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레위기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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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6,985 | 추천수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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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입문
1. 레위기의 위치와 역할
탈출기는 만남의 천막이 준공되는 것에(40,16-33) 이어 곧바로, 주님께서 구름 속에 내려오심으로써 그곳을 당신의 거처로 받아들이신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40,34-8).
“주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다음, 만남의 천막에서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레위기의1) 첫 말마디(1,1) 역시 주님께서 이곳을 당신의 성소(聖所)로 받아들이셨음을 나름대로 드러낸다. 탈출기에서는 주님께서 시나이산 위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반면에, 이제는 만남의 천막에서 모세와 만나 말씀하시는 것이다(1,1).2)
모두 27개의 장으로 되어있는 이 책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규칙들과 법규들을” 내리신다. 이스라엘인들이 이것들을 실천함으로써 살도록 하시려는 것이다(18,5). 결국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이 “천막”을 잘 이용하여, 그것이 당신과의 진정한 “만남”의 장소가 될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종교의식에 관한 실수나(1-10장) 육체적인 부정(11-16장), 또는 도덕적인 불충이(17-26장)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 생명의 통교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3) 그러므로 모든 경우가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되는 것이다.
레위기는 이스라엘의 경신례 전체가 아니라 몇몇 부분만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경신례 때 바쳐진 기도와 노래는 시편집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예언자들과(예레 7,3?1; 호세 6,6 등등) 현자들은(집회 34,18-35,10 등) 이스라엘인들에게 종교의식의 다른 면, 곧 그 상대성을 역설한다. 그들은 예식의 거행 자체만으로는 구원을 가져오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가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신도들의 의식 속에 심어주고자 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예식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통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진리라는 점이다.
2. 레위기의 저작 시기와 내용
레위기에는 때때로 아주 오래되고 서로 다른 여러 근원에서 유래하는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일관성있게 모여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 책에서 보고 있는 것은 유배 이후에 이루어진 편집 작업의 결과이다. 예언 현상은 사라져가고 왕정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사제직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증가하던 시대에, 예루살렘의 사제들은 제2성전의 필요성에 따라 여러 법과 예식서들을 수집하고 보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단락에는(1-7장), 특정한 경우에 이스라엘인들이 드릴 수 있는 또는 드려야 하는 제사의 여러 범주가 소개된다. 그러나 이것은 문외한이나 초보자들을 위한 입문서가 아니라, 이미 사제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일종의 참고 도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편찬한 예식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여러 제사와 의식의 기원이라든가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여기저기 내포되어 있는 뜻을 가려내고 이것저것을 비교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들에서 제사의 원칙을 빌려왔고, 그러면서도 그 예식의 틀을 자기들의 세계관,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의식에 따라 새로운 내용으로 채웠음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둘째 단락에는(8-10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사제직에 임직될 때 거행되는 의식이 서술된다. 이 의식은 결국 탈출 29장에서 주님께서 모세에게 내리신 지시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래서 이 단락 세 장이 본디는 탈출기에 곧바로 이어지는 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특히 이 단락에서는 사제들이 수행하는 중개의 기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성성(聖性)이 요구된다. 그들이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에서 중개자로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단락에는(11-16장), 사람이 하느님과 접촉할 수 없도록 하는 부정(不淨), 구체적으로는 성소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부정(不淨)의 여러 가지 범주들이 열거된다. 곧, 부정한 음식의 섭취, 해산에 따른 여인의 부정, 나병을 비롯한 악성 피부병, 남자나 여자의 성과 관련된 부정 등이다. 16장은 레위기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구약성서의 성금요일’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속죄일(히브리말로 욤-키푸르)”의 장엄한 전례가 서술된다.
