성이었다.

성프란치스코는 21세의 그녀를 여자대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했으며, 그녀는 죽을 때까지 순명으로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다.

수녀들은 맨발로 지내고, 맨바닥에서 자며 고기를 먹지 않고, 완벽하게 침묵을 지켰다.

 물론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복음적 가난이었다.그들은 심지어 하루를 생활해 나가는 데 필요한 재물조차도 소유하지 않았다.

성녀는 교황으로부터 ’가난의 특권’을 허락받고 이를 유지하는데 늘 고심하는데 너무나 엄격하다는 주장들 때문에 많은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글라라회원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며,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당시의 기록들은 아시시의 성다미아노 수녀원에서 살던 그녀의 생활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하다. 글라라는 식탁 옆에서까지 환자들을 돌보았고, 구걸하는 수녀들의 발을 씻겼다. 그녀가 기도를 드릴 때에는 얼굴이 너무도 빛나서 주위 사람들의 눈이 부실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1240년과 1241년 성체께 대한 깊은 신심과 신비한 기도의 힘으로 사라센인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등 놀라운 일들을 많이 하셨는데,사라센 침공으로 수녀원이 점령 직전에 있었을 때, 그녀는 수녀원 벽에다 축복의 기도문을 붙였다.

"오! 주님, 제가 당신의 사랑으로 길러 온 무력한 이 자녀들을 적의 손에서 구해 주시는 것이 당신의 마음에 맞는 일이 아니옵니까?

제가 지금 보호해야 할 이들을 사랑하올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애원합니다."

자매들에게는 "두려워 마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라고 말했다. 결국 사라센은 도망가고 말았다.

글라라는 육체적으로 허약했던 사람이다. 1224년 이래로 그녀는 성 다미아노에서 줄곧 아파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강인한 성격과 젊음의 정신은 그녀에게 떠나질 않았다.

그녀는 1225년 봄에 성 다미아노에서 맹인이 된 프란치스코를 맞이하였다. 그때, 거기에서 프란치스코는 태양의 노래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죽기 전에 그녀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자신의 마지막 유언을 직접 써주었고, 프란치스코의 장례행렬이 1226년 10월 4일 글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마지막 고별인사를 하기 위해 성 다미아노에서 잠시 멈추었었다.

60세가 되던 1253년 8월11일 글라라는 성다미아노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여러분은 훌륭한 호위를 받을 것이기에 평화 안에서 고요히 가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성령을 보내주셨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녀에게 하듯이 여러분을 지켜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저를 창조해 주셨으니 찬미 받으소서”(시성조사서 III, 20). 

무덤은 아시시의 성녀 글라라 대성당에 있다. 2년 후에 시성되는 영광을 얻으셨다.

글라라 성녀는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이시고, 문장은 성체 현시대이다.

 

성녀글라라와 자매들이사용했던 성다미아노성당의 가대

 

뽀르지웅콜라,천사들의 성마리아성당 내부모습

축일 : 11월 19일

아시시의 성녀 아녜스

Agnes 1253년 수녀 제2회

아씨시의 Caterina di Favarone는 (1198 - 1253)는 14 살 때 언니인 아씨시의 성녀 클라라보다 16 일 늦게 프란치스코의 봉헌 생활(글라라수녀회)에 참여했다.

그녀의 이름은 수도명으로 아녜스였다.

(언니 글라라가 1211년 수녀회로 들어간 후 집안 단속이 심하였지만 그녀의 열망을 꺾을 수가 없었다. 1211년 4월 14일 Sant’Angelo di Panzo 수도원에 있었던 글라라에게로 갔다. 마침내 친척들이 아녜스를 억지로 끌고가려고 산 안젤로 디 빤조 수도원으로 몰려왔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버티었다.

마침내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았고,그후 얼마 있다가 프란치스코는 이 두 자매를 가난한 자매들의 회(글라라회)가 탄생한 곳인 산 다미아노의 작은 수도원에 가서 살게 하였다. 

그녀의 지도자적 자질을 알아차린 프란치스코 성인은 아녜스를 만뚜아 플로렌스와 북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 클라라 수녀원을 설립하도록 파견했다.

그 후 아녜스는 1219년, 프란치스꼬가 세운 플로렌스 근교 몬띠첼리Monticelli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만투아, 베니스, 파두아 등지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언니를 도와 글라라회의 청빈 정신을 고수하기 위하여 분투 노력하였다.

Monticelli에서 아녜스는 언니 클라라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그녀는 자신이 언니 클라라와 산 다미아노의 자매들과 떨어져 있는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임종이 가까와지자 언니 클라라는 아녜스를 아씨시로 부른다.

그녀는 1253년 8월 11일 언니의 죽음 얼마 전에 아씨시로 돌아왔다.

아녜스는 그 조금 후인 1253년 11월 16일쯤 세상을 떠났다.

언니보다 3 개월 늦게 천상 가족들과 결합하였다.

클라라 전기 48항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며칠 후,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아녜스는 영원한 기쁨으로 먼저 간 언니를 따라갔다.”

그녀가 죽자마자 그녀의 성덕은 공경을 받게 되었고, 베네딕도 14세가 1752년 그녀를 복자로 선포하였다.

 아씨시의 산따 끼아라(성글라라)성당에 안치된 그녀의 묘소에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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