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묻고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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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의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08 조회수834 추천수0 신고

장길산 ( (2011/01/26) : 살인하는것은 권리가 아님니다 또한 살인을 방조하는것도 권리가 아님니다gloyacks)
 
장길산 ( (2011/01/26) : 자살도 일종의 살인입니다 같은 살인이지만 자살은 하느님의 안배를 거부한것이므로 되돌아볼 기회도 없으며 아울러서 후회할 기회조차도 포기하는것입니다 반성할 기회도 포기하는것이지요 이런 행위를 천주교에서 인정할 이유가 없으며 천주교 어느누구도 이를 승인할 권리도 없습니다gloy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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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 입자에서 앞에서 말씀하신 장길산의 글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살인도 하지말고 살인 방조도 하는 않았으면 합니다. 살인은 하느님의 안배를 거부한 것이고 되돌아볼 기회도 없으며 아울러 후회할 기회조차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땜을 만들어 땜으로 인해 강제 이주를 해야 하는데 누구는 아무런 상관없다고 해도 어떤 사람은 이주를 하면 그 동안의 생활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곳에서 생활터전을 다시 닦을 수 없이 생존의 위기를 맞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존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사람을 보면서 다른 방안도 있고 땜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보다 실이 많은데 득이 많다고 강제로 집행되었다면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저 이런 것을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까? 사실 분명히 교회의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문제지만 만일 교회가 땜의 필요와 그 집행 전과정에 모든 사람이 합의하는 것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뻔히 모든 사람들의 합의가 소홀히 되거나 피해당사자가 전혀 관여없이 일어났다면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집행으로 한 사람이 다른 가능성을 찾는 것보다 자신의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 상대가 너무 막강해서 죽음 각오하고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이런 투쟁을 말려야 합니까? 아니면 함께 투쟁을 도와야 합니까?

자살을 막고 살인을 막기 위해서 땜을 짖는 것을 반대하는 투쟁에 동참하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법과 권력이 강력한 상대에게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계속적인 피해와 생존권이 위협이 되는데 그냥 모르고 넘어가야 할까요? 누구에게는 생명과 똑같은 생활터전이 잃어버리면 그냥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가르침에 부합되는 것입니까?

 

저는 교회가 이런 이해상충된 상황이 생겼거나 그전에 이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신앙의 선택이 있다는 것을 말하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30여년 전에 군사정부정권 당시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독재타도를 외쳤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말입니다. 이에 한국 천주교는 마지막 생명의 보루가 되어 이들을 명동성당에서 보호를 해 주었습니다. 이들을 보호해 주지않으면 결국 고문이나 죽음을 경험했어야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살인을 막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 이들을 죽음에서 보호해 주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만일 이들 민주화 운동한 세력들을 한국 천주교가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군사 정부는 계속 되었을 것이고 독재타도의 외침을 더욱 거셌을 것입니다. 또한 더 많은 죽음이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보여준 것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곳에 정의가 있고 어느 곳에 하느님뜻이 함께 하고 있는지가 따져보아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서 카톨릭 교회가 보여준 것이 바른 따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지하고 잘 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 기쁩니다.

만일 군사 정부측에 따르면 이것은 반대하고 거부해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군사정부의 고문과 공권력 진압으로 인한 죽음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카톨릭 신자는 더이상의 죽음과 살인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뻔히 이런 공권력이 죽을 수도 있는 것을 알면서 뛰어든 것은 자살행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서 무조건 자살을 막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부끄러운 신앙이라고 봅니다.

이런 죽음을 없게 하기위해서 카톨릭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가 고민인 것입니다. 요즘 같이 자살자가 많고 묻지만 살인이 있다면 이는 분명한 문제라고 봅니다. 이렇다면 차라리 군사독재보다도 못한 것이 아닌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좀 어패가 있지만 군사독재때에는 알 수 없는 자살이 더욱 많았고 의문사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어패가 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이유없는 살인과 집단 자살은 개인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대해 어떠한 것이 없다는 것에 매우 무능력함이 더욱 아프게 합니다. 이는 분명히 위정자들에게 잘못된 길임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해답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 교회에서 독재타도하는 사람들을 성당에서 보호하였던 것과 같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런 자살을 막기위해 개인이 할 수 없으니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인도 이런 묻고 답하기를 하면서 스스로 어느 정도 정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는 카톨릭이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인지 알고 정리하는 선으로 가려고 합니다.

