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탈출기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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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10,758 | 추천수0 | |
파일첨부 탈출기입문.hwp [2,468] | ||||
탈출기(출애굽기) 입문
1. 책의 이름
오경 입문에서 우리는 토라라고도 불리는 이 다섯 책이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이 책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오경 가운데 두 번째 책에 눈을 돌릴 때, 먼저 부딪치는 문제가 책 제목이다. 우리 나라에서 ‘출애굽기’로 불리는 이 책은, 히브리말에서는 고대 근동의 전통 방식에 따라 그 첫 말마디인 “그리고 이것들은 이름들”, 또는 이를 줄여서 “이름들”로 불린다(우리말에서는 첫 문장의 끝에 “…… 이름은 이러하다.”로 옮겨진다). 반면에 히브리말 성서를 그리스말로 옮긴 에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 번역자들은 이 책의 내용에 따라 ‘나감, 탈출’을 뜻하는 ‘엑소도스(Exodo?’를 제목으로 붙였다. 이것이 라틴말에서 Exodus로 음역되었으며, 현대 서양 언어들에서도 이 낱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자말로, Exodus에 해당하는 ‘출(出)’과 에집트에 해당하는 한자 ‘애굽(埃及)’에, 일의 내력을 기록한 문서를 뜻하는 ‘기(記)’를 덧붙여 이 책의 이름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자식 명칭은 이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을 맨 앞에 세우는 것은 명백히 중국식 어법이다. ‘애굽’ 또한 문제를 안고 있다. 에집트에 해당하는 한자말은 ‘애급(埃及)’인데(국어사전과 선종완 신부 번역본 참조), 우리는 현재 이 나라 이름을 ‘애굽’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를 우리말 어법에 맞게 고친다면 ‘에집트 탈출기’가 될 것이다(생명의 말씀사 판「현대인의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그러나 Exodus는 과거에 한 번 이루어진 에집트 탈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미 구약성서 시대에 제2이사야는 하느님의 백성이 바빌론에서 귀향하는 것을 ‘제2의 Exodus’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영성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여정은 완전한 해방을 향한 Exodus라 말할 수 있다(아래 4 참조). 이러한 경우들을 보더라도 계속 ‘출애굽’과 ‘출애굽기’라는 개념과 제목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일정한 환경이나 구속에서 빠져 나감’을 뜻하는 일반적인 개념인 ‘탈출’을 쓰는 것이 더 마땅하다고 여겨지므로, 우리는 Exodo?Exodus라는 말의 본뜻과 이 낱말을 제목으로 선택한 이들의 원의도를 살려 ‘탈출기’라 부르기로 한다.
2. 에집트 탈출의 의미
탈출기는 흔히 ‘구약성서의 복음서’로 일컬어진다. 사실 이 책은 하나의 복음서처럼, 하느님께서 한 무리의 사람들의 실존에 개입하셔서(4,31) 그들을 자유 속에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그들을 당신께서 마련하신 나라로 불러모으신다는 기본적인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
탈출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에집트 탈출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1) 하느님의 백성을 탄생시킨 사건
이스라엘인들은 에집트 탈출을 자기들의 일반 역사와는 달리 특별한 것으로, 역사의 여느 사건들과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여겨왔다. 실제로 이 탈출은 이스라엘을 창조한 사건으로서,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삶 전체가 그것에 종속되고, 많은 제도와 종교 의식과 신앙 조목들이 그것에 의거하여 만들어진다. 이스라엘이 지녔던 큰 민족적 희망들도 마찬가지로 이 사건과 관련된다. 또한 에집트 탈출에 대한 회상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 다른 사건들을 지배할 정도로 결정적인 것이었다. 곧,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점차 열두 지파의 통일성에 대한 의식을 갖추게 된 일(여호 24장), 왕국을 설립하고 다윗의 통치 아래 팔레스티나 국가를 형성한 일, 그리고 더 나아가서, 유배와 이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이 여러 땅에 흩어진 공동체로 변화한 일 등이다. 이러한 일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무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에집트 탈출, 그리고 그것에 이은 광야생활에 비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신학적, 역사적 사고가 바로 이 ‘탈출’로써 조명되었다. 사실 그 시기는 하느님께서 당신 것으로 받아들이신 한 민족의 초년기에 해당한다(호세 11,1-4; 신명 8,11-16). 물론 이 민족은 이미 그때 처음으로 자기들의 하느님께 반항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14-17장).
아울러 구약성서에 나오는 어떤 제도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할 때 에집트 탈출 사건은 흔히 그 준거점이 된다. 그래서 파스카(12,26), 무교절(13,6-8과 12,39), 또는 맏아들과 맏물의 봉헌 의무(13,14-15)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느냐는 질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관습이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에집트를 나올 때 일어난 일을 회상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본보기를 들자면, 이방인들을 존중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이스라엘인들이 에집트에서 살면서 이방인의 삶이 어떠한지를 직접 겪은 그 체험에 바탕을 둔다(22,20; 23,9).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한 민족의 제도, 종교 의식과 법에 정신을 불어넣는 작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 사건은, 한마디로, 이스라엘 민족을 탄생시킨 일이었다.
