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에 대한 전례적 공경의 유래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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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 작성일2010-11-08 | 조회수493 | 추천수0 | |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에 대한 전례적 공경의 유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에 대한 전례적 공경의 유래는 특히 1940년대, 교황 비오 12세가 전세계 교회에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축일''을 확신시킨 것을 계기로(1944년 5월 4일), 많은 학자들에 의해 권위있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학자들은 17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에 대한 공경이 오늘날까지 발전되어 온 주요양상들을 추적해 왔다. 그 발전 과정을 간단히 요약한 이 글에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파악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예증한 근거 자료와 문서들을 충분히 활용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축일이 제정된 사실만 한정해서 특별히 고찰하고, 신학적인 문제나 성모 공경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는 제쳐 놓았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축일 제정과 아주 자연스럽게 연계시켜 놓고 있다.
1. 성모 성심 공경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퍼져 나갔다.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전례적 공경의 선구자는 성 요한 에우데스(1601-1680)였다.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이 프랑스 성인이 살았던 17세기 이전부터 있은 흔적이 있다. 그때는 개인적인 공경이긴 했지만, 그 공경심은 지금보다 오히려 훨씬 더 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공경심은 교부들과 교회가 해설한 성서 구절들이 근거가 되어 유발되었고, 특히 메히틸다(1241-1299)와 제르트루다(1256-1301), 비르지타(1303-1373)와 같은 성녀들의 개인적인 계시에 의해 배양되었다. 그런 공경심은 중세 말엽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기도문과 신심 행위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옛날에 있었던 이런 공경은 모두 공식적인 공경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리아의 성심을 공식적으로 공경하기 시작한 역사적인 날은 1648년 2월 8일이었다. 실제로, 요한 에우데스 성인이 만든 미사 기도문과 성무일도 기도문을 사용하여 오툉(Autun) 대성당에서 엄숙한 의식을 거행한 것은 바로 이날이었다. 이 기도문은 물론 주교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성모 성심 축일은 그보다 앞서 1643년부터가 아니면 늦어도 1644년부터 10월 20일에 캉(Caen)의 신학교에서 지내 왔다. 그러나 그 때는 에우데스 성인의 가까운 제자들만 참여했고 일반 신자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 후 축일이 10월 20일에서 2월 8일로 바뀐 데 대해 에우데스 성인은 "일년 중 이 기간 중에 축일을 정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더 자연스럽다"고 설명하고 있다. 루가 복음에는 마리아가 말씀이 강생한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했다''는 구절이 두 군데에 나온다(루가 2,19.51). 첫 번째 구절은 갓난아기 때의 예수의 신비와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는 숨겨진 어린시절의 신비와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에우데스 성인의 말처럼, 2월의 첫 주간은 전례상으로 볼 때, 유아 시기가 끝나면서 숨겨진 어린 시절의 생활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 에우데스 성인이 축일을 정할 때, 성서적 근거를 중시했고 또 1년을 주기로 해서 예수의 신비를 기념하는 전례력에 맞는 날짜를 정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많은 수도 단체들, 특히 여자 수도회들이 마리아의 성심축일을 자기네가 기념할 수 있는 허가를 얻으려고 서로 경쟁했다. 그중에는 베네딕토 수도회, 우르술라 수녀회, 성모 방문 수녀회, 가르멜 수녀회, 프란치스코 수도회 그리고 오툉, 스와송, 리지외, 에브뢰 쿠탕스 및 툴 교구의 글라라회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요한 에우데스 성인이 창설한 많은 형제회 및 그의 첫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에우데스 성인이 만든 기도문 및 성무일도 기도문에 따라 2월 8일에 성모 성심 축일을 지냈다. 