넷째 단락에는(17-26장), 일반적으로 ‘성결법(聖潔法)’이라 불리는 규정들이 나온다. 주님께서는 살아계시고 거룩하신(히브리말로 “카도쉬”) 하느님이시기 때문에(11,44-5; 19,2; 20,26),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그분의 소유로 성별된(히브리말로 “카도쉬.” 11,44-5; 19,2; 20,7.26; 21,6-8) 백성은 그분과의 통교를 수월케 하는 모든 방도를 찾아야 하고, 또 물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이 생명의 통교에 지장을 주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하는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는 피를 먹지 말아야 하고, 모든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거부하며, 하느님을 유일하신 하느님으로서 공경하고, 인간을 그러한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존중하며, 사제직과 제사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축일과 성년(聖年) 곧 안식년과 희년을 성실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
레위기 전체의 부록이라 할 수 있는 27장은 하느님께 사람이나 물건을 바치겠다고 서원하고, 돈으로 봉헌하거나 또는 그 서원을 무를 때 서원자가 내야 하는 값을 제시한다.
3. 레위기에 나오는 주요 개념들
문체가 때때로 매우 단조롭고 건조한 레위기는 봉독하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다 적지 않은 수의 전문 용어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그 의미를 아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 동시에 히브리적 사고방식의 몇몇 특성과 이스라엘 민족의 제도에 대해서도 먼저 알아두어야 하겠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사제들을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사제들의 모습으로 그려서는 안된다. 명칭이 같다고 해서 이 두 실체가 동일하지는 않다.
이러한 레위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전식으로 몇 가지 주요 개념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 이것 역시 레위기 전체의 구분에 따라 제사, 사제직, 정결과 부정, 성성의 순서를 따라가고, 첫째 부분에 나오는 제사의 전문 용어들은 가나다순으로 배열한다.
(1) 제사와 제물
거의 모든 종교에서 제사는 신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이루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래서 종교사에서는 근본적으로 세 가지 관점에서 제사에 관한 연구가 진행된다. 첫째는 신에게 바치는 ‘예물’로서의 제사이고, 둘째는 신과의 ‘통교’를 이루는 방도로서의 제사이며, 끝으로, ‘속죄(贖罪)’와 신이 베푸는 용서를 목표로 하는 제사이다. 이스라엘의 제사들은 매우 쉽게 이 세 범주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번제물과 곡식제물과 맏물 봉헌은 ‘예물’, 친교제물은 ‘통교’, 그리고 속죄제물과 보상제물은 ‘속죄’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사정이 바뀌면서 이와 관련된 변화가 나타난다. 곧, 예루살렘의 파괴와 유배라는 엄청난 종교적, 민족적, 정치적 재앙에 대한 숙고를 거듭하면서, 이스라엘은 죄악의 힘과 용서의 필요성에 대하여 더욱 생생한 의식을 지니게 된다. 레위기가 피를 통한 사죄(赦罪)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곡식제물을 희생제물의 보조물로 그 의미를 축소시키면서, 희생제사가 지니는 화해의 구실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 가장 거룩한 것. ‘거룩한 것들의 거룩한 것’이라 직역할 수 있는 히브리말 “코데쉬 코다쉼”은 흔히, “지성소”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1열왕 6,16) 성소(또는 만남의 천막이나 성전) 안쪽을 특별히 가리키는 장소적인 뜻을 지녔는데, 레위기의 편집자는 이 표현을 하느님께 봉헌되어 어떤 세속적 용도로도 쓰일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 데에만 사용한다. 곧, 이 편집자에게 “가장 거룩한 것”은 근본적으로 사제들의 몫으로만 유보되는 속죄제물과 곡식제물의 일부분만을 뜻한다.
나. 거룩한 것.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코데쉬”는 사람, 장소, 시간, 물건, 제물, 자세 등 여러 가지를 가리키거나 특징짓는다. 아래 ‘(4) 성성(聖性)’ 참조.
다. 곡식제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민하”는 본디 ‘예물’과 ‘통교’의 범주에 속하는 제물 전체를 가리켰다(창세 4,3-5; 1사무 2,17). 그러다 후대에 와서는 동물을 잡아서 바치는 것 이외의 제물을 뜻하게 된다.
