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다니엘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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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5,014 | 추천수0 | |
파일첨부 다니엘입문.hwp [869] | ||||
다니엘 입문
다니엘서는 그 문학 유형상 구약성서에서 유일한 책이다. 히브리 말 성서에서 이 책은 ‘성문서’에 속하는데, 에스델서로 끝나는 ‘축제 오경’ 다음, 그리고 에즈라서 앞에 들어 있다. 이러한 위치만으로도 이 책이 후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리스 말 성서에서는 다니엘서가 예언서로 분류되어 에제키엘서 다음에 나온다.
1. 다니엘서의 구조
(1) 히브리 말 성서의 다니엘서
히브리 말 성서에서는 다니엘서가 두 가지 말로 쓰인 열두 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1에서 2,4?까지는 히브리 말, 2,4ㄴ에서 7,28까지는 아람 말, 그리고 8,1에서 12,13까지는 다시 히브리 말로 쓰여 있다.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은, 아람 말로 된 작품(2-7장)에 히브리 말로 쓰인 종결 부분(8-12장)과 입문 부분(1,1-2,4)이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 편집자가 자료를 다시 두 단락으로 편성하였다고 설명한다. 첫째 단락(1-6장)은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2장과 4-6장에서는 다니엘이, 3장에서는 그의 세 동료가 주인공이고, 1장에서는 이 네 인물이 함께 등장한다. 둘째 단락(7-12장)에는 다니엘이 혼자서 보는 환시들이 들어 있다. 이야기는 각각 연대순으로 배열된다. 그러나 이 연대는 문학적 발상으로서 이 작품의 저작 시기와는 무관하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자세히 알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관심 밖의 것으로 치부해서인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대 근동의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이야기도 서슴없이 전개시킨다. 이는 다니엘서가 역사서가 아님을 말해 준다. 그래서 이 책의 가치는 역사가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
(2) 그리스 말 성서의 다니엘서
그리스 말을 쓰던 유다인들은 초대 그리스도교에 두 개의 서로 다른 다니엘서 역본을 물려 주었다. 통상 칠십인역, 그리고 테오도시온이라 불리는 역본이다. 두 역본이 모두 히브리/아람 말 본문에 근본적으로는 서로 같은 부분들을 첨가한다. 3장에서는 이 이야기 틀에 맞춘 전례문, 곧 아자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찬미가를 삽입하고, 원래의 다니엘서 앞 또는 뒤에(13장 소제목의 각주 참조) 수산나 이야기를 배치하며, 끝으로 벨 신상과 큰 뱀의 일화를 덧붙인다. 그러나 히브리/아람 말 성서의 본문과 비교할 때, 이 두 역본은 서로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칠십인역은 특히 4-6장에서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칠십인역이 번역한 본문은 현재의 히브리/아람 말 본문과는 다른 셈족어(히브리 말 또는 아람 말) 원문이 아니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테오도시온은 이와는 반대로 현재의 히브리/아람 말 본문에 대단히 가까워, 이 히브리/아람 말 본문을 바로 측면에서 지원해 주는 상당히 오래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다니엘서의 인용은, 때로는 칠십인역, 때로는 (그리고 더 자주) 테오도시온에 따라 이루어진다. 3장의 초기 본문에 첨가된 전례문들은 본디 히브리 말로 쓰였을 것이다. 수산나의 이야기, 그리고 벨 신상과 큰 뱀의 일화도 마찬가지일 터인데, 그 원문은 하나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개의 교정본(또는, 본문 형태)이었을 수 있다.
