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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학문을 통한 하느님 사랑 - 토마스 아퀴나스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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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04 조회수590 추천수1
 
 

학문을 통한 하느님 사랑 - 토마스 아퀴나스

새로운 회칙 「신앙과 이성」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이 지니고 있는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강조하셨다. 또한 그의 『신학대전』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인류의 가장 중요한 지성적 금자탑'' 중의 하나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 많은 사람들이 토마스의 사상에 열광했던 것인가?  
표면적인 토마스의 생애 속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사람은 실망하기 쉽다. 그의 생애에는 소크라테스가 의연한 죽음을 통해서 항상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게 되는 것과 같은 뚜렷한 사건도 없었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결정적인 회개에 견줄 만한 극적인 사건도 없었다. 그의 생애는 극히 단순했고, 자신의 생애의 대부분을 여러 학교와 대학에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 속에서 벌여졌던 작은 사건들은 위의 질문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토마스는 이태리 남부의 아퀴노라는 마을 근처에서 1225년경에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를 5살 때 근처의 한 분도회 수도원에 봉헌하여 초등교육을 받게 했다. 뛰어난 지적인 성숙을 보였던 토마스는 이미 14세에 인근 나폴리 대학에 입학했다. 이 대학에서는 많은 대학에서 금지되어 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되어 있었기 때문에, 토마스는 자신의 학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될 이 철학자를 다른 학생들보다 먼저 접할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토마스에게는 나폴리에서 더욱 중요한 만남이 일어났다. 당시 그곳에는 새로운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그들의 청빈한 생활,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열정 등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 수도회에 입회하기를 원했다. 토마스가 도미니코회의 총장의 뜻을 따라 당시 신학의 중심지인 파리대학으로 길을 떠나자, 그가 교회의 고위성직자가 되기를 원하던 가족들은 도중에 그를 납치하여 약 1년간 감금하였다. 그동안 가족들은 혼자있던 토마스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들여보내어 유혹하거나 위협하는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토마스의 마음을 돌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 많은 어려움들을 잘 극복하고 자신의 결정을 확고하게 밝힘으로써,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마침내 도미니코회에 정식으로 입회했다.
드디어 그는 1245년 가을에 파리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大알베르투스라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게 된다. 알베르투스는 당시 ''보편박사''라고 지칭될 만큼 박학했으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리스도교 세계로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토마스는 이 훌륭한 스승 밑에서 공부하며, 그로부터 놀랄 정도의 개방적인 정신을 물려받았다.
토마스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알베르투스는 몸집이 크고 말이 적었기 때문에 붙게된 그의 별명 ''벙어리 황소''라는 말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사람을 벙어리 황소라고 불렀지만, 그가 앞으로 가르치게 될 때, 그 울음소리는 전 세계에 울려퍼질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영감에 찬 예언은 바로 실현되었다.
토마스는 그후 파리대학에서 규정보다 젊은 나이로 강의를 시작했고, 1257년에는 사상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우정 관계를 유지했던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보나벤투라와 같이 교수단에 받아들여졌다. 당시 전 유럽의 청년 학생들이 모여든 파리 대학에서 그의 명성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1259년 토마스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가 9년동안 여러 교황청 소속 학원과 수도원에서 강의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1264년에 성체축일을 제정하고 이를 위한 전례기도  편찬을 유명한 신학자였던 토마스와 보나벤투라에게 위탁했다. 편찬을 마치고 난 후에, 보나벤투라가 먼저 토마스의 기도를 한 번 읽어보고서는 그만 그 완벽함에 놀라 자기의 것을 태워버렸으므로 토마스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전해진다.
토마스는 1269년부터 1272년까지 다시 파리 대학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 활동은 절정에 이른다. 이 시기에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통한 주석자임을 자처하던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을 벌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옹호했다. 그후 이탈리아에 머물며 수도회 학교들과 나폴리 대학에서 강의했다. 토마스는 교황에 의해 리용공의회에 초청되어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한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서거했다.  
그는 1323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1879년에는 그의 사상이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영원한 아버지』에 의해 가톨릭교회의 공식 학설로 인정되었다.