(2)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만남의 사건
이스라엘을 탄생시킨 에집트 탈출 사건은 또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을 만나는 일에서 특권적인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의 관계를 환상적으로 그린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특히 현대의 독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에집트 땅에 내린 ‘재앙들’이나 ‘바다 횡단’ 같은) 기적들만을, 또 하느님의 일방적인 개입과 이스라엘의 무조건적인 수용만을 열거하는 것도 아니다.
주의 깊게 읽을 때, 이 책은 일련의 근본적인 물음들과, 더 나아가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을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4,1; 6,9; 14,31)?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17,7)? 그분의 이름은 무엇인가(3,13-15)? 사람이 그분을 뵐 수 있는가(33,18-23)? 모세는 왜 우리를 이렇게 위험하고 치명적인 모험 속으로 끌어들였는가(14,11; 16,3; 17,3; 32,1)?
이 책은 이러한 의문과 물음에 이스라엘의 신앙을 근거로 한 대답을 준다. 여러 세기 동안 그리고 탈출기의 최종 작업 때까지(오경 입문 참조) 이 신앙은 끊임없이 성숙하였다. 당신의 백성에게 홀로 경배를 받으셔야 하는 하느님, 곧 계약의 하느님을 모세가 알려준 그날 이후, 이스라엘은 민족적 생존의 첫 사건, 구체적으로는 이 탈출, 그리고 이 계약을 오랫동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역사 속으로 개입하셨음을 깨닫게 된다(13,9.16에 나오는 짧은 ‘신앙고백’ 참조). 그리고 에집트에서 백성을 이끌어내시고 그 행렬을 인도하신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그분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주님, 곧 모세와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사람들에게 일깨우신 희망에 충실하신 분으로서, 노예가 되어버린 불행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분이시다(2,23-25).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자유롭게 하시고 결국 모든 장애를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7-11장). 그리고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한데 모으고자 하시는 분으로서 그들에게 계약을 세우고 그 계약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시다(19-24장). 또한 그분께서는 죄를 저지르는 백성에게 당신의 인내와 자비를 드러내시는 분이시다(32-34장). 끝으로 그분께서는 예언자 모세의 중개를 통하여(33,7-11; 34,29-35), 그리고 합법적인 성소에서 사제 아론이 거행하는 전례를 통해서 당신 백성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시다(25,8; 40,34-35).
(3) 오늘도 계속되는 사건
이렇게 에집트 탈출은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있는 현실이 된다. 시편 114와 여호 4,22-24는 이스라엘인들이 모세와 함께 바다를 건넌 일, 그리고 여호수아와 함께 요르단을 건넌 일을 하나로 결합하여 한 축제로 경축한다. 시편 81은 “축제날” 한데 모인 공동체에게 에집트 탈출 사건 당시에 울려 퍼진 목소리를 자기들의 선조들보다 더 귀여겨들으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시편 95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 목소리가 “오늘”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사실 시편 111,4에 따르면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34,6 참조) 당신의 기적들을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원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전례 축제를 통해서(파스카를 하나의 “기념”으로 말하는 12,14 참조) 파스카의 구원에 온전히 참여하고, 시나이에서 체결된 계약에 계속 동참하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례는 주기적으로 에집트 탈출 사건들을 다시 체험하도록 해주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근간을 뒤흔드는 큰 위기의 때에 하느님의 백성은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그 한 본보기로서 아합 임금이 북부 왕국을 다스릴 때 백성을 자칫 배교로 이끌 뻔한 사건으로, 가나안인들이 일으킨 위기의 때에, 엘리야가 이스라엘 신앙의 원천인 호렙산으로 갔던 순례를 들 수 있다(1열왕 19). 마찬가지로 바빌론 유배 시대에 “새계약”을 선포한 예레미야와(예레 31,31-34) 에제키엘(에제 16,59-63; 37,20-28) 다음에 나타난 제2이사야는 ‘새로운 탈출’의 시간이 왔다고 선포한다(이사 43,16-21). 이 예언자는 유배의 땅에서 기적적으로 이루어지는 해방에(이사 48,20-22; 49), 더욱 기적적인 방식으로 죄에서의 해방이 더불어 이루어지리라 선포하며(이사 40,2; 44,21-22), 이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으로서 만민을 구원할 능력을 지니신 분께 돌아오라고 모든 민족을 향하여 호소한다(이사 45,4-25).
그러므로 우리가 탈출기를 이해하려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책의 본문을 점진적으로 작업해 나갈 때, 그들이 자기들의 신앙에 이끌렸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후대의 유다인들은 파스카 예식을 거행하면서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직접 에집트에서 탈출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13,8과 각주 참조).
(4) 영원한 해방의 전망을 연 사건
여정 가운데 있는 백성의 책으로서 탈출기는 완결된 책이 아니다. 예전 사람들의 역사 속에 이루어진 구원 개입에 대한 증언으로서 이 책은 계속해서 더욱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자유에 대한 희망을 함양시킨다.
