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세례의 유효성에 관한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새로운 답변* | 카테고리 | 7성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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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 작성일2010-11-05 | 조회수2,563 | 추천수0 | |
세례의 유효성에 관한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새로운 답변*
(안토니오 미랄렐스 몬시뇰)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는”(티토 3,5) 세례는 주 예수님께서 당신 교회를 부요하게 하신 가장 소중한 선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분명히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1)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바라신 대로 올바르게 세례를 거행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제기되는 의문은 축소하지 않고 오히려 참다운 세례를 보장하고자 하였다. 물론 교회의 가르침이 이러한 것을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근 몇 세기 동안 교황청과 신앙교리성에서 발표된 문서들은 세례의 유효성에 관한 이러한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에는 세 개의 문서가 발표되었다.2) 이 문서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두 가지 특정 영문 세례 양식에 따라 수여된 세례의 유효성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는 가상의 문제가 아니라 일부 영어권 나라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에 관한 것이기에 중요하다. 분명히 이 문제는 사용된 말이 영어여서가 아니라 어느 언어로든 표현될 수 있는 세례 양식 자체에 관한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구원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 문제의 중요성이 폄하될 수 없다. 주님께서 몸소 말씀하셨듯이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세례가 필요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세례를 주는 사명이 나오게 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그래서 교회는 참다운 세례의 집전을 무효화하는 세례 양식의 사용을 허용할 수 없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든 잘못을 고쳐 주시리라는 생각을 위안 삼아 이러한 위험을 축소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책임으로 맡기신 것을 수행하도록 부름 받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준 세례는 마태오 복음 끝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몸소 제정하신 것을 변경할 권리가 없다. 그래서 각 위격의 이름을 따라 부르며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께 청원하는 내용이 없는 모든 세례는 무효이다. 지난 세월 동안 교도권은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것이라고 되풀이하여 가르쳤다. 여기에서 이와 연관된 교도권의 문서들을 모두 나열할 필요는 없다. 다음과 같이 대표적인 문서 몇 가지만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다마수스의 교의 서한」(Tomus Damasi, 382)3)과 성 그레고리오 2세 교황의 교령 「나의 소망」(Desiderabilem Mihi, 726)4)과 성 즈카르야 교황의 「거룩한 입문」(Sacris Liminibus, 748)5),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의 문헌 「보편 신앙」(De Fide Catholica, 1215)6), 비엔 공의회의 헌장 「보편 신앙」(Fidei Catholicae, 1312)7), 피렌체 공의회의 칙서 「하느님 찬미」(Exsultate Deo, 1439)8),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령 「성사」(De Sacramentis, 1547)9) 등이 그러하다. 세례 예식에 관한 전례 문헌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대신하는 용어를 제안한 바 없다. 성사 정식은 교회의 신앙의 표현으로서 검토되어야 한다. 성사 정식은 신앙의 말씀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세례 정식에 관하여 분명히 밝힌 것처럼, 신앙의 말씀에서 성사 정식의 유효성이 나온다.10)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은 이에 관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글을 주해하면서 성사에서 말씀이 유효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발설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을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11) 앞에서 인용한 교도권의 발표문에도 이러한 내용이 들어 있다. 세례 정식은 삼위일체 신앙을 적확하게 표현해야만 한다. 유사한 양식은 이를 표현하지 못한다. 이 문서에서 다루고 있는, 세례 정식을 대신하는 대안 양식들은 하느님의 위격들에 관해 성경에 나와 있는 것과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하느님을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하려는 특정한 페미니즘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은 성부와 성자라는 이름을 성 차별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를 다른 이름으로 대신하는 것은 우리의 삼위일체 신앙을 훼손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신앙과 일치하는 표현을 위해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에 인용되어 있는 아타나시오 신경에 주목하기로 하자. “가톨릭 신앙은 이러하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삼위로, 삼위를 한 분의 하느님으로 흠숭하되 각 위격을 혼동하지 않으며, 그 실체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은 하나이고, 그 영광은 동일하고, 그 위엄은 다 같이 영원하다.”12) 하느님의 세 위격의 이름은 신약 성경과 교회 전승에서 되풀이하여 정해진 것이다. 