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호세아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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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4,289 | 추천수0 | |
파일첨부 호세아입문.hwp [796] | ||||
호세아 입문
호세아 예언서는 히브리 말 성서와 대중라틴말성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말 고대 번역본인 칠십인역에서도 열두 소예언서 첫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예레미야서’라든가 ‘미가서’처럼 예언자의 이름이 직접 책 이름으로 쓰인 경우가 많다. 물론 이처럼 책 제목으로 나오는 이들만 예언자로 활동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다른 예언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이 예언자들을 통상 ‘저술 예언자’라고 부른다. 호세아는 바로 처음 등장하는 저술 예언자 가운데 하나이다. 아모스 예언자만이 이 호세아보다 조금 앞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호세아는 기원전 8세기 후반기에, “야곱”이라고도 하지만(12,3), 주로 “에브라임”이라고 불리는 북왕국(4,17 등), 곧 이스라엘에 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1. 역사적 상황
호세아서 1,1에는 이스라엘 왕국의 임금이 한 사람만 소개된다. 바로 여로보암이다. 예후 왕조에 속하는 이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상당 기간 번영을 누린다(기원전 787-747년). 그러나 이 예후 왕조는 여로보암 다음 임금이 등극한 뒤에 얼마 지탱하지 못하고 끝을 고한다. 호세아는 이미 1,4에서 바로 이 왕조의 멸망을 예고한다(호세아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을 다스린 임금들과 그들의 통치에 관한 이야기는 2열왕 14,23─17,23에 전해진다).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즈가리야는 임금이 된 지 여섯 달 만에 시해되고 만다. 왕위를 찬탈한 살룸도 사마리아에서 한 달밖에 버티지 못하고 므나헴에게 살해된다. 므나헴이 아홉 해 가량 통치한 뒤에,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를 계승하지만 등극한 지 두 해 만에 살해된다. 새 왕위 찬탈자 베가 역시 몇 년 뒤에 호세아라는 자에게 시살된다. 호세아 예언자와 이름이 같은 이 사람이 북부 이스라엘 왕국 최후의 임금이 된다. 세 해 동안 지속된 아시리아군의 포위 공격 끝에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됨으로써, 북부 이스라엘 왕국은 완전히 망하게 되는 것이다(기원전 721년 또는 기원전 722년).
호세아서 1,1은 또 남쪽 유다 왕국의 여러 임금도 언급한다. 이들은 이스라엘 왕국이 혼란을 겪던 같은 시기에 유다를 통치한 임금들이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히즈키야의 치세는 사마리아가 멸망한 뒤에도 지속된다. 이 밖에도 특히 7장에는 여로보암 2세의 통치에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와 그 시기를 특징짓는 궁중 혁명을 시사하는 부분들이 나온다. 책 첫머리에 배치된 연대 표기는 북왕국이 비참하게 종말을 맞이한 다음에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호세아가 사마리아의 몰락을 직접 알았다는 확실한 표시는 없다. 사마리아의 파멸을 가리키는 표지들은, 호세아의 말씀을 책으로 만들려고 자료를 수집할 당시의 유다 왕국 출신 편집자가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로보암 2세 이후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임금들을 이 예언서가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호세아 예언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한 내용, 곧 “그들이 임금들을 세웠지만 나와는 상관없다.”(8,4)는 판결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왕위 찬탈자로서 적법한 임금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이 후대에 전해질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북왕국의 불안한 국내 정치 상황은 국제 정세의 여러 불안정한 조건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시기는 아시리아가 근동의 패자로 부상하던 때이다. 디글랏-빌레셀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인 샬마네셀 5세와 사르곤 2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서부 지역 원정을 단행한다. 그리하여 시리아의 여러 아람 왕국, 페니키아의 도시 국가들, 이스라엘 왕국, 그리고 불레셋 도시 국가들이 이 강력한 팽창주의의 파고 속에 휘말리고 만다. 유다 왕국도 화를 완전히 면하지는 못하면서도(호세아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이사야의 가장 오래 된 신탁들에서 이 극적인 사건의 반향을 볼 수 있다.), 형제 나라이면서 동시에 적국인 북왕국보다 한 세기 이상 더 지탱한다. 이 시기에 근동의 또 다른 강대국 이집트는 쇠약한 가운데에서도, 아시리아가 정복한 여러 지역의 봉기를 선동한다.