주교들은 개별적으로 자기 교구내에서 성모 성심에 대한 새 전례를 실시하도록 승인하기 시작했다. 1672년에 요한 에우데스 성인은 이 축일이 프랑스 전역에서 그리고 많은 수도 단체들에 의해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 마리아의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이 처음으로 확장되고 있던 시기에 한 가지 장애가 발생했다(그러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떤 프랑스 사람이 새로운 기도문, 특히 미사 중 기도문과 연도문(連禱文)을 만드는 데는 금지 규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교황청의 전례 성성에다 성모 성심 축일의 기도문들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때 손으로 쓴 청원서가 오늘날까지 교황청 시성 시복 성성의 기록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추기경 전하들께서는 1650년 이래 프랑스 교회가 가장 거룩한 동정 마리아의 성심을 위한 미사 중 기도문과 성무일도 기도문을 인쇄한 책을 갖고 있으며, 그 기도문을 몇몇 교구와 신심이 깊은 지방의 주교들이 이미 승인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기도문을 사용할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기도문을 새로 만드는 것은 금서 목록에 따라 금지되어 있으므로, 전례성성이 이미 승인해 주어 사용하고 있는 동정 마리아의 이름을 기념하는 기도문의 양식에 딸, 동봉한 기도문을 신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시길 삼가 간절히 요청합니다." 2절판으로 된 이 청원서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결과가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승인 불가." 이 문제에 관한 1669년 6월 8일자 성성의 훈령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글귀가 있다. "프랑스 교회의 것은... 승인할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모 성심에 관한 미사중 기도문과 성무일도 기도문은 승인을 받지 못했지만, 실제로 마리아의 성심공경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 요한 에우데스 성인은 로마로부터 아무런 답신을 받지 못해 교황청의 반응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평상시와 같은 열성으로, 예수 성심 축일을 설정하는 운동과 병행하여, 마리아의 성심을 축일로 공경하기 위한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예수 성심 축일 기도문도 사실상 요한 에우데스 성인이 작성했다. 이 기도문은 에우데스 성인이 창설한 모든 수도 단체에서 주교의 승인을 얻어 1672년 10월 20일부터 사용되었고, 그 후 수많은 다른 교구와 수도 단체에서 이 기도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교황 레오 13세는 1903년 에우데스 성인의 영웅적인 덕성을 찬양하는 선언에서, 성인을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을 공경하는 "기도문을 지은 분"이라고 불렀다. 교황 비오 10세와 비오 11세는 에우데스 성인을 복자위에 올리고(1909) 성인품에 올리면서(1925) 성인을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을 "전례적으로 공경하게 만든 교부요 박사이며 사도"라고 불렀다. 요한 에우데스 성인이 보는 "성심"은 모든 것을 총합하는 개념으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신비를 나타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한데 모으는 중심이며 터전이었다.
2. 로마의 승인을 얻으려는 노력이 성공하지 못하다
요한 에우데스 성인에 이어,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전례적 공경을 전파한 사람은 예수회 소속 갈리페 신부였다. 그는 마리아의 성심을 공경하는 명분과 예수의 성심을 공경하는 명분을 서로 연계시키려고 했다. 1726년에 갈리페 신부는 교황청 전례 성성에다 예수의 성심을 공경하기 위한 미사 기도문과 성무일도 기도문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예수의 성심과 마리아의 성심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갈리페 신부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교회가 이미 예수의 공경하기로 했다면, 마리아의 성심도 역시 공경하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논증하기 위해서, 갈리페 신부는 두 가지 원칙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한 가지는, 예수와 마리아 사이에는 하느님의 지혜로운 섭리에 따라 서로 뗄 수 없는 결합 관계가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한 가지는 마리아에 대한 예수의 무한한 사랑이다. 이 사랑 때문에 아들 예수는 어머니를 자기와 아주 흡사하게 만들고 싶어했고, 좋은 것과 영광을 어머니와 나누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1727년 7월 12일, 전례 성성은 갈리페 신부의 청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좀 요령 있는 답신을 보냈다. "제출하지 말 것." 이 답신은 청원을 계속하지 말라는 경고와 같았다. 