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왜 우리는 극단으로 치닫아야 할까요? | 카테고리 | 천주교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성경엔 왜 꼭 제물을 바쳐야지만 하느님께 구원을 |3| | |||
작성자이의형 | 작성일2011-02-07 | 조회수609 | 추천수0 | 신고 |
제가 일단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극단으로 가는 것은 기독교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속성이 보편적 것에서 긍정뒤에 부정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시작은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모든 종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을 통한 것을 기독교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의 문제는 성부 성자 성령을 단순화 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 단순화 것 뒤의 좋은 점이 나쁜 점이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나쁜 점을 부정한 점이라고 또 단순화하여 긍정적인 단순한 결론이 문제가 되어 헤어나기 힘들어서 하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단순화는 예수 중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이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고 진정으로 하느님을 잘 믿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만 강조하고 이렇게 사는 삶이 무엇인가 고민하는 것과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제 신앙의 문제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저의 반론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말은 결국 인간의 극단적인 착각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구원을 받는가 그렇지 않는가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문제이지? 인간 스스로 판단을 할 수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극단이 예수님을 믿으면 극단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인간의 착각이 지금의 인간 중심이 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의견이 나오면 교회가 이를 철저히 막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괴롭다는 극단적인 지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을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같은 선택된자가 아니면 아무도 대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 처럼 눈이 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도 하고 어떤 권위를 쉽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 중에 교회가 아니, 사제가 지나친 교회 중심으로 판단하고 제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점은 단순화해서 좋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점으로 단순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하지 않은 것이라 혼자서 지키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인간의 문제와 교회의 문제를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정말 단순화해서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는 것에 대해 함께 우려도 하고 똑같이 조심도 하지만 언제나 극단적인 줄타기는 계속되는 것이 괴롭습니다. 하지만 피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유일한 길이라면 걸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갈등의 외치는 소리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하느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닙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은 무엇일까? 고민한 결론은 성경과 교회와 그 안의 역사에 등장하신 성령님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문제에서 언제나 일명에게 극한적으로 들어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라는 저 나름의 단순화가 쉽게 배웠지만 쉽게 해결도 되지 않아서 참으로 오랜 시간 마음의 병이 됩니다.
일단 저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통해서 어떠한 것도 알게 된 것도 없고 느끼고 깨달은 것이 없습니다. 만일 직접적이고 확실한 체험이었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불완전함 속에서 제 자신이 다른 것으로 대처하거나 바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모른다면 저는 그저 모르면 그뿐인데 제 눈에는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예수의 강조는 결국 말과 문자로 고착화 되고 법과 제도로 단순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범위만이라고 넓히는 것이 성령이라고, 예수의 강조를 성령의 강조로만이라도 대체되도록 시도만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예수의 강조는 결국 일단 누군가와 완전함을 추구합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화되어 어떤 다른 것이 인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강조는 모든 사람이 단순화되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름을 인정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강조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성공과 구원이 동일한 경우가 단순화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금은 더욱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교회가 더욱 다양화되는 것이 아니고 더 단순화 되어 상대를 쉽게 정죄하고 서로 쉽게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께 바르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로 갈 수도 없고 바르게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한 개인은 바른 신앙생활로 교회를 이루며 예수님을 잘 믿고 하느님께로 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창조된 것을 누가 알았을까요? 그것을 어떻게 지금 인간이 알 수 있었을까요? 저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구약의 인물들이 하느님과 함께 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성경을 통해서 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쓰여졌을까요?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 라고 봅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많은 구약의 인물들은 예수님의 메시아가 되심을 예언되었고 수없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성령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그리고 성령님께서 성령 세례로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탄생과 삶을 알게 하시고 죽으셨고 또한 다시 사심을 성령을 통해 분명히 확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령님과 함께 한 후에는 예수님께서 사신 이후보다 놀라운 일을 하였습니다. 바로 초대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는 결국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보다 그의 제자들의 성령님과 함께 하실 때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고 다시 부활하신 이유가 무엇때문일까? 저는 우리 인간들에게 성령님과 함께 하시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과 모든 사람이 함께 하길 바란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과 함께 하려던 인간의 역사는 좋은 점보다 나쁜 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예수님을 강조한 것이 더 좋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성령님보다 단순화한 것이지 본질과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려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도 예수님을 강조하는 것보다 더 좋다는 단순함으로 격렬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님과 함께 하는 일치가 되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재림은 불가하다는 생각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강조할 것은 불확실함 속에 확실함을 찾아야지 확실함 속에 불확실함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중심이 된다는 것은 불확실함이 두려워 확실함을 찾는 예수 중심이 더욱 예수님을 모르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님의 함께 하는 기회조차 박탈하게 하는 적그리스도적인 모습을 자기도 모르게 무익한 것을 유익하다고 외치게 되었다는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에 믿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교회 중심의 권력도 아니고 특정인의 소수도 절대로 아닙니다. 특정인과 특정 성경의 내용만으로, 혹인 예수님만 강조하는 것은 결국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성부 성자의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는 자신이 하느님이고 자신이 예수라고 하는 하느님께 배신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인간이 성령님과 함께 해야 하는가입니다.