 

 지금의 종교의 한계가 보인다는 말을 하면서 이 한계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한계와 범위를 어느 정도에서 정리를 해야 하는지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분명해야 한다는 기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 묻고 또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이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정치적인 해석으로 묵살할 것이라는 예견이 있어서 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인지 의심할 수 있는 것 또한 많아졌습니다.

만일 가능한 부분이 있다면 본인이 참여해도 좋은지 나쁜지 알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참여한 부분에서 인사발령을 통해서 이런 가능성에 대해 불이익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들이 증폭된 것입니다.

만일 교회차원에서 넘겨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더 쉬운 방법을 두고 더욱 힘든 길만 선택한 것에 대해 매우 야속하고 저주스럽다고 생각해서 독을 품고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직도 저는 한국 카톨릭 교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다고 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이를 신앙과 세상과 구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일부는 찬성하고 일부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길에서 고난이 온다면 주장하고 외쳐야 함도 살인을 방조하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런 갈등이 왜 생길까 고민한 것이 시대의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르게 생각하고 주장해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글에서 시작한 성령님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새롭게 세상을 보는 신앙의 기준과 신앙의 모범을 다시 정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검한다고 보면 결국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입니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 그리고 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보이고 함께 하는데 많은 문제가 있어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먼저 지금의 문제가 심각함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살의 증가와 묻지만 살인의 증가로 문제를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살과 살인을 막고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교회가 신앙인이 살기위해 어느 정도의 선을 둘 것인가 하는 고민인 것입니다. 그저 나와 같은 고민은 그저 접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해 주는 것이 지금의 제 바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교회와 제 자신의 범위에서 벗어난 문제니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안위하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 답을 받는다면 분명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이런 분명한 가르침이나 기준이 없이 그저 자살반대하니 따르라고 하는 것은 더욱 고민을 하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에 어느 사이에 해결이 되었다면 장길산 님의 의견이 가장 저에게 맞는 최선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다면 자살을 방조한 죄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문제가 더욱 심각한 범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는 주장입니다. 그렇다고 쉽게 따를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이런 것이 되지 않기 위해 고민하는 것입니다. 고민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라고 답을 제시받고 심정입니다. 그렇다고 명확한 답으로 해결될 것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합심하고 이런 함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말지언정 깽판을 놓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카톨릭 굿뉴스 게시판에 바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약자편에서 주장하는 사람의 글이 삭제 당하고 강한 힘에 절망하는 것을 맛보았을 때에  신앙의 길과는 전혀 다른 것을 직면하게 될 때는 매우 자괴감을 갖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자살이 최선인가 싶습니다. 만일 내가 잘못된 것이라면 무엇으로 증명해야 하나 고민이 됩니다.

특히 내가 사는 이 나라 이 땅에서 나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을 죽일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자신이 무엇이든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있는지 토의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자살이외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님에 대해 논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김희경 님의 의견으로 결국 누가 하느님 뜻에 바른 신앙을 가고 있는지, 누가 성령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무엇으로 증명하겠습니까? 저의 가장 소중하고 가장 힘든 것으로 결백을 주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방법이 말고 다른 것이 있는데 다른 선택의 여지마자 차단된 답변만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 됩니다. 그럼 저의 자살이 최선의 선택이지 하느님께서 막는 살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치는 주장입니다.

진정 바른 따름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느님 앞에서 결백함을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이라면 개인이나 교회가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지었거나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모르고있는 것이 들어난다는 것입니다. 남이 교회에서 상관없다고 카톨릭 신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런 사람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바른 성령님을 모른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이 모른 것이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자살이 있다면 분명히 하느님과 상관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자살이 늘고 있다면 예수님과 상관없은 교회가 그 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성령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교회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다면 자살과 살인은 더욱 사라지고(없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살인이 늘고 있다면 따를 수 없는 다른 일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문제가 있다면 이런 것일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교회의 길을 선택하지 않아서 자살과 타살이 많다고 말입니다. 그럼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무조건 자살과 타살을 나쁘게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바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바르게 살지 않아서라고 말입니다.