기원후 90년경에 고정된 히브리 말 성서에는 이 첨가 부분들이 들어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교에서 이 책을 사용하는 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니엘서의 첫 주석가인 로마의 히폴리토가 보여 주듯, 먼저 출간된 칠십인역이 곧바로 테오도시온으로 대체되는가 하면, 히브리 말 성서에 들어 있지 않은 그리스 말 부분들의 권위가 특히 성 예로니모에 의해서 부정되기도 한다. 예로니모는 3장의 전례문들은 그 자리에 그냥 놓아 두지만, 수산나의 이야기(13장), 그리고 벨 신상과 큰 뱀의 일화(14장)는 부록으로 배치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부분들을 제2경전으로 인정하지만, 개신교에서는 그 경전성을 완전히 부인하여 외경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이 제2경전 부분을 대중라틴말성서의 순서에 따라, 본문의 글씨체는 경전 부분과 같게, 난외의 절 표기는 다르게(이탤릭체) 하여 옮긴다.
2. 다니엘서의 저작 시기와 자료의 출처
(1) 저작 시기
현재의 다니엘서는 바빌론 유배 시대(기원전 587-538년)에 활동하던 어떤 예언자의 작품으로 제시된다. 유다교 학자들과 초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바로 이러한 전망에서 이 책을 이해하였다. 그러다가 기원후 3세기부터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포르피리를 필두로 한) 이교도 비평가들이 이 책을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기원전 175-164년)에 쓰인 작품으로 간주한다. 사실 10-11장에 나오는 대환시들은 기원전 162년까지 이어지는 근동과 유다교 역사의 표지들을 하나 하나 벗겨 나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구절(11,40 이하)에서는, 마지막 심판과 죽은 이들의 부활로(12,1-4) 이어지는, 관용적 문체로 쓰인 희망의 메시지를 보게 된다. 이 메시지가 바로 당시의 유다교가 직면한 영성적 문제들에 잘 들어맞는다. 이로써 기원전 190-180년에 쓰인 집회서의 이스라엘 예언자 명단(집회 48,22; 49,7-8.10)에 다니엘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된다. 반면에, 기원전 134년과 기원전 104년 사이에 저술된 마카베오 상권의 저자는 이미 다니엘서를 알고 있었다(1마카 1,54 = 다니 9,27과 11,37). 그리고 칠십인역의 다니엘서는 기원전 145-140년경의 로마 신탁집에서도 이용된다. 더 나아가서 다니엘서의 저자는 기원전 167년 12월 7일에 벌어진 성전의 유린(11,31 참조), 경건한 유다인들의 학살(11,33), 그리고 (11,34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마카베오 형제들의 궐기와 유다 마카베오의 첫 승리를 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기원전 164년 가을에 박해자-임금이 죽은 것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같은 해 12월 14일에 성전을 정화한 일만 암시할 뿐이다. 이로써 이 책 전체가 저술된 해를 기원전 164년으로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의 수수께끼 같은 절 하나가(12,12. 그리고 12,9 참조), 정화된 성전의 전례가 복구된 직후에 다니엘서가 출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게 한다. 이 때는 기원전 163년 초가 된다.
다니엘서의 많은 세부 사항이 동시대의 사건들을 가리킨다. 곧 음식과 관련된 율법의 금령들을 유다인들이 파기하도록 만드는 이교도 통치자들의 압력(1,5-8. 그리고 2마카 6,18-31 참조), 유다인들을 순교의 위기로까지 몰아넣는(3,19-21; 6,17-18) 우상 숭배와(3,1-12) 신격화한 군주 공경의 강요(6,6-10), 박해자의 죽음에 관한 예언적 예고(5,22-30; 7,11.24-26; 8,25; 9,26-27; 11,45) 등이다. 저자가 마카베오 형제들의 군사적 봉기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11,34), 현재의 상황을 뒤집으시는, 그리고 당신의 통치를 확립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에 기대를 걸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세는 유다 마카베오와 합류하기 전에 광야로 들어간 경건한 유다인들, 곧 ‘하시드인들’의 자세와 일치한다(1마카 2,28-38.42-43 참조). 다니엘서의 저자는 필시 이러한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2) 다니엘서 전통의 출처