왜냐하면 그 청원서에 담긴 내용이 부정적인 반응만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답신을 받은 지 거의 2년 후에, 갈리페 신부는 검열 성성(현재 신앙 교리 성성) 시성 시복 조사 검사의 반대 의견에 대한 해명서를 첨부하여 청원서를 다시 제출했다. 이 청원에 대해 1729년 7월 30일자의 답신은 간단 명료하게 "반대"였다. 나중에 교홍 베네딕토 14세가 된 람베르티니 시성 시복 조사 검사는 이 예수의 섬심을 공경하는 미사 기도문과 성무일도의 기도문에 대한 승인을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1) 만일 교회가 예수의 성심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생활 전체의 중심으로 공경하도록 승인한다면, 교회가 불충분한 철학적 견해를 갖고 있음을 확인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2) 그런 공경은 이때까지 교회에 없던 색다른 것이다-교회가 예수의 성심을 공경하는 예절을 공식으로 도입하는 것은, 그 당시의 교회가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얀세니즘과 끊임없이 투쟁하며 고민하는 분위기였다는 점에서, 시기적으로 아주 적절치 못한 것 같았다. 실제로,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공경은 얀센주의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성심 공경을 주창하는 사람들을 "마음 숭배자들", "마리아 숭배자들"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3) 비슷한 요구가 계속 나올 가능성이 있다-예수의 성심을 공경하는 기도문을 승인하면, 예수의 몸 중에서 다른 기관도 똑같이 공경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새로운 요구가 나올 것이며, 마리아의 성심에 관해서도 같은 공경을 요구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갈리페 신부는 이러한 반대 이유에 대해 조심스럽게 반론을 폈다. 그는 예수의 성심을 공경해야 하는 성서적 근거와 신학적 근거를 분명히 제시했다.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비슷한 청원이 있을 위험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그런 결과가 있을 수 있음을 기꺼이 시인했다. 그 문제는, 우리가 앞에서 주목해 온 바와 같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 어머니의 계획에 따라 전개되는 상황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러나 갈리페 신부가 분명히 근거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례 성성은 여전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리아의 성심을 전례적으로 공경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는 과정에 있었던 이 두 번째 국면은 이런 상태로 휴지 기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을 공식으로 공경하는 문제는 로마 교황청의 문서 보관소 선반 위에서 잠들고 말았다. 그러나 두 분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신자들 가운데 널리 퍼져 나갔고 더욱 강화되었다.
3. 예수 성심 축일 승인으로 첫 희망이 보이다
1765년 1월 26일, 전례 성성은 폴란드의 주교들과 로마의 예수 성심 대형제회에 예수 성심 축일을 적절한 미사와 성무일도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하는 훈령을 발표했다. 이 같은 허락은 폴란드 주교들이 전례 성성에 긴 청원서를 보냄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청원서에는 예수 성심을 공경해 온 유래가 대략 설명되어 있었고, 성심에 대한 공경을 찬성하는 장황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전례 성성의 이 훈령은 또한 예수의 성심과 명백히 서로 비슷한 마리아의 성심 공경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실제로, 이 훈령에 첨부되어 있는 문서에는 1727년부터 1729년 사이에, 예수의 성심에 대한 전례적 공경을 허락할 수 없게 만들었던 요인들이 해소되고 극복되어 있었다. 특히 그 문서에는 공경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중요한 취지가 언급되어 있었다. 시성 시복 조사 검사가 특별히 언급한 취지는 다음과 같았다. "예수의 성심을 축일로 공경하는 목적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그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심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하느님과 놀랍고도 완전하게 결합된 예수의 그 상처입은 육체적 심장에 있다. 그 심장은 가장 거룩한 영혼이 그 속에 살았던 성심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인성을 취하여 그 심장과 결합함으로써 신적인 성격을 지닌 성심이고, 무한한 사랑으로 불타던 성심이며, 거기서 나오는 덕성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상징하는 성심이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슬픔과 괴로움을 지녔던 성심이다. 