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성녀 끌레리아 축일 7월 13일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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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수근 | 작성일2010-07-20 | 조회수643 | 추천수0 | 신고 |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성녀 클렐리아 바르비에리(Clelia Barbieri)는
1847년 2월 13일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 외곽의 페르시체토(Persiceto)에 있는
분드리에 디 산 지오반니(Bundrie di San Giovanni)라는 마을에서
주세페 바르비에리(Giuseppe Barbieri)와 지아친타 난네티(Giacinta Nannetti)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서로 다른 출신을 갖고 있다. 아버지 주세페 바르비에리는 가장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머니 지아친타 난네티는 마을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지역의 의사인 지아친타의 삼촌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부유한 피에트로 난네티(Pietro Nannetti)의 딸로 자랐다.
많은 논란 끝에 주세페와 결혼한 지아친타는 노동자의 가난을 받아들이고,
부유한 집에서 나와 시아버지인 산테 바르비에리(Sante Barbieri)의 초라한 시골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돌처럼 단단한 믿음과 온전한 그리스도교적 삶을 만들어갔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성녀 클레리아는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녀에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도록 어린 나이부터 가르쳤다.
어느 날 성녀 클레리아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하면 성녀가 되는지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린 클레리아는 바느질과 방적 기술을 익히고 거친 털을 짜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이는 그 지역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1855년 콜레라가 번졌을 때 8살이었던 성녀 클레리아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의사 삼촌의 배려로 성녀 클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은 성당 근처에 있는
편안한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녀 클레리아는 하루하루를 더욱 성스럽고 열심히 살게 되었다.
그녀는 집에서 바느질을 하거나 성당에서 기도를 하였다.
보통 성인식 때 첫영성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교리적으로 완벽하게 준비된 그녀는
1858년 6월 17일 11살의 나이로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이 날은 성녀 클레리아의 미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그 날 처음으로 영적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과 성모님의 슬픔은 그녀의 성스러운 영혼을 더욱 고무하였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었으며 기도와 선행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광 앞에서 그녀는 부동의 자세로 오로지 기도에 전념하였고 집에서는 힘든 일을 하는
다른 소녀들의 모범이 되었다.
조숙한 그녀는 삼베를 짜는 힘든 일이 주업인 곳에서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기도를 늘 간직하고 있었고 때로는 동료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녀는 세상일에 열심인 마르타(Martha)는 아니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힘겨운 노동 현장에서 일하면서 그녀의 가냘픈 손은 힘겨운 삶의 흔적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로지 사랑과 헌신에 몸을 바친 마리아(Maria)는 아니었지만
잡념을 갖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헌신적인 삶을 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거나 무시했다.
그녀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이 기뻤고
그녀의 기쁨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주로 나타났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그녀를 가장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동료들에게로 이끌었다.
그녀의 강렬한 믿음은 하느님의 가난한 자들에게 그녀의 모든 것을 주게끔 했다.
이 시기에 교회에는 ‘그리스도교 교리교육 봉사자’라는 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냉담하는 이들을 신앙에로 인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녀의 마을에서는 어느 나이 든 학교 교사가 이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성녀 클레리아는 이 모임에 참여하였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처음에 조교로 들어갔던 그녀는 놀라운 역량과 준비성으로 선임 회원들까지 인도하게 되었다.
제법 솔깃한 청혼을 거절한 젊은 아가씨들은 성녀 클레리아를 그들의 지도자로 뽑고
사도적이고 명상적인 삶을 채택하였다.
이 헌신의 삶은 성체성사를 받는데서 비롯되어 인근 마을의 농부와 노동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당시는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정치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기에
그들의 생각이 곧바로 현실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1868년 5월 1일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면서 성녀 클레리아와 그녀의 동료들은 ‘교사의 집’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여 그들의 생각을 현실로 만들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교 교리교육 봉사자회와 공식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이는 후에 그녀가 ‘슬픔의 어머니의
작은 자 수녀회’(The Congregation of Minims of the Sorrowful Mother)를 설립하는 초석이 되었다.
교사의 집으로 옮긴 후 의심할 여지없이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비범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녀의 기도에 담겨진 믿음과 헌신적인 사랑은 늘 놀라웠다.
그들의 작은 공동체에는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가득했고,
창의력과 상상력이 충만한 선교는 조직을 통한 선교가 아닌 보이지 않는 말씀을 통한 선교였으며
성녀 클레리아는 움직이는 영혼이었다.
처음에 설립한 작은 단체가 점점 그 수를 늘려가면서
교리교육과 종교적인 방향성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병든 어린 학생들의 수도 늘어갔다.
사람들은 성녀 클레리아를 점차 믿음의 지도자와 선생님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나이 22세 때의 일이었다.
성녀 클레리아는 수녀회를 설립한 지 2년이 지난 후 잠잠했던 결핵이 재발해 볼로냐에서 선종하였다.
성녀 클레리아가 설립한 슬픔의 어머니의 작은 자 수녀회는 이탈리아 전역과 인도 그리고 탄자니아까지 확장되어 갔다.
오늘날 그녀의 발자취를 따르는 수녀들은 지속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있으며
300여명이 35개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성녀 클레리아 바르비에리는
교회 역사상 가장 어린 수도 공동체의 설립자이다.
그녀는 1968년 10월 2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9년 4월 9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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