이렇게 이루어진 다니엘서에는 적지 않은 기존의 전통들도 모여 있는데, 그 가운데 몇몇은 이미 기록된 형태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을 것이다. 2장은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2세(기원전 252년경) 또는 안티오쿠스 3세가(기원전 194년 이후) 실행한 혼인 정책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2,43 참조). 7장에서, 그리스 제국을 나타내는 네 번째 짐승은 뿔(= 임금)이 열 개나 달렸는데, 열한 번째 뿔에 관한 언급은 아마도 가장 오래 된 신탁(7,24ㄴ-25)을 박해자-임금에게 적용시키는 첨가문일 것이다. 4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임금의 꿈과 회개가 소개되는데, 2장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4,4-6. 그리고 2,48 참조) 이 이야기 역시 기원전 168년 이전부터 있어 온 하나의 독립된 설화이다. 이렇게 저자는 전통적 이야기들의 ‘곳집’에서 재료들을 끌어 내는데, 어떤 것들은 이미 정착된 문학 형식을 취하고 있었고, 다른 것들은 아직 구전(口傳)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구전의 원천은 바빌론에 살던 유다인 공동체에서 찾는 것이 옳다.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문화에 이어 그리스 문화와 차례로 접촉하게 되는 갈데아의 종교 관습이, 본토의 유다인들보다는 이 바빌론 공동체에 훨씬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아울러 다니엘서의 히브리/아람 말 어휘 속에 페르시아 낱말까지 들어 있다는 사실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신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임금에 관한 기억이 다니엘서에 생생히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잘 설명된다(2-4장 참조). 그리고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 나오는 일화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곧 다리우스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아람 말로 쓰인 일화와(6,11-29), 무명의 임금(칠십인역) 또는 고레스 시대를(테오도시온) 배경으로 해서 그리스 말로 쓰인 일화이다(14,31-42). 이렇게 구두 전통에는 같은 일화가 글자와 내용을 조금씩 달리하는 변형들도 있었지만, 전통의 수집가들은 그러한 것들을 별로 개의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벨사살 임금이 벌인 잔치에 관한 전통을(5장)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가 헤로도투스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벨사살이 아니라 나보니드라는 임금의 잔치로 이야기한다. 이 모든 요소는 다니엘서의 전사(前史)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전사의 흔적은 기원전 587년에 시작되는 유배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기원전 538년에 시작되는 페르시아 시대까지도 추적할 수가 없다. 저자가 독자적으로 이 책에 집성한 다니엘과 그의 세 동료의 전통이 바빌론에 있던 동방 유다교의 구전에 속한다는 사실 외에는, 이 전통의 역사적 출처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다니엘서를 바탕으로 ‘다니엘 예언자’의 ‘전기(傳記)’를 쓴다는 것은 옳지 않다. 다니엘이 등장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본디 서로 관련이 없었다. 다니엘서의 최종 저자는, 이 이야기들을 전통적 방식에 따라 느부갓네살(1-4장), 그의 아들 벨사살(5장과 7-8장), 그리고 메대 사람 다리우스와(6장과 9장) 페르시아 사람 고레스(10-12장) 등 여러 임금의 통치 시대에 배치시키면서, 기원전 606년에 유배를 간 한 젊은 유다인이 세 동료와 함께 선택을 받아 왕궁의 시종이 되는 과정을 그려 나간다(1장). 이 젊은이는 해몽을 잘 함으로써 벼슬에 오르게 된다(2장). 그 뒤에 그와 세 동료는 일시적으로 생명까지 위협받는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3,6.14), 페르시아 제국이 시작될 때까지 출세 길을 달린다. 유배 간 유다인들이 벼슬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정승”(6장) 또는 지방 장관, 그리고 현인들의 “총감독관”이 되었다고 말함으로써(2,48-49; 4,6; 5,11), 저자는 그 가능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다. 이는 그의 의도가 역사적 설화와는 다른 차원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드러내는 것이다.