호세아 예언서는, “에브라임”이라고도 불리는 이스라엘 왕국이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계속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 준다(7,11). 그러나 그 균형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호세아는 그러한 노력의 비극적 결말을 날카롭게 직시한다. 지금 평온한 것은 아시리아라는 거대한 물결이 들이닥치기 직전의 평온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마침내, 정복한 나라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하여 정복자들이 흔히 취하는 정책인 탄압과 지도층의 유배가 이스라엘 왕국에도 가해진다(8,8). 그리하여 난을 피할 수 있는 자들은 이집트로 달아나게 된다(9,6).
2. 종교적-윤리적 배경
국내외 정세만이 호세아 예언자가 개인적으로 내리는 비판의 대상, 그리고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심판의 유일한 대상은 아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깊은 도덕적 타락(4,1-2; 6,7-10; 7,1), 곧 온갖 사회 정의의 부재와 그것에 따른 지도층의 책임을 고발한다. 그는 바로 종교적 불충이 온갖 부패의 뿌리이고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호세아가 맨 먼저 이스라엘인들의 종교적 타협에 비판을 가하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분으로서 당신을 섬기는 이들의 마음이 갈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주 하느님의 요구의 순수성과 절대성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컨대 엘리야 시대와 비교해 볼 때에(1열왕 18) 호세아가 직면한 상황은, 이스라엘인들이 쉽게 분별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명확하지도 않고, 선택된 백성에게 뻗치는 유혹의 손길은 또 더욱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더 많은 위험을 안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러 유혹 가운데에서 가장 역겨운 것은 가나안 신들의 유혹이다. 사람들은 이 신들을 자기들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자리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그분 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마음이 끌린다. 가나안의 신들은 자연의 힘 곧 비와 뇌우, 그리고 땅의 풍요다산을 관장함으로써, 농경 생활의 여러 가지 필요를 채워 주는 전문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상들의 하느님을 버리지 않는 모든 예방책을 강구한다면, 이 가나안 지방 신들의 호의도 동시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종교적 타협은, 예전에 조상들이 세겜에서 계약을 맺을 때에 그만두었지만(여호 24) 그 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던 옛 관습으로 돌아가는 것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타협이 쉽게 이루어진다. 가나안 신들을 모시는 산당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유혹에(4,12-13), 호세아는 대담하게도 당신 백성에게 하실 ‘주님의 유혹’을 대립시킨다(2,16-25). 그러면서 예언자는 결국 가나안 종교의 추종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논거를 들어 반박하기에 이른다. 당신 백성에게 땅의 풍요다산을 보장해 주시는 분은 가나안의 신들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이 아니시냐는 것이다(2,7-11.23-25; 14,6-9).
3. 예언자의 혼인
호세아 예언자의 대담함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그는 주님과 그분의 불충한 백성 사이의 관계를 자기 자신의 삶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예언자는 이를테면 하느님의 입장에서, 그분께서 느끼시는 감정을 자기 것으로 삼아 표출한다. 이 예언서에서는 주님께서 상당히 자주 일인칭으로 말씀하신다는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바로 그러한 사정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호세아가 “창녀”와 혼인 생활을 한다는 1-3장의 이야기는, 성서 해석에서 지속적으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켜 온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나중에 다시 거론되겠지만, 호세아 혼인 이야기의 일화적인 측면이 이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와 비교할 때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호세아가 실제로 자기의 혼인 생활에서 극적인 체험을 하였고,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는 표상으로서만 행동하였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는 점은, 결코 간과해 버릴 수 없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서, 호세아의 혼인 생활은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사실이다. 해당 부분의 각주에서도 보게 되겠지만, 호세아의 아이들은 상징적인 이름을 가지는 데 반해서, 아이들의 어머니 고멜은 그렇지 않다. 만일 혼인 이야기가 단순한 허구에 불과하다면, 이 은유의 중심 무게가 바로 호세아의 아내 고멜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이름 역시 평범한 “고멜”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지녀야 할 것이다.