이처럼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성심을 공경하는 것이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는 진정한 목적이다." 이 훈령에 대해 언급한 1765년 2월 6일자 전례 성성 장관의 서한은 또한 이 축일에 공경하는 대상이 상징적인 그리스도의 성심임을 강조했다. 이로써, 과거에 마리아와 예수의 성심 축일을 승인받는 데 장애가 되었던 원칙적인 어려움들이 해소된 것 같았다. 실제로, 이 훈령이 발표되고 난 몇 년 후에는, 마리아의 성심을 전례적으로 공경케 해 달라는 청원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같은 많은 청원들은 교회의 권위에 승복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거부당했다. 특히 교황 비오 6세의 재위 기간(1775-1779) 중에 그런 경우가 다른 어느때보다 심했다. 마리아의 성심 축일이 색다른 것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의견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 비슷한 청원이 남발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도 여전했다. 여기저기서 들어온 많은 청원들이 계속 기각되었다. 그러나 1세기에 걸쳐 티 없이 깨끗하신 마리아의 성심을 전례적으로 공경하려는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4. 마리아의 성심 공경을 허가하는 지방 교회가 늘어나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마리아의 성심을 전례적으로 공경케 해 달라는 청원이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이 같은 추세에 따라 전례 성성은 1805년 8월 31일, 사실상 오늘날까지의 전환점이 된 가장 뜻깊은 훈령을 발표했다. 이 훈령은 마리아의 성심 축일 설정을 청원한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들에게 성모 승천 대축일 다음 주일에 마리아의 성심 축일 전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성모 설지전(雪地殿) 기념일(8월 5일) 미사의 기도문을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성무일도는 두 번째 야과경 대신에 성모 성탄 주간 5일째 야과경을 하도록 했다. (성모 설지전=성모 대성당) 이 훈령을 제일 먼저 이용한 사람들은 천주의 모친 수도회 수사들이었다. 성성 장관이 이 훈령에 서명하던 바로 그 날, 그 수도회는 전 지부에다 마리아의 성심 축일을 성신 강림 후 셋째 주일에 지낼 수 있는 특전을 주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여러 교구와 많은 수도 단체들이 같은 특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축일을 지내는 날짜는 반드시 같지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요한 에우데스 성신이 정한 날을 그대로 지켰고, 어떤 곳에서는 성모 승천 대축일 다음 주일을 더 좋아했다. 1805년에 발표된 이 훈령은, 그것이 마리아의 성심 축일 제정을 반대하던 마지막 장애가 극복되었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축일을 공식으로 인정하여 적절한 전례를 행하거나 전체 교회의 축일표에 끼워 넣는 데는 강하게 반발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러한 장벽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그 어느때보다도 교황 비오 9세 재위 기간이었다. 이때는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공경이 대단했던 시기였다. 남녀 수도 단체들이 마리아의 성심을 수호자로 많이 모시게 된 것도 이때였다. 1838년에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마리아의 성심 대형제회가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창립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및 스페인에서는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출판물이 많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전례 성성은 1853년 스페인 여왕이 제출한 청원에 답하여, 1855년 7월 21일 마리아의 성심 축일을 위한 미사중 기도문과 성무일도 기도문을 인가한다는 훈령을 발표했다. 이 기도문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마리아의 성심을 전례적으로 공경할 것을 주장해 온 위대한 두 사도, 요한 에우데스 성인과 갈리페 신부가 작성한 원본이 반영된 것이었다. 1855년의 훈령이 발표되자, 수많은 수도 단체들과 여러 교구에서도 그 기회를 이용하여 같은 인가를 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의 청원서가 전례 성성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전례 성성은 점점 더 많이 들어오는, 새롭고 다른 기도문도 승인해 주었다. 마리아의 성심을 전례적으로 공경할 수 있는 특전이 베풀어진 곳도 그만큼 늘어갔다. 그러다가 스페인의 왕과 왕비, 그리고 왕비 이사벨 2세의 고해 신부였던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성인의 공동 청원이 있었다. 이에 답하여, 1862년 6월 26일에 발표된 "스페인 왕국"이란 훈령에 따라, 마리아의 성심 축일은 스페인에서는 반드시 주일에 지내야 하는 의무적 축일이 되었다.