3. 다니엘서의 문학 유형
글의 문학 형식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결정된다. 글은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글이 그 특정 집단에서 수행하는 또는 수행해야 하는 구실이 그 문학 형식을 결정짓는 첫째 요소이다. 그리고 그 글을 둘러싼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관습이 둘째 요소이다. 저작 당시의 배경에서 볼 때, 다니엘서는 그 때의 유다교 문학에서 애용되던 두 문학 유형, 곧 유다인들이 ‘하가다’라고 부르는 교훈적 이야기와 묵시 문학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 교훈적 이야기
교훈적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신학적, 도덕적, 또는 지혜 문학적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이용되는 교육 방식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담긴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유를 해석할 때와 마찬가지로 ‘요점’을 포착해야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 그의 행동이나 시련 등은 독자에게 자기 시대의 영성적 필요성과 관련하여 교화, 위로, 신앙 등의 메시지를 끌어 내게 한다. 유다교는 헬레니즘 시대에 주변의 여러 이교적 문화와 대립된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온갖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스-시리아 제국이 강제로 그리스화를 추진하자, 유다 땅에 살던 이 신앙인들은 갈등과 곤경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일부 귀족들은 이미 그리스적 생활 방식을 받아들여 익숙해진 터였다.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다니 1장, 3-6장, 13장, 14장을 읽어야 한다. 때로는 다니엘과 그의 세 동료의 행동이 다른 이들도 따라야 하는 본보기로 칭송되기도 한다(1장, 3장, 6장). 그리고 때로는 인간적 교만이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교도들의 망상을 강력히 단죄하거나(4장, 5장) 풍자적으로 비웃기도 한다(14장). 이러한 다니엘서의 이야기는, 어떠한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되기는 하지만 역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2) 묵시 문학
기원전 587년에 시작된 바빌론 유배 때부터, 예언 문학은 점점 ‘하느님의 심판’과 또 그것에 이어지는 ‘구원’이라는 이중의 관심으로 특징지어진다. 아울러 이러한 ‘종말론적’ 관심에 부응하기 위하여 채택한 문학 양식도 점진적으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감추어진 것을 밝히는 점술과 묵시가 중시되는 문화의 맥락에서, 종말론이 ‘묵시’ 문학 안에 자리를 잡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변천의 발자취를 비교적 선명하게 추적할 수가 있다. 이미 에제키엘과 즈가리야 예언자는 환시와 그것에 대한 천사의 설명이 통상적 문학 전통으로 자리잡은 표현 방식을 이용하였다. 유배 이후, 무명의 저자들 손에 이루어진 즈가 13-14장과 이사 24-27장에서는, 역사의 최종적 위기가 그려진다. 묵시 문학은 이러한 변천 과정의 끝 부분에서, 때로는 성서적 회상을 곁들인 문체를 써 가며,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춘 메시지를 제시하기 위하여 앞의 것들과 똑같은 방식을 채택한다. 이 메시지가 빈번히 ‘종말’의 예고로 종결짓는 역사에 관한 신학적 해설을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저자들은 자기들의 시대와 거리를 두고 객관적 평가를 내린다는 의미에서, 자기들의 메시지를 과거의 인물이 말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그들의 명의인(名義人)이 바로 다니엘이나 에녹 같은 사람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모세, 에즈라, 이스라엘의 열두 선조, 바룩, 또는 아담 등도 등장한다. 이리하여 가명 사용이 이 문학 유형의 본질적 원칙이 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저자들은 한 작품 안에서, 자기들이 저술하는 때에 대단원에 다다르는 ‘과거’에 관한 신학적 해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지향해 나아가는 종말의 예고를 한데 묶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묵시 문학에서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중계된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적인 사항들은 분명히 구분된다. 