호세아의 혼인은 허구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이면서, 그러나 동시에 하나의 상징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 일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밝혀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뿐더러 별소용이 없는 일이다. 이 혼인은 예언자들이 흔히 하는 것과 같은 예언적 행동으로서(이사 20,1-6; 사도 21,10-14 참조), 행동 그 자체에서 의미가 흘러 나온다. 호세아서의 경우에는 책 전체가 1-3장에 서술된 이 예언적 행동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3장이 호세아의 새로운 혼인, 고멜이 아닌 다른 여자와의 새로운 생활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 그 동안에 많은 토론이 있어 왔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3,1은 번역상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 곳의 각주 참조).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세 3장이 계속 고멜과 관련될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고멜에 대한 호세아의 사랑, 곧 당신 백성에 대한 주님 사랑의 심화를 볼 수 있다. 호세아는 자기 아내가 그냥 부정(不貞)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절망적일 정도로 부정하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 1,2에서 “창녀”를 가리키는 일반 명칭이 아니라 흔하지 않은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 상징적이다(그 곳의 각주 참조). 그러나 고멜은 일반 창녀가 아니라, 가나안인들에게서 유래하는 ‘풍요다산의 제의(祭儀)’와 깊은 관련이 있는 여자로서, 그것의 감각적이고 성적인 의식에 참여한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다(이 사실을 암시하는 2,4.15; 4,13-14 등 참조).
이러한 부류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당신 백성에 대한 주님의 사랑 역시 그렇게 어리석은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도 호세아가 고멜에게 애착을 가지고 그를 다시 아내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응답이 없는 일방적인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 사랑의 놀라운 심화를 뜻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오로지 남편과만 지내는 완전한 고립이라는 시련만이 고멜을 반성과 회개로 이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역시 자기의 모든 복, 곧 종교적 복, 그리고 하느님과의 특수 관계로 이해되는 모든 복을 완전히 박탈당함으로써만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세 3장은 동시에, 고멜이 부정을 저지르는 그 시간에도 호세아가 그 여자에게 품고 있는 애정을 드러내 보인다. 고멜이 바로 그렇게 부정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죄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음에도, 바로 그러한 죄악에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 백성에게 품으시는 애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신 백성에게 갖는 주님의 이 사랑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
일대 모험과 같은 부부 생활을 하는 호세아에게서, 하느님의 ‘마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이해하게 해 주는 체험을 보게 된다. ‘시간이 찼을 때에’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로마 5,6-8).
호세아는 고멜을 있는 그대로 사랑함으로써, 당신 백성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세아 예언서에서 사랑이 분개와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사랑이 그저 순진하거나 무지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고통으로 다듬어진 사려 깊은 사랑이며, 어떠한 시련에도 주저앉지 않는 사랑이다.
4.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바알
사람들은 가나안의 신들이 여러 특권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러한 특권들이 사실은 주님, 그것도 그분 혼자만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가나안의 종교 의식뿐만 아니라, 그 어휘 그리고 상징과 관련해서도 결코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는 우상 숭배자들과 자기가 쓰는 특정 낱말들의 유사점을 찾아 내어 빗대기도 한다(특히 14,9 각주 참조). 그러나 그러한 일은 암시적이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반면에 널리 퍼져 있는 관습은 사정없이 배척한다. 곧 ‘바알’이라는 용어의 사용이다. ‘주인’을 뜻하는 이 낱말은 본디 가나안의 어떤 신의 이름이다. 또 이 낱말은 아내가 남편을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주 하느님을 지칭하는 데에도 이 ‘바알’을 쓰는 관례가 자리잡게 되었다. 호세아는 이 ‘바알’이라는 말을 소리내는 것조차 싫어한다(2,19). 이렇게 다른 신들뿐만 아니라 바로 주님을 가리키는 데에도 이 이름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2,18).