5. 마리아의 성심 공경이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10년 사이에 마리아의 성심을 공경하는 운동은 계속 전개되었고 크게 발전했다. 그와 반대로, 전례적인 면에서는 1855년 인가 당시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마리아의 성심 축일은 거의 모든 곳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날짜도 다르고 전례상의 기도문도 달랐다. 교황청에서 따로따로 인가를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의 성심 축일이 전세계 교회의 축일로 제정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교황 비오 10세(1903-1914)가 추진했던 전례 운동과 거기에 따른 전례 개혁도, 그런 소망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전세계 교회의 축일로 제정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그 당시의 교회가 갖고 있던 전례적인 각성과 상충되는 방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성인들이나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축일이 주일에 끼어들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의 성심 축일을 주일에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1911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공포된 교서 "하느님의 입김"은 축일표와 성무 일도를 개정하면서 주일의 전례를 아주 중시하는 원칙을 정했다. 그래서 1914년판 미사 경본에는 마리아의 성심 축일이 부록 "어떤 지역을 위하여"에 들어가게 되었다. 드디어 교황 비오 12세는 2차 세계 대전중의 암울한 기간동안,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옛날의 전례와 그 수정 제안을 면밀히 분석 검토한 후, 마리아의 성심 축일을 전세계 교회로 확산시켰고, 성모 승천 대축일 후 1주일 만인 8월 22일에 축일을 지내도록 했다. 이 같은 교황의 뜻을 담은 "로마와 전세계"라는 전례 성성의 훈령이 발표된 날짜는 1944년 5월 4일이었다. 축일을 지내는 목적은 이 훈령의 내용에 그대로 요약되어 있다. "이 같은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의 성심이란 상징에 의해, 유난히 신성한 마리아의 영혼과 특히 하느님과 아들 예수에 대한 마리아의 그 뜨겁고 큰 사랑은, 하느님의 신성한 피로 구원된 인류에 대한 마리아의 모성애와 더불어 가장 열렬히 공경되어야 한다." 새로 나온 전례용 기도문은 1855년에 인가된 것과 좀 달랐다.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미사용 기도문이었다. 옛날의 기도문은 "마음"을 강조하는 의도가 아주 분명했다. 그러나 새 기도문은 그와 대조적으로 말씀이 지닌 깊은 뜻과 공경의 정신을 더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전에는 마리아의 성심이 무엇보다 모든 덕의 모범으로 표현되었는데 반하여, 이번에는 마리아가 영적인 어머니라는 특성이 강조되어 있었다.
6.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진한 교회 쇄신 이후의 성모 성심 축일
1969년 2월 14일, 새로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축일표를 승인하면서 발표된 교황 바오로 6세의 자의 교서 "파스카 신비"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세운 원칙을 재강조하고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마리아의 신비는 아들 예수의 신비와 엄격하게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마리아의 축일 주기는 주 예수의 축일 주기와 아주 비슷하게 되어 있다. 실제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축일표는 그날 또는 그 주간에 기념하는 신비에 마리아가 어느 정도로 관여하고 있느냐에 따라, 마리아의 축일에 비중을 달리 하여 대축일, 축일, 의무 기념일, 선택 기념일을 정해 놓고 있다. 1급인 대축일은 인류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이고, 그 사건 속에서 마리아는 아들 예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주역을 맡고 있다. 2급에 속하는 의무 기념일은 교회의 전통에서 나온 어떤 큰 마리아 공경 사건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선택 기념일 가운데는 큰 수도 단체나 유명한 마리아 성지에서 발생되고 발전된 마리아 공경을 기념하는 축일이 포함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기준에서, 새로 나온 교회의 축일표에는,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축일을 예수 성심 대축일 후 토요일에 선택 기념일로 지내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날짜를 잡은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 어머니의 신비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축일을 선택 기념일로 분류해 놓았으니 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 이곳의 내용은 후안 알파로/마티아스 오지/테오필로 카베스트레로, [예수의 어머니], 가톨릭 출판사, 1988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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