위로의 메시지와 하느님 심판의 예고가, 이전의 예언자들에게서처럼 강력한 회개의 촉구를 동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묵시는 위에서 오는 지혜로 제시된다. 교훈적 이야기들이 실생활에 관한 권고로 끝을 맺는 반면, 묵시된 이 지혜는 하느님의 은밀한 계획을 알려 주는데, 사람들의 실생활은 바로 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니엘서에서는, 표현상의 변형들이 있기는 하지만 둘째 부분(7-12장) 전체가 완전히 묵시 문학에 속한다. 그러나 이 부분의 본질적인 주제들은 제1부에서부터, 곧 다니엘이 해몽하는 느부갓네살의 꿈이라든가(2장), 임금에 대한 심판을 뜻하는 큰 나무에 관한 꿈이라든가(4장), 벨사살 임금이 자기 왕궁의 벽에서 본 글자의 해독(5장)에서부터 이미 비롯된다. 환시와 꿈의 이러한 지속적 이용은, 당시 이교에서 애용하던 점술 문학과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상의 유사성은 이교 점술의 무능에, 하느님의 ‘지혜’와 ‘영’에서 비롯되는 예언의 진실성을 대비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2장, 4장, 5장). 다니엘이 상징적 환시의 수혜자가 되기는 하여도, 보이는 것의 뜻을 알려 주는 천사가 개입해야 한다. 네 마리 짐승과 “사람의 아들 같은 이”(7장), 숫양과 숫염소(8장), 그리고 페르시아 시대에서 기원전 164년까지의 역사를 그려 내는 거대한 ‘벽화’가(10-12장) 그러한 예이다. 또 미래에 관한 은밀한 계시로 간주되는 성서 본문이 있다. 예레 25,11-12와 29,10인데 거기에 나오는 “칠십년”의 해석이, 환시와 꿈의 해석과 비슷한 특수 기법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묵시 문학적 표현 방식은 특별히 어렵고 복잡하여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4. 다니엘서의 주요 주제
(1) 신앙과 종교 생활의 근본 요소
다니엘서는 매우 전통적이면서도, 시대가 제기하는 여러 문제를 명철하게 살핀다. 잡다한 신들이 가득하고 그 상들 앞에서 예배하며(5,4), 신성하게 여기는 짐승들을 공경하고(14,23) 또 임금 자신이 신처럼 공경받기를 요구하는(6,8) 여러 이교 문화 앞에서, 이스라엘의 유일신론은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낸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이교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내용이 그다지 깊지는 않아도 일종의 호교론을 구상해 낸다(14장). 그뿐만 아니라 특별히 생명을 잃는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신앙의 위대함을 찬양한다(3장; 5장; 14,29 이하). 모든 피조물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탈신화한 세상에서(3,52-90), 정치 권력 역시 그분의 절대적 통치를 인정해야 한다(4,31-32; 5,22-23). 정치의 권위도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다(4,22ㄴ.29ㄴ; 5,18-19). 그분만이 시간과 역사의 주님이시며, 홀로 쥐고 계신 비밀들의 유일한 계시자이시다(2,20-23).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신앙의 언어는 독소가 제거된 옛 신화의 잔재가 존속하는 상징적 표현 방식을 이용한다. 곧 하느님께서는 시종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나이와는 무관하게 살아 계신 ‘노인’이시라는 것이다(7,9-10). 여기에서 천사 세계의 묘사는, 동부 메소포타미아 곧 현재의 이란 땅에서 쓰이던 상징들에서 새로운 요소들을 빌려 옴으로써 복잡해진다. “주님의 천사”가 불가마 속에 있는 세 젊은이(3,49-92), 그리고 사자굴에 있는 다니엘을 구출하기 위하여 개입하는 것만이 아니다(5,23). 또 다니엘이 본 환시와 꿈을 해석하는 열쇠가 에제키엘과 즈가리야의 경우처럼 천사에게서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다(7,16 이하; 9,16 이하; 9,21; 10,9-11,2; 12,6 이하). 주님께서는 바로 이 초자연적 존재들을 통하여 세상을 통치하시고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키시는 것이다(4,14; 10,13.20-21; 12,1).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사람은, 인간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경탄스러운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깨닫게 된다(2,34.45; 3,11-13.20-22; 5,5; 8,25ㄴ).