지금 제가 마지막을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 교회의 가르침에 잘 따를 수 없는 이유를 들어서 무엇으로 인해 우리가 교회와 일치 할 수 없는 것을  알아보려는 것이 바로 바른 성령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고민에 얼마나 귀기울일 수 있는가입니다. 얼마나 진지한가에 따라 개인은 자신의 삶에 대해 더욱 귀기울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간직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삶이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으로 더욱 가고 있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아닌데 긍정적이라고 하는 것은 바르지도 않은데 긍정적으로 보는 우매한 것이 되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따르다가 부정적인 결과로 빠지는 우매함에서 벗어난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주장하는 것이 성령님과 함께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다는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이에 다른 메시지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성령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고 거짓으로 진정한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아주 단순한 답은 무엇일까요?

제가 하는 소리가 하느님께 향한 것일까요?

지금 그저 조용히 자신의 삶만 가꾸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것일까요?

저는 누군가 자신의 삶을 가꾸는 사람이 꼭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남의 작은 아픔이 우리 전체에게 너무나 큰 죄가 됨도 알려고 귀기울이는 것이 더욱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아주 단순한 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진국의 개발로 인해 많은 이웃나라가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이 죽고 재앙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재앙으로 인해 죽는 사람은 타살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군가 자연을 파괴해서 엉뚱한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멀쩡하고 죽고 당한 사람만 자신의 고통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 참으로 가슴아프기만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말은 이런 것 같습니다.

저는 테레사 수녀님보다 못한 게으름뱅이고 무능력합니다.

그 분의 사랑과 희생을 저는 도저히 흉네도 못 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좀 다릅니다.

 

인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신 것이 필요하고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주장하는 맥락으로 저는 테레사 수녀님과 같지 않습니다.

인도의 많은 사람들의 수탈하는 지배계층의 정신과 잘못된 차별이 없었다면 그렇게 인도인들이 그렇게 병들과 고통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테레사 수녀님처럼 살아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정치적 경제적 침탈과 법과 제도적 문제와 문화를 일반화할 수 없는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인도를 돕는 것이 진정한 도움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인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카톨릭 신자의 길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수탈당하는 피지배계층에게 이는 정당한 것이 아니고 더 좋은 것을 잃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도적질을 당하는 것과 같고 다른 사람에게 조용한 살인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지배계층에게는 이는 문화가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방식으로 보이지 않은 조용한 살인이고 다른 방식의 조용한 살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행복한 피지배계층이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이는 인도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지금의 한국의 카톨릭 신자와 한국사람에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피지배계층과 지배계층에게 나름의 이유가 진정하게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인도인에게 불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면 누구든지 자살이 늘고 타살이 증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인도에서 자살이 늘고 타살이 늘었다면 제 의견이 맞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 의견을 묵살해도 좋은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자살이 늘고 있다면 인도보다 못한 종교 의식이 죽음으로 몰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카톨릭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죽음에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이게 어떻게 따르는 것이 중요한지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방법이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힘들어서 온 가족이 함께 자살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무능력해서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무엇인가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야할 문제이지 당신 가족 전체가 죽어서는 안되는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가족이나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다른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높은 빌딩에서 자살을 하려고 뛰어내리려고 한다면 아무도 자살이 나쁜 것이라고 말을 해도 저는 이렇게 결단하겠습니다. 더이상 자살로만 가는 세상에서 내 스스로 누군가에게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막고 있다면 그 짐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걸림돌이 되느니 바른 길이 가는 길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지금의 삶은 하느님의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엉청난 큰 열차에 많은 사람이 가득 타고 있고 그 열차의 앞에 깊은 강의 중간에 연결된 다리가 허술해서 곧 무더질 것 같이 중간 다리 연결부분이 떨어져 가고 있는 것을 발견되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그 열차를 멈춰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분명히 열차에 어떻게라도 신호를 주고 싶습니다.

 

저의 주장에 답을 주시고자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신호를 주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게 함께 자살이든 타살이든 막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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