라. 기념제물. 곡식제물 가운데에서, 제단 위에서 (향과 함께 또는 향 없이) 불에 태워 바치는 분을 가리킨다. 이 말의 뜻과 이 제물의 목적에 대해서는 2,2 각주 참조. +
마. 번제물(燔祭物).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올라”는 본디 ‘(제단 위에서, 또는 연기로 하느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제사는 사실상 가죽을 뺀(7,8 참조) 짐승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에 살라 바치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굽다, 사르다’를 뜻하는 ‘번(燔)’자를 붙여 이름지었다. 이렇게 거의 통째로 하느님께 바치기 때문에 이 번제물은 ‘예물’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제사는 고대 그리스, 그리고 기원전 2000년대 중엽까지 팔레스티나 북부지방에 존재했던 우가릿 왕국에서 바쳐졌지만, 다른 셈족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바. 보상제물(아래 ‘속죄제물’ 참조). 유배 이후에 세워진 제2성전 시대에 거행된 속죄제사와 보상제사는 둘 다 의식은 같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곧, 보상제사에는 저질러진 잘못에 대한 보상으로, 본디 값어치의 오분의 일을 더한 값이 바쳐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제사는 속죄제사보다는 더욱 특수하고 개인적인 경우에 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보상제사는 이스라엘인들이 지냈던 대축제 때에는 드리지 않았다. 어쨌든 이 두 제사 또는 제물은 이스라엘의 독창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라엘 주변의 민족들이나 동시대의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의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사. 속죄제물. 속죄제사를 보상제사와 실제적으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위 ‘보상제물’ 참조). 본디는 서로 다른 두 제사였다가 점차 혼합되었는지, 아니면 이름은 두 가지로 불리었지만 실제 제물 자체는 하나였다가 최종 단계의 편집자들이 이 둘을 인위적으로 두 개의 제물 또는 제사로 갈라놓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속죄제사의 제물은 범죄의 정도나 그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 이 제사에서는 피가 가장 큰 구실을 하는데, 그것은 피가 죄의 사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굳기름은 친교제물에서처럼 제단 위에서 불에 태운다. 제물의 살코기는 일반적으로 사제들의 몫이 되지만, 범죄자가 사제이거나 백성 전체일 경우에는 예외이다. 속죄를 받으려고 희생제물을 바치면서 동시에 그 제사의 혜택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제물로써 고의적인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을 수는 없다. 오직 실수로 지은 죄나(4,2 각주 참조) 부정한 상태로 말미암아 짓게 된 죄 때문에(14,19 참조) 훼손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아. 예물(위 ‘곡식제물’ 참조). 히브리말로는 “코르반”이라 하는 이 명칭은, ‘사제계 법전’에서는 모든 종류의 제물, 그리고 제사 외의 방식으로 바치는 것까지 가리킨다(민수 7장 참조). “코르반”은 말 그대로는 하느님께(또는 제단에) ‘가까이 가져가는 것’을 뜻하지만, 점차 ‘봉헌된 예물’ 또는 ‘봉헌된 물건’까지도 뜻하게 된다. 마르 7,11에서 “코르반”이 바로 이러한 뜻으로 사용된다.
자. 친교제물. 제물의 굳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 하느님께 바치고, 살코기 일부는 사제들의 몫이 되며, 나머지는 봉헌한 사람과 그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초청된 이들이 성소에서 일정 기간 안에 함께 먹는 제물이다. 이를 ‘화목제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제사는 다른 제사들과는 달리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벌이는 잔치의 성격을 지닌다. 레위기에서는 예식 자체보다는, 봉헌자가 어떤 의향으로 제물을 바치는지에 따라 제물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종류가 있었을 수도 있다). 곧, 감사 또는 찬미의 제물(7,12-15), 서원제물(7,16), 그리고 자원제물이다(7,16). 친교제물은 번제물처럼 우가릿과 고대 그리스에서는 볼 수 있지만, 다른 셈족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차. 향. 만남의 천막과 성전의 지성소 안에는 분향제단이 놓여있었는데(4,7) 그 위에 특별히 만들어진 향을 피웠다(탈출 30,34와 각주 참조). 이 낱말과 같은 어근에서 파생한 것으로 레위기에서 자주 쓰이는 동사가 있는데(‘불에 살라 연기로 바치다’), 이는 번제 제단 위에서 희생제물을 사르는 것을 뜻한다. 이런 낱말의 사용은 하느님께서 ‘향기로운 연기’로 당신께 봉헌되는 제물을 매우 즐거이 받으신다고 여긴 고대인들의 생각을 반영한다.