나의 주장이 모든 사람과 함께 일치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가? 와 같은 문제라고 봅니다.
그래서 자신과 모든 사람과 함께 일치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게 저의 단순함으로 인한 극단적으로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는 분명, 말도 아니고 생각도 아닙니다. 함께 하는 삶입니다. 그럼 어떻게 함께 하는 삶이 되어야 할까요? 혼자서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이라고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혼자서 신앙생활도 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나의 문제가 남도 같은 문제로 고민도 합니다.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남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남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문제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까지 완전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 이제와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바로 불확실함이 지금의 문제라고 봅니다.
더욱 다양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예수님도 될 수 없고 직접 예수님이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되어 일치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안되는 것을 무조건 인정해서 다 흩어지는 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한 부분에서는 저 또한 매우 불확실함은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나누고 같은 신앙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그냥 되는 것을 그저 혼자서 아니 따로따로 극단적인 생각과 표현으로 서로가 멀리 극단적으로 멀어지는 것만 확인 될 뿐입니다.
차라리 모르면 자살 얘기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것을 알면서 그냥 모른척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주 작은 것인데 그저 실천할 수 없는 것이 괴로울 뿐입니다.
하지만 저 혼자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함께 극단으로 함께 성령님과 반대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너무나 물질 문화가 성령과 멀리 떠어져가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긍정적인 것이라는 막연한 단순함만 남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극단의 자살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왜 "자살"을 말하는지 고민한다는 그저 자살이 좋을 것이라고 대답밖에는 저에게 다른 답변은 없습니다.
저에게 어떻게 "자살"을 하려고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고민을 털어 놓을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께 바르게 나아가는 것이라면 자살인들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함께 하는 죽음이 가능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함께 예수님처럼 살다가 가는 것이라면 바로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이 아닐까요? 그럼 이 죽음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이는 바로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일치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은 어떻게 사는 가의 문제입니다. 다른 표현은 어떻게 죽는가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일치하고 살았는가입니다. 일치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이고, 일치되어야 할 것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믿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할 증명은 나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그 일치함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죽기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살기위해서입니다. 너무나 확실한 것이 아닙니까? 불확실함 속에서 확실함을 선택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일치할 믿음을 들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결과가 부정적인 것이 되어 하느님 앞으로 바르게 가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 앞서는 것이지 다른 고민이 앞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제게 가능한 최선을 다함을 하느님 앞에 제 믿음을 실천함을 보여드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게 제가 주님 앞에서 선택한 유일한 어떻게 라는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극단을 선택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선택을 해서 우리가 서로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분명한 것이라면 저의 의지와 노력을 분명히 실천해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저의 극단에 결국 인간이 아니고 부정도 아니고 불확실함도 아니고 불신앙도 아니고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도 아니길 바랄뿐입니다. 제 극단에 성령님과 함께 하심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과 같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누구든지 게을르고 무익할 수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본질의 극단이 분명히 보여주신 예수님의 길과 다르다면 분명한 선택을 하고 싶습니다. 바로 제가 극단으로 치닫고 싶은 저의 삶의 내용이면서 형식입니다.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