이러한 전망에서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이스라엘이 수행한 에집트 탈출의 완성으로 여겼다. 한편, 그리스도교 시대가 시작될 무렵 유다교에서 (예컨대 지혜서와 타르굼에서) 재 해석되기도 한 탈출기의 언어는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체험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그분의 ‘파스카’로 이해되었다(루가 22,14-20; 요한 13,1-3; 19,36). 다른 본문들은(요한 6; 1고린 5,7; 10,2-4) 세례와 성찬을 이야기하려고 만나, 구름, 바다 횡단, 바위에서 터져 나오는 물, 누룩 없는 빵 등의 낱말들을 사용한다. 요한 묵시록은 그리스도를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경축한다(묵시 5,6). 같은 책에서, “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들은 에집트에 내린 재앙들을 되풀이하는 것이다(묵시 15,5 16,21). 그리고 그 “짐승”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함께하는 이들은 다시 “모세의 노래”를 부른다(묵시 15,3). 끝으로 새 세상의 출현을 서술하려고 바다가 없어짐을 이야기한다(묵시 21,1). 탈출기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의 이 모든 주제들은 교부들에 의해, 특히 그들의 부활 강론과 교리 교수, 그리고 이보다는 덜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그들의 주석서들에서 많이 활용된다.
이 모든 것은 또한 어떻게 하여 탈출기의 주제들이 그리스도교 전례에 여기저기 들어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여기에서 이것들을 하나하나 대조하여 확인할 수는 없고, 다만 비잔틴 전례와 로마 전례에서 부활 성야 축제 때, 바다 횡단의 구절을 봉독하는 것과 “모세의 노래”를 부르는 것(출애 14 - 15. 이 노래에 다음과 같은 기도가 이어진다: “그 옛날 행하신 기적을 오늘도 빛내시는 천주여, 당신 전능으로 한 백성을 에집트 사람들의 박해에서 구원하셨음같이 재생의 물로 이교 백성들도 구원하시니, 세상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 이스라엘의 특전을 누리게 하소서.”), 또 경신례와 교회 교리 교수에서 십계명이 차지하는 비중만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3. 탈출기의 역사적 배경
탈출기가 이스라엘의 신앙을 표현하려고 쓰여졌다는 말은, 이 책이 허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성서 전통의 자료들과, 이제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알려진, 고대 근동 역사의 자료들을 비교하면서 역사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모세의 연대에 대해서 학자들은 기원전 15세기(에집트의 제18왕조, 특히 툿모시스 치하 때)와 13세기(제19왕조, 특히 세토스 1세, 람세스 2세 또는 메르넵타 치하 때) 사이를 오가곤 하였다. 그러나 제18왕조 때 에집트인들이 팔레스티나를 지배한 사실이 ‘야훼계’ 전승 안에 그 흔적을 남겼을 것이라는 점에 유의하면서,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이른바 ‘짧은’(곧, 13세기에 탈출이 이루어졌다는) 연대기를 채택한다. 그때 그 지역의 정치적인 상황들을 고려하면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에집트 탈출의 사실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16세기, 에집트의 신왕국은 150년 전 아시아에서 침입한 힉소스족을 내쫓는다. 특히 15세기에 툿모시스 3세가 등장하면서 에집트는 가나안 땅을 더욱 굳건히 지배한다. 그러나 14세기는 (아멘호텝 4세 또는 툿안크아몬 때의) 이른바 ‘엘-아마르나’로 불리는 종교의 위기를 겪어야 했던 에집트의 약화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때 가나안의 봉신들은 증대하는 히타이트인들의 위력, 그리고 고대 문헌들에서 ‘하비루/하피루’라 불리는 거친 유랑민들이 일으키는 소요로 위협을 받게 된다(‘하비루/하피루’라는 낱말이 이방 난민이나 유랑민 집단과 같은 사회적 신분을 뜻하는지, 아니면 한 민족을 가리키는지, 그리고 ‘하비루/하피루’와 ‘히브리’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 학자들은 아직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을 호전시키려고 장군 하나가 (13세기에) 제19왕조를 세워 수도를 나일강 삼각주로 옮기고 지중해변을 요새로 만든다. 그리고 람세스 2세에 와서는 히타이트 왕국과 맞서게 된다. 이때 이 삼각주에 살면서 에집트 정부에 일정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던 셈족 계통의 인력을 에집트인들이 끌어다 쓴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다른 셈족 사람들처럼 파라오의 대아시아 정책을 수행하려고 교육을 받았을) 모세는 성공리에 자기의 종족을 광야로 이끌어내어 그들의 종교생활을 정비하였다. 그들은 무엇보다 “요셉 집안”(에브라임과 므나쎄 지파)과 레위 집안에 속한 사람들로서, 모세는 이들이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한 큰일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가나안에서 다른 지파들이 그들과, 그리고 ‘당신 백성을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내신 하느님’과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한 유랑민을 당신의 “소유”, “사제들의 왕국”, “거룩한 민족”으로 만드시겠다는 뜻을 그들에게 밝히시며 개입하신, 당시의 인간적-역사적인 틀이다(19,5-6). 결국, 주님의 계약 안에 모든 인간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거기에서부터이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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