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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사악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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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1-03-05 조회수4,529 추천수1

인류역사상 하늘과 땅 온 누리가

비통하고 장엄한 침묵 속에 잠긴(묵시 8,1)

정말 모든 것이 숨죽인 순간이 두 번 있었으니,

하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아산 십자가상에서 못 박혀

순종의 속죄물로 바쳐지는 순간이요,

또 하나는 모리아 산상에서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이

순종의 믿음 때문에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이다.

 

그것은 모두가 가장 귀한 것을 순명으로 바침으로써

자기(악)를 이겨내고 하느님과 일치(화해)를 이룬

절대순명의 제사였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이사악 제사의 의미이다.

 

단지 ’대속’인 그리스도 제사인 경우엔

하느님 스스로 그것을 행하신다.

즉 하느님께선

그분께 있어 가장 귀중한 존재인 외아들을 보내

그를 통해 인류를 대신하여

순종으로 자신을 바치게 함으로써 인류의 죄악을 극복하고

그럼으로써 그분과 인류 사이를 가로막던 벽을 허물어

화해를 이루어 주신 것이다.

이것은 화해에 있어서의 진리의 길이다.

 

내가 내게 있어 가장 귀중한 것을

하느님 때문에 순종의 맘으로 그분에 바치며 버릴 때,

그 사랑에 의해 자기극복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그분과 나 사이를 가로막던 것이 사라지면서

자연 그분과의 화해와 일치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악 제사이다.

 

이사악은 그때까지 아브라함에 있어

삶의 희망과 기대의 전부로

하나의 우상적 존재로 부지불식간 여겨졌을 것이다.

어쩌면 하느님보다 더 소중한 존재로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자연 이사악에 쏟는 정성 그만큼

하느님과의 친교가 소홀히 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본말이 전도되어

이제까지 하느님을 섬긴 것이 오직

이사악 하나 얻기 위하여서였던 것처럼

생각되어지기도 했을 것이고,

결국은 내 성소(聖召)의 목적이

바로 이사악인 것처럼 여기기까지 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을 지극히 사랑하사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려는

하느님께서 어찌 그냥 보고만 있을 것인가.

 

저녁밤 별보기를 참으로 즐기는

낭만적 성격의 소유자였던 아브라함은

아마 그날 저녁도 하느님과 함께 별을 바라보며

온갖 삶의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예의 그 이사악 자랑을 하느님께 늘어놓으며 행복에 겨워

어리석은 부자처럼 현실에 안주하며

스스로 도취하기까지 했으리라.

아니 어쩌면 이사악을 다시금 어서 보고픈 맘에

하느님과의 친교 시간마저 얼렁뚱땅 넘기고서

그것도 자기 혼자서만 떠들고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 등뒤에서 온몸을 전율케 하는 듯한

하느님의 음성이 들렸다.

"아브라함!"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순간

예민한 영적 감각을 지닌 그는

자신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실 지 직감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이 ’이사악’과 관련될 것임을 예감하고는

그는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도 그 메시지가

그토록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을 것이다.

기껏 "아브라함아,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이사악과 내 가운데 너는 누구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한 그에게 그 말씀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그날밤 천막 안으로 되돌아온 아브라함에게 있어

새벽별까지의 시간은 참으로

아브라함적 겟세마니였을 것이다.

그는 즉시 자기의 그릇된 신앙을 깨닫고는

회한과 번뇌의 고통 속에 피눈물을 온몸으로 흘리며

하느님께 빌며 두드려 보지만,

그럴 때 하느님은 오히려 짐짓 벽인 양 하신다.

왜냐면 평소엔 마치 친구처럼 사소한 것까지도 말씀하시던

그분이 그런 중대한 때에 가만히 계실리 만무하지만

그 때는 그렇게 되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다!

 

그러한 하느님의 의도적인 무응답(無應答=침묵)속에

참된 신앙인은 더 깊은 응답을 얻는다.

뿌리 깊은 믿음의 소유자 아브라함은

동틀 무렵 순명의 각오로

"야훼께서 주셨으니 야훼께서 가져가시리라"(욥기 1, 21)

하며 털고 일어난다.

 

무엇보다 그는 ’뜻에 대한 반항’의 부질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럴 때엔 순종만이 상책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 털고 일어남은

다름 아닌 이사악이라는 우상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다.

 

이제 아브라함은 자기 생애 가운데에서

가장 크게 ’다시 태어남’을 겪는다.

 

그의 앞에는 이제 오직 하느님밖엔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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