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자살"은 개인의 죽음과 사회의 죽음을 알리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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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의형 | 작성일2011-02-22 | 조회수596 | 추천수0 | 신고 |
자살이 급증하고 묻지마 살인이 한국사회에서 발생 빈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겠지만 굶어 죽는 경우도 아닌데 말입니다.
때론 창작을 하는 시나리오작가는 굶어 죽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발생하는 것을 보니,
자살은 더욱 늘어갈 것 같습니다.
지금 이런 문제에서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것이 있어야 굶어죽지도 않고 살기가 좀 나아질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문제까지 해결될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도 중요한 것으로 인해, 지나치게 물질주의로 빠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교회와 교회 지도자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정신적인 문제까지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한 개인의 자살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나 사회와 교회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는 것에 대해 매우 큰 우려가 결국 카돌릭 교회는 자살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런데도 자살을 교회가 인정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의 경우와 다른 경우입니다.
먼저 자신의 결백을 위해 자살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이 또한 교회에서 반대할 수 있는 점도 있지만 이 경우에 가장 먼저 생각할 물질과 정신의 문제에서 정신이 죽어가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자살을 막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음을 주장해 온 것입니다. 이에 대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평신도인 저는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확장된 제 이야기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수 밖에 없는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문제에 대한 주장입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내용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경우라고 하지만 실제는 인간이 이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교회는 인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도 인정하고 고려해야 할 점도 분명히 상존한 문제입니다.
이에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종교에서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든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쉽게 판단하는 것을 금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죽음이 사회에서 인정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이에 대해 종교, 특히 카톨릭에서 무시와 방관은 결국 기본적인 그리스도 정신에 배치되는 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하는 사람의 문제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자살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인 문제나 주변환경적인 문제에는 실제 인간의 일이라고 하면서 전혀 종교문제가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풍토는 결국 개인은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지키고 나가는 데 한계를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속을 떠나 개인의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도 길이겠지만 사회의 모순과 악에 무기력한 종교인의 모습은 또한 참 종교인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인의 정신은 세속에서 멀리있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종교지도자는 분명한 입장과 방향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통해 종교지도자는 정치지도자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실제 신앙의 삶의 문제에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개인 신앙의 생존과 자신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존립이 혼자서 생존투쟁해야 하는 고달품을 안고 사는 것에 대해 종교는 별의미가 없는 것에 대해 자살을 허용해다라는 요청을 하면서 자살에 대해 종교와 사회가 보다 일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살은 분명히 심각한 문제가 되었고 사회악이 도가 지나친 것에 대해 종교와 세상을 분리하는 측면도 필요하지만 이런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지 않는 것은 결국 종교 기능을 막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종교지도자나 신앙인이 반대만 한다면 저는 진정하게 하느님을 믿고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분명한 것은 종교를 떠나서 개인의 죽음이 어떻게 되어서 자살을 선택했고 이런 자살이 생기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에 대해 개인의 문제로만 삼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사회와 불일치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의 자유면에서 개인의 신앙이 사회와 분명히 불일치할 수 있는 경우입니다. 이런 불일치가 심각해 지면 저는 개인의 죽음이든 그렇지 않는 죽음이든 결국 개인의 신앙의 자유가 자유롭지 않는 것처럼 개인의 자유또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개인의 자유와 상관이 없거나 분명히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평신도인 저는 자유롭게 주장도 할 수 있기에 자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고 경험한 죽음은 자살이라기 보다는 무형의 타살이 나는 경우입니다.
개인이 자살한 것은 맞지만 개인이 사회에서 어쩔 수 살아가면서 사회의 구조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살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반인류 범죄가 생긴다는 뉴스입니다.
하지만 북한과 같은 범죄는 지금 남한에서도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북한보다 다른 좋은 점도 있지만 더욱 참혹한 것이 남한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북한의 개인의 키로 인해 결정합니다. 그래서 키 작은 사람을 강제 수용하고 2세를 갖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한 개인의 사회에서 완전 추방되는 것입니다. 실제는 가두어 놓고 죽기를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한은 직접적인 강제 수용은 없습니다. 이에 대해 남한는 북한 보다 분명히 다른 좋은 점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재 개인은 자신이 선택하고 살아가야 할 길이 전혀 없을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보이지 통제가 분명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논쟁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강제 통제와 다를 바가 없이 한 개인의 자살밖에 선택하지 못하는 비인간적인 통제를 그대로 남한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자살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 남한에서는 북한보다 많는 자유와 가능성을 갖고 있고 실제 더 많는 물질적인 풍요와 정신적인 풍요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자유와 행복과 만족을 결정하는 삶의 본질에서는 강제 수용소와 같은 억압과 통제로 개인의 삶이 말살당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 결혼은 스스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서 개인은 결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어도 사회 구조에서 강제로 낙태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아이를 낳아도 실제 사산을 시킬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개인이 출산이 되어 살아가지만 결국 물질적인 노예가 되는 것이지 정신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특히 이런 생각에 대해 다른 생각은 결국 사회와 정치적인 문제로 약자의 틀에서 생존권마저 위협이 되고 있는 것에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과 신앙의 자유문제는 바로 자신의 말과 주장을 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자살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과 자유 양심에 근거해서 약자를 돌보고 약자에 대해 배려하는 정치지도자가 자살하는 것에 대해 종교인으로서 매우 심각성을 느낍니다. 이에 대해 카톨릭 종교지도자는 정치적인 문제로 묵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행태라고 지적해 온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신앙인으로 가는 것을 탄압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님과 같은 방식으로 사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잘못된 국가와 사회의 권력으로 생기는 문제에서 이에 보다 적극적으로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에 맞서는 것은 종교 지도자로서 마땅히 보여주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정의구현사제단이 보여준 민주화와 현재의 모습에서 저는 신앙인으로 본을 보여주시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자신이 이런 약자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에 비해 이 분들을 멀리서나 지원하는 맘으로 자살을 방조하는 죄는 면하며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교회권력마저 탄압하고 일부의 삐툴어진 신앙의 중심으로 욕과 정치적 탄압을 찬성하는 모습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악에게 충성하자는 이런 보수적 경향에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입장과 다르다고 이렇게 막말까지 하면서 안좋은 모습을 방조하는 것까지 그대로 본다고 해도 직접적인 추기경님의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탄압을 가하는 것은 악과 함께 춤을 추는 추태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종교마저 물질로 정신까지 완전 말살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는 종교마저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는 북한보다 더욱 악날하고 치졸하고 더러운 통제와 탄압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북한의 인권탄압에서는 잘못을 알면서, 자신의 문제에는 심각성을 모르면서 남만 탓하는 것 입니다.
지금 북한의 인권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남한의 인권도 심각합니다. 지금은 북한의 탄압으로 인해 종교의 자유가 생존할 활률보다 남한의 종교를 부정하는 확률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영혼의 문제로 보면 지금 대한민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느님 신앙을 갖고 사는 것에 완전한 말살을 하고 있다는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심각함으로써 진정한 신앙인의 자각함이 더욱 들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 편에서는 신앙인으로 살면서 다른 한 편에서 신앙인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현시대의 현 사회의 모습에서 지금 카톨릭 신자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저 개인의 자살이 사회문제이지 카톨릭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면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 카톨릭 신자는 분명한 중심이 바로 서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자살을 하든지 자살을 막든지 분명한 것은 하느님 중심에 서 있는가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교회와 사회와 국가가 일치할 수 있는 인간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평신도로서 진정한 선교와 복음 사업의 완성을 위해서라면 지금과 같은 문제에 얼마나 같이 아파하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과 비슷해 질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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