유다교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계시를 바탕으로 율법에 따라 실생활을 체계화한다. 이교인들로서는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율법의 규정들(예컨대 음식에 관한 금령들: 1,8)을 유다인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율법은 법 체계를 세울 뿐만 아니라(13,62), 모든 도덕적, 제의적(祭儀的) 책무에 의미를 부여한다(3,18.41; 13,23). 율법은 또한 전례력을 확정짓는다. 그리고 어떠한 인간적 권세도 그것을 변경시킬 권한이 없다(7,25ㄴ). 율법은 유배의 땅에서도, 관습에 의해서 정착된 횟수와 자세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기도의 형식을 제시한다(6,11). 이렇게 일정한 형식으로 고정된 기도문들이 다니엘서 이전부터 많이 전해져 오고 있었는데, 다니엘서의 운문들은 바로 그 표현법을 모방한다(2,20; 3,33; 4,34ㄴ; 6,27-28; 7,27ㄴ). 다니엘서에는 삶의 갖가지 상황에 직접 관련되는 개인 기도 외에도(13,42-43), 히브리/아람 말로 쓰인 본문과 그리스 말로 쓰인 첨가 부분에, 각기 해당 문학 유형의 표본이 되는 두 개의 참회 기도(3,25-45; 9,4-19)와 한 개의 찬미가(3,52-90)가 보존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복음으로 새롭게 열린 전망에 맞추어서 이 기도문들을 자기들의 기도로 받아들이는 데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게 된다. 유다교는 이렇게 하여 동방의 여러 문명과 종교를 병합한 헬레니즘의 혼합주의적 문화 속에서도 자기의 독창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다니엘서는 바로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그 문학 양식 속에서, 유다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이 독특한 상황이 지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가능성을 드높인다. 곧 이 책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충실히 살아가는 유다인들이 크게 성공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1장; 2,48; 3,30; 5,29), 그들 자신이 바로 자기들이 동화하여 살고 있는 사회를 구할 사람들임을 드러내며, 또 아무런 주저도 없이 참 하느님의 위대성을 고백하는 이교도 임금들이 회개하리라고 예상한다(2,46-47; 3,31-33; 4,34; 6,27-28). 이러한 전망은 바로 그 당시 이교도들을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인도하고, 때로는 율법을 지키게 하여 그들도 계약의 백성으로 동화시키는 선교의 전망이기도 하다.
(2) 역사 신학
하느님께서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당신의 신비한 계획을 실행하신다. 예레미야의 보편주의와(예레 25) 제2이사야의 위로의 메시지는(이사 41,25-29; 45,1-6) 이제 폭넓게 구현된다.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다니엘서의 저자는 근동의 역사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가는 제국들을 보여 준다(바로 이 제국들과의 대결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파멸되는 것처럼 보인다). 신상에 관한 꿈에서나(2장), 네 마리 짐승과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 관한 환시에서(7장), 그 메시지의 핵심과는 무관한 전통적 표현 양식을 이용하여, 바빌론,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의 연이은 출현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는 일종의 비관론이 지배한다. 이러한 역사는 위기가 계속되면서 점진적 타락을,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인간 세계에 일어나는 악의 증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2장에 나오는 거대한 상(像)이 머리는 금으로 되어 있지만, 발은 흙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그리고 앞의 것들보다 더 큰 악행들을 저지름으로써 누구보다도 더 흉악하게 나오는 7장의 네 번째 짐승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역사는 대단원을 향해 나아가는 죄의 신비이다. 인간 역사는 또한 사람들에게 이로운 ‘권세들’(“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끊임없이 도움을 주시는 하느님과 그분의 천사들)과, 이를테면 이교도 제국들로 육화한 적대적 ‘권세들’이(10,13; 10,20-11,1 참조) 마주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역사는 이미 여러 가지 상징으로 표현되는 마지막 심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거대한 상의 붕괴(2,44-45), 벨사살의 죽음(5,24-30), 짐승의 죽음(7,11.24-26), 숫염소의 파멸(8,23-25), 박해자-임금이기도 한(11,40-50) ‘파괴자’의 종말(9,27) 등이 그 상징들이다. 이러한 심판의 예고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임금의 통치가 빚어 내는 비극적 상황과 직결된다. 그러나 그 뒤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장차 겪게 될 모든 시련이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러한 예언은 위기 때마다 항구한 현시성을 지니게 된다. 요한 묵시록은 같은 방식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로마 제국을 그려 낸다. 로마에 정복당한 유다인들은 특히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된 뒤에 바로 다니엘서에서 위로의 메시지를 얻기도 한다.