카. 향기. 이 낱말은 화제물(火祭物)과(아래 ‘화제물’ 참조) 밀접히 병행하여 쓰이는데, 불에 태워진 제물이 향기로운 연기로 하느님께 올라가서, 그분의 노여움을 풀어드림을 말한다(코를 분노의 자리로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의인화가 가능하였다). 이 표현은 본디 바빌론의 대홍수 이야기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이 제물을 바치는 장면에서 쓰인 아카드말 표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창세 8,21과 각주 참조). 이는 호의적인 신과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봉헌자의 갈망을 드러낸다.
타. 화제물(火祭物). 히브리말로 “이쉐”라 불리는 이 말은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 하느님께 바치는 모든 것을 뜻하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넓게는 이런 식으로 거행되는 제사에서 바치는 제물 모두를 가리키기도 한다(이에 반해 번제물은 짐승만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속죄를 위한 제사에서 불에 태워 바쳐진 부분들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이 낱말이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말의 어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히브리말에서는 그 자음과 모음이 ‘불(히브리말로는 에쉬)’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화제’로 번역함이 옳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본들 가운데에서는「개역 한글판 성경전서」와 「현대인의 성경」에서만 이 명칭을 채택하고(몇몇 우리말 사전에도 올라가 있다),「공동번역 성서」를 비롯한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살라 바치는 제사(제물, 것)’ 등으로 내용을 풀어 옮기고 있다. 물론 듣기에 따라서는 이 ‘화제(火祭)’를 다른 말과 혼동할 염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번제’처럼 구약성서의 제물과 제사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2) 사제직
레위기에 나타나는 사제직의 모습은 여러 세기에 걸쳐 발전한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영향 등 다양한 영향들의 결과이다.
처음에는 의식을 거행하고 하느님 뜻을 전달함으로써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중개하는 사제들의 구실이 어떤 특정 전문 계급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가문의 우두머리로서 직접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창세 8,20; 15,9-0; 22,1-4).
그러다 (예컨대 1사무 1-3의 실로, 판관 18,19-0.27-1의 단과 같이) 경신례가 거행되는 곳을 중심으로 성소의 종교예식을 집전하고 전통과 의식을 보존하는 사제 가문이 태어나게 된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사독이라는 사제 가문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가문은 이스라엘 선조 시대의 임금이며 사제였던 멜기세덱과(창세 14,17-20) 관련을 가졌을 수도 있다. 예루살렘이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중요성을 더해 가면서 다른 성소들의 많은 사제들이 그곳으로 모여들게 된다. 기원전 620년대에는 유다 왕국의 요시야 임금이 이스라엘의 경신례를 예루살렘으로 통합시키기로 결정하자, 지방에 남아있던 사제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렇게 여러 부류의 사제들이 모여들자, 이미 자리를 잡은 이들과 새로 온 이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2열왕 23,8-9).