이 이름은 관계의 명사들로, 다시 말해서, 본질적 속성에 따라 구분되고 그 본질에 대하여 맺는 관계로서 나타나는 위격의 이름들인 것이다. 분명히 “하느님의 단일성은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세 위격의 실제적 구분은 오로지 위격이 다른 위격과 가진 관계에 국한된 것이다.”13)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당신 외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그 아들은 오직 당신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서만 영원히 아들이시다.”14)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자와 성부와 구별되는 하느님의 한 ‘위격’으로 계시되셨다.”15) 창조주, 구세주, 성화주라는 이름 또는 창조주, 해방자, 보호자라는 이름이 성삼위의 속성에 대하여 붙여질 수 있다. 세 위격에 공통된 것이 어느 한 위격에게 적합한 속성과 어떤 유사성이 있으면 그 위격의 속성이라는 논리에 따른 것이다.16) 예를 들어, 창조주는 성부의 속성이다. 창조 행위 안에서 하느님의 권능이 피조물들의 존재 원리로서 최상의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권능은 성삼위 안에서도 다른 위격이 아니라 성부께 알맞은 속성과 유사하다.17) 그러나 “창조는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공동 업적이다.”18) 레오 13세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일상적인 언어로 가르침을 주셨다. “교회는 성부께서 가장 탁월한 권능의 활동을 하시고, 성자께서 가장 탁월한 지혜의 활동을 하시며, 성령께서는 가장 탁월한 사랑의 활동을 하신다고 매우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 모든 완덕과 외적 활동이 성삼위이신 하느님의 공동 활동은 아니지만, 실제로 ‘성삼위의 본질이 나누어질 수 없듯이 성삼위의 활동도 나뉠 수 없다.’19)”20) 하느님의 세 위격을, 위격의 속성에 따른 개별 이름을 붙인다고 하면서 세 분에게 공통된 이름들로 지칭할 때, 삼위일체 신앙은 적절히 표현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답변’에서 다루고 있는 양식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삼위의 하느님께서는 모두 창조주이시고 성화주이시며 해방자이시고 보호자이시다.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하느님 세 위격의 공동 작업이다. 삼위가 오직 하나의 동일한 본성을 지니셨듯이, 그 활동도 유일하고 동일하다.”21) 구원도 그 제일 원인인 성삼위 전체의 활동이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성 안에서 수난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으므로, 구세주라는 이름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께 적합한 이름인 것이다.22) 삼위일체 신앙은 매우 신중하고 정확한 언어 사용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위격들을 지칭하는 이름을 세례 정식에서 각 위격에 속하는 다른 이름들(부모와 자녀 그리고 그 두 분에게서 발출된 분)로 대치한다면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이 그것을 무효로 여기지 않았을까 하고 심각하게 의심하는 신학자들이 많은 것을 감안해 보아서도,23) 신앙교리성에 제출된 문제의 양식들을 통해 받은 세례가 진정한 세례가 아니라고 여겨야 할 이유는 더욱더 정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효한 양식들 가운데 하나로 세례를 집전하는 사람은 이 행위의 대상자를 속이는 것이다. 또한 유아의 경우에, 참세례를 희망하며 유아를 세례로 인도한 이들을 속이는 것이다. 이는 심각한 불의로서, 지체 없이 교정되어야 하고 세례에 대한 원의의 유효성에 근거하여 무기한으로 연기하여서는 안 된다. 세례를 통한 성사적 인호의 선물은 최대한 빨리 보장되어야 한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표지(인호)를 새겨 준다. …… 신자들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에 합체되어 그리스도교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인호를 받았다.”24) 교회 일치 차원에서 참다운 세례를 보장하는 일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공통으로 받은 세례 덕분에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교회나 교회 공동체들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은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교의와 이 밖의 성사들과 교회 관리의 측면에서 부족함이 있다 하더라도, “세례는 세례를 통하여 새로 태어난 모든 사람을 묶어 주는 일치의 성사적 끈이 된다.”25) 진정한 세례를 포기하는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라시는 완전한 친교의 목표에서 매우 멀어짐으로써 교회 일치의 길에서 큰 퇴보를 하는 것이다.26)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에페소서에 잘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아주 충실하게 일치하여 남아 있으라는 명을 받고 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5-6). 교회의 목자들은 이 신앙교리성 문서를 통해 힘을 얻어 또 다른 무효한 세례 양식이 있는지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이 문서는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윌리엄 조셉 레바다 추기경이 ‘세례의 유효성에 관하여 제기된 의문에 대한 답변’과 함께 보내 온 해설로 2008년 2월 6일 공문(177/85-26842)에 첨부된 A New Response of the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on the Validity of Baptism을 번역한 것이다. 1.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121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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