(3) 희망의 메시지
거만한 이교도 권력자들뿐 아니라 불충한 유다인들에게도 내릴 하느님의 심판은, 하느님의 계획이 전개되고 공개되는 과정에서 극적인 한 순간일 따름이다. 예언자들의 약속으로 열린 희망의 전망들은, 그러한 심판을 넘어서서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현실적인 것이 된다. 다니엘서의 저자가 이 약속들에 준거한다는 사실은, 예레미야의 한 구절을 현재의 상황에 따라 현실화하는 9장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저자는 분명, 약속의 의미를 지닌 모든 성서 구절을 이와 비슷한 전망 속에서 재독하였을 것이다. 그는 유배 이후의 예언자들에게서 비롯된 과정을 그 마지막 결론까지 이끌어 가면서, 옛 약속들을 지상의 역사와 한시적 결과의 한계를 벗어나는 곳으로까지 옮겨 놓는다. 이스라엘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역사의 실질적 종말을 가져오는 ‘하느님 나라’의 수탁자이며 수혜자이다. 제국들의 승계가 끝나는 곳이 바로 이 초인간적이고 초역사적인 ‘나라’이다(2,44). 저자는 하느님 앞으로 인도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모습으로(7,13-14) 이 왕국을 표현함으로써 그 초월성을 강조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스라엘)은 이 나라를 지상에서 떠받치는 지주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명을 감당할 수 있으려면, 이 백성은 다시 시련을 겪으면서 단련을 받아야 한다(11,35; 12,10). 이것이 바로 팔레스티나에 사는 유다인들이 받는 박해의 뜻이다. 이 박해는 후에 라비들이 ‘미래의 세상’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에 곧바로 이어진다. 7장의 유비적 환시에서도, 또 12,1-4의 신탁에서도, 이 ‘미래의 세상’은 변모된 우주의 모습을 띤다. 유배 이후의 몇몇 종말론적 본문이 이미 이러한 생각을 예고하였다(이사 25,7-8; 30,26; 65,17-25; 즈가 14,6). 이러한 부분적 주제들이 이제, 거룩한 땅에서 영위하는 평화로운 삶에 관한 신명기의 약속을 훨씬 뛰어넘는 전체적 표현 속에 체계를 갖추게 된다. 사람들이 고대하는 바는 천상적 실재가 지상으로 밀려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자신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책에 쓰인 이들”(12,1), 곧 ‘남은 자들’만이 ‘미래의 세계’의 행복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시된 원칙은, 다니엘서가 저술되기 직전에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유다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로써 저자는 순교자들의 체험으로 제기되는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불가마에서도(3,28), 또 사자굴에서도 사람들을 구해 내실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6,22), 동시대인들에게 필요한 경우에 죽음과 맞서라고 격려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의 희생물이 된 이들 안에서 바로 하느님의 권능이 그 ‘죽음’의 권능을 쳐 이기리라는 사실을 원칙으로 제시한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억울한 죽음으로 인간의 공동 운명에 동참함으로써, ‘미래의 세상’에 자리를 얻게 된다. 이로써 구약성서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부활에 관한 약속이 뚜렷이 나타난다(12,2-3). 그와 동시에, 예언서들과 시편에서 자주 사용된 고전적 표현을 빌리자면, 단순한 ‘죽음’의 영역인 “저승”은 이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 ‘미래의 세상’에서 배제되는 곳으로서의 “저승”이 된다. 마카베오 하권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보존하는 데에 이 희망의 메시지가 중요한 구실을 하였음을 입증한다(2마카 7,9.11. 14.23.29). 계시의 최종적 발전은 이 교의를 단순히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장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니엘서는 예언자들의 신학과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결부시키는 데에 이바지한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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