이미 솔로몬이 통치하던 시절, 그 기원이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은 두 사제 가문, 곧 에비아달과 사독 가문 사이에 주도권 싸움이 일어난다. 이 대결은 사독 가문이 예루살렘 사제직의 경쟁자들을 거의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으로 우선은 결말이 난다(1열왕 2,26-27). 그러다 유배시대에, 레위 지파에 속하는 아론이 첫 대사제이며 모든 사제직의 출발점으로 제시되고, 위 두 가문을 이러한 아론과 관련지음으로써 이들 사이의 갈등은 모두 끝나게 된다(1역대 24,1-6).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뒤(기원전 538년) 유다인들은 독립 왕국을 복구하지 못한다. 독립 국가의 정치 체제와 더불어 정치 지도자들이 사라짐으로써 백성의 운명은 이제 종교 지도자들 곧 성직자들의 손에 달리게 된다. 이와 함께 ‘대사제’로 불리는 사람이 점점 임금과 같은 구실을 하게 된다. 그는 왕관과 비슷한 것을 쓰고(8,9), 유배 이전의 임금처럼 기름부음을 받는다(8,12). 그러다 아리스토불 1세(기원전 104-03년) 때부터는 그때까지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던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사제가 결국 임금의 칭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사제직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발전을 거쳐오면서 변하지 않고 남은 것, 곧 중개자라는 사제의 특성이다. 사제는 축성을 받아 거룩함의 영역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권한을 지닌 중개자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정결과 부정
부정(不淨)의 개념은, 종교 역사가들이 서로 매우 다른 민족들에게서도 발견해 내는 ‘터부’ 또는 ‘금기’라는 개념과 상당히 비슷하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안정된 규칙들로 둘러싸이고, 미지의 것이나 알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공포로부터 보호받는 삶을 영위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사람들은 온갖 예외적인 것이거나 비정상적인 것이거나 비관습적인 것, 그리고 모든 변화와 변천은 하나의 위협 또는 전염성을 지닌 부정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인간은 일정한 간격을 둠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거나, 또는 자기 몸을 정결케 함으로써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부정은 어떤 범법행위가 아니다. 사실 출산이라든가 죽은 이를 염습하는 것과 같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행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의무가 당사자에게는 필연적으로 부정의 상태를 가져온다. 이러한 상태는, 경신례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자신을 정결케 함으로써 그 부정을 벗어야 하는 것이다. 부정하면서도 정결의 상태에 있는 양 행동할 때, 비로소 범법행위가 성립된다(레위 15,31).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죄를 특징지으면서 이 부정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는데, 여기에서는 본 의미의 도덕을 거스르는 행동, 곧 죄까지도 포함된다(에제 22,7 참조). 사실 죄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훼손시키는 가장 큰 부정인 것이다.
그런데 레위 11-15장에 나오는 금령들이 이처럼 법으로 편찬되었다는 사실은 이 계명들이 더 이상 자발적으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레위기는 이것들을 계약의 하느님, 곧 생명의 주님과 관련짓는다(11,44-45). 바로 이분을 위하여 사람은 자기의 정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이러한 금령들의 가치에 대한 여러 가지 논쟁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마르 7,1-3; 사도 10; 1고린 6,12-20).
(4) 성성(聖性)
성성 또는 거룩함은 레위기만이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개념은 바로 앞에서 말한 정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성은 근본적으로 초월적이신 하느님, 절대적으로 다르신 분, 비교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으며 표현할 수 없으신 분, 인간으로서는 다다를 수 없이 완전히 타자(他者)이신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신비를 가리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도덕적인 본질을 규정하기보다는, 그분께서 인간이 알고 있거나 상상하는 모든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신 분이심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초월적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께 접근하도록 허락하신다(23장). 이것이 그분 성성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인간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게 해주시고 당신의 뜻을 알려주신다(19장). 그분께서는 당신의 성성을 떨치시면서, 동시에 인간이 당신의 그 성성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19,2).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면서 이 민족이 다른 민족들과는 다르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거룩하신 당신과 통교를 이룰 수 있도록, 이스라엘을 따로 떼어놓으시고, 그들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하고 구분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이 선택은 이스라엘이 수행해야 하는 도덕적인 의무를 내포하고 있다. 이 의무는 선택된 백성이 지니게 된 성성의 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과 이루는 이 생명의 통교 안에 계속 머무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 성성은 이러한 통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에게도 하느님의 성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을 지속적으로 성화시키도록 인도해 준다.