이와 같이 토마스는 14세에 대학에 입학한 이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직 학문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재능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그는 대학이나 교회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항상 초빙을 받았다. 이런 떠돌이 생활이 학자인 그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그는 어떠한 조건 아래서도 연구와 저술에 정진한 나머지, 짧은 생애에도 놀랄 만큼 많은 저작들을 남길 수가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열정이야말로 토마스가 지녔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끊임없이 ''모든 인간들이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바로 하느님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 생애를 통해서 그분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토마스는 가끔 모든 것을 잊고 깊은 사색에 빠지기도 했으며, 생애 말기에 이르러서는 신비적 체험이 강해져 성자적 황홀경에서 삶을 영위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1273년 12월에 미사를 봉헌하던 도중 신비한 체험후, 토마스는 일체의 저작활동을 그만 두어 버렸다. 그의 동료가 여러 차례 저작을 계속하도록 권했으나 토마스는 결국 "내게 계시된 모습에 비하면 내가 쓴 것은 모두가 나에게는 지푸라기처럼 보인단 말이네"라는 대답을 남겼다고 한다. 이런 신비체험은 토마스가 일생동안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집약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실제로 그는 먼저 주님께 달려가 기도하지 않고서는 결코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의 탐구와 노력의 결실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또한 그의 겸손은 논쟁과 학문적인 토론과정에서도 확실히 드러나는데, 토마스는 모든 토론 중에 항상 평온과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였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견 중에서 올바른 것과 그른 것을 가려내어서 그것을 토론을 통해 수정해 주려고 노력했다. 이런 자세는 심지어 그와 다른 의견을 가졌던 토론자들에게서도 찬탄과 칭송을 받았다. 자기 자신의 입장과 생각만을 주장하느라고 타인의 의견을 무시해 버리기 쉬운 우리들에게 그의 자세는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그는 또한 엄청나게 많은 정보들을 경제적으로 기술하는 뛰어난 구성능력과 그의 명석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사상은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므로, 시공을 초월한 가치를 지녔다는 의미에서 ''영원의 철학''이라고 불리기까지 하였다.
토마스의 이런 가치가 잘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중세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던,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토론이다. 그는 철학과 신학의 고유한 영역을 구분하여 각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것들을 신학 내에서 완성시키는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그의 방향성은 다음의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피조물들이 지니고 있는 본성을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는 것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철학적 진리는 상호 경쟁적이지 않으며, 상호 보완적이다. 그는 이성적 이해를 간과하는 ''신앙주의''와 궁극적 진리를 거부하는 ''독단적 이성주의'' 모두를 극복하기 위한 초석을 놓았다. 즉 토마스의 영성은 이성의 작용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이성의 진정한 동의를 추구하고 있다.
그가 이런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데는 자신이 즐겨 인용하던 "진리는, 누가 말하든, 모두 성령으로부터 온다"(성 암브로시우스)라는 확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확신을 바탕으로 그는 편견 없이 오직 진리만을 겸손하고 근면하게 추구했고, 아무리 그릇된 이론이나 주장들 속에서도 진리의 단편들을 인정하고 그것을 그릇된 부분들로부터 갈라낼 수 있는 비범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장한 것만이 아니라, 이를 『신학대전』과 같은 훌륭한 결과물들이나 학문활동의 자세 속에서 확실히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당시 강한 의심을 받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일치하는 의미에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오류의 근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하면서도,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훌륭한 도구를 그의 사상 체계 안에서 발견해 냈다.
토마스가 당대의 여러 철학들에 대해서 보여주었던 개방성을 고려하면, 우리는 현대의 다양한 사상과의 관계정립을 위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만일 토마스의 정신에 진정으로 충실한 학자들이라면 근대 이후의 다양한 발전과 현대학문의 여러 시도들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적대적이며 논쟁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다. 처음부터 회의, 거리낌, 심지어 적개심 등을 지니고 접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안에서도 참신한 지적 조명을 발견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다가가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토마스가 여러 사상을 단순히 결합시킨 혼합주의적 성향을 띠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고대의 거룩한 박사들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있었기에 어떤 점에서는 그들 모두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라는 가예따노의 말처럼 장구한 역사적 전통을 받아들였지만, 그의 유명한 ''신존재증명''에서도 명쾌히 드러나듯 이를 새롭게 종합하였다. 이와 같은 종합 안에서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기만 했던 아베로에스주의의 편협함과도 구분되는 뚜렷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창조사상과 연결시켜, ''존재자체''에 대한 자신의 학설을 발전시켰다. 그에게는 신이야말로 각 사물에게 자신의 자유로운 창조를 통해서 존재를 부여하신 분이시다.
겸손하고 개방적인 토마스의 자세는 현대인들에게도 대화를 위한 훌륭한 지침을 제시해 준다. 우리도 이런 자세로 계속 노력해 갈 때, 토마스가 영원한 지혜라고 불릴 수 있는 계시된 진리와 전수된 여러 철학사상을 훌륭하게 종합했듯이, 계시와 현대의 다양한 사상과 문화 속에 담겨 있는 보화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영성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을 통한 하느님 사랑: 토마스 아퀴나스」, 월간『들숨날숨』, 1999/9, 1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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