그런데 성성 또는 거룩함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제외하고,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만이 아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표현하는 모든 사람들과 물건들이 또한 거룩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하느님의 영역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고, 그래서 정상적이지만 세속적인 행동을 삼가야 하는 사제들과 같은 사람들 역시 거룩하다(21-22장). 그리고 세속적인 일을 삼가야 하는 주님의 날, 곧 안식일과 같은 시간이나(탈출 20,80-11), 속된 것 또는 낯선 것이 들어와서는 안되는 성소와 같은 장소(히브 9,7-8; 사도 21,28), 그리고 다른 용도로는 쓸 수 없고 오직 축성의식에만 쓸 수 있는 성유와 같은 물건도 거룩하다(탈출 30,23-33).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성이라는 개념은 세 가지 근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모든 속된 것으로부터의 분리, 하느님과의 통교를 이루기 위한 축성,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한 봉사에 헌신함이다.
4. 레위기의 의의
레위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후대에 나타났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다른 책들에 현저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또한 이 책은 거의 이스라엘 제사의 ‘기술적인’ 면만을 서술하기 때문에, 신약성서에서도 그렇게 자주 인용되지는 않는다. 그 가운데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은 무엇보다도 성결법에(17-26장) 나오는 도덕적인 법규들이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19,18의 말씀을 신명 6,4-5에 나오는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사랑과 함께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제시하신다(마태 22,39; 마르 12,31; 루가 10,27; 로마 13,9; 갈라 5,14 참조). 그리고 예컨대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된다.”거나(19,17), 이방인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19,34) 계명은 이미 그리스도교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책의 영향을 인용 횟수에 의해서만 헤아릴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비록 간접적이라 할지라도 레위기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다. 사실 신약성서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그분의 희생제사에 대한 고찰의 배경에는, 레위기에 편찬된 규정들에 따라 수행된 예루살렘의 경신례가 있다. 레위기가 없었다면, 바오로 사도나 히브리서가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해석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많은 요소들이 결여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레위기는 오늘날 구약성서의 책들 가운데에서 가장 덜 읽혀지는 책일 수 있다. 사실 이 책은 가까이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때로는 신약 곧 새계약을 통해서 효력을 상실한 옛 관행들만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아직도 이런 ‘옛 것’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유한 예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웃 민족들에게서 종교적 몸짓을 취하거나 또는 새로운 몸짓을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자기들이 거행하는 경신례를 자기들이 고백하는 신앙과 일치시키도록 노력하였다. 경신례는 거룩한 하느님과 거룩한 백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화해와 통교를 표현하고 또한 실현시켜야 한다. 예언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바로 이 거룩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투쟁하였던 것이다. 축제와 의식과 몸짓은 사람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그 실행 방법에 따라 시대와 장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공동으로 거행하는 축제를 통하여 자기들이 고백하는 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원의와, 그때 사용되는 몸짓 언어는 그대로 존속한다. 예언자들이 잘못 거행되는 경신례에 혹독하게 비판을 가했다는 사실도, 유다교가 성전을 상실하였다는 것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지니는 유일하고 결정적인 가치를 인식한 그리스도교에서 더 이상 레위기에 서술된 의식을 거행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 책이 성서 안에서 차지하는 그 위치와 의의를 폐기시키지 않는다.
레위기가 경전의 일부를 이룸은, 종교적인 몸짓으로 자기의 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필요성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통교를 당신의 말씀 안에서 드러내시고, 또한 당신의 삶으로 실현시키시는 영원한 대사제,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히브 4,14 참조) 오심을 예고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 1) ‘레위기’라는 제목은 이 책이 근본적으로 사제들, 곧 “레위”라는 사제 지파의 구성원들과 관련된 것임을 드러낸다. 이 책 전체가 사제계 전승에 속한다. 오경 입문 참조.
2) 그러나 레위기의 몇몇 구절에도 주님께서 계속 시나이산 위에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있다(25,1; 26,46; 27,34).
3) 레위기에서는 경신례와 사제직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근본적인 중개를 한다. 구약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임금이나 예언자에게서 이 중개의 역할을 찾기도 한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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