신상을 세우는 것을 절대적으로 배척한 데에도 이와 유사한 요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신상이 신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상징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은 북왕국의 성소들에 있는 황소들도(호세아는 조롱조로 “송아지”라고 부른다.) 신의 재현이 아니라 그의 상징으로 내세우려고 하였다. 가나안에서는 신들을 어떤 짐승 위에 선 인간의 모습으로 재현하곤 하였다. 그래서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은 그대로 두고 그분께서 베푸시는 도움만을 재현시켜, 주님의 초월성에 맞갖은 존경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친숙한 상징들을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종교적 언어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 점에 대해서 매우 강경한 자세를 보인다. 바로 그러한 관습이 종교적 타협의 표지가 되기 때문이다(호세아의 이러한 태도는 1고린 8 - 10장에서 바오로 사도가 희생제물로 바친 짐승 고기와 관련해서 보인 태도에 비길 수 있다).
예언자의 이러한 자세는 호세아가 다른 데에서 주님과 관련하여 취하는 자세와 생생한 대조를 이룬다. 그 곳에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을 진정한 하느님으로 소개하면서, 바로 그분에게서 땅의 풍요다산을 기대해야 한다고 과감히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이 주장을 암시적으로 조심스럽게 전개한다(14,9). 또한 그는 주님께서 단순히 자연의 힘을 지니신 분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유의한다. 더 나아가서 예언자는 2,23-34를 주의 깊게 읽을 때 드러나는 것처럼, 자연의 정상적인 진행 과정을 존중한다. 대조가 모순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격정적인 언어에서 대조는 여러 가지 뉘앙스를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호세아는 주님을 인간의 종교적 사고 방식과 언어 너머에 두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종교가 어떠한 타협도 없이 순수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언자는 외적 종교와 제사와 제의(祭儀)에 관하여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여기에서 호세아가 문제 삼는 것은 미심쩍은 관행들만이 아니라(4,12-14), 매우 전통적이며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것들이다. 그가 단죄하는 것은 제의나 제사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종교 생활을 이끄는 정신, 곧 의식을 정확히 거행하면 하느님의 호의를 자동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6,1-8과 14,2-4를 비교하라). 주님께서는, 그 순간에는 진지하다 하더라도 삶의 진리가 들어 있지 않은 신심 행위로 불러올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진정한 회개의 표현과, 일상의 행동들을 통해서 자신을 내놓는 사랑의 증거를 바라신다. 바로 여기에서 호세아는 부정적 논쟁을 넘어선다: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14,5). 죄인인 인간이 마침내 이러한 사랑의 진리를 생활화하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다. 2,20-22가 이러한 사실을 선포한다. 주님께서는 옛 계약에서 요구되는 정의와 공정에 애정과 자비를 보태실 것이다. 또 당신과 당신 백성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정립하실 것이다. 이는 진리, 그리고 애정 어린 친교의 표상들로 표현되는 관계, 온전히 내적 성실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호세아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예레미야는 이것이 바로 새 계약이며, 이러한 계약을 세우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바꾸시리라고 말하게 된다(예레 31,31-34).
호세아 예언서는 매우 어두운 시대를 드러내 보여 준다. 윤리적, 사회적 상황은 총체적 부패이고, 종교적 상황은 완전한 불충이며, 정치적 상황도 지각 있는 이의 눈에는 절망적이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질타와 위협으로 그득하다. 그러나 거기에 주의를 촉구하는 또 하나의 대조가 있다. 바닥 깊은 데에서는 호세아의 메시지가 자애와 희망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정황과 사람들의 태도는 어두운 모습만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질타는(그리고 이것은 실망한 사랑의 질타이기 때문에 그만큼 격렬할 수밖에 없다.) 홀연히 그 무엇도 좌절시킬 수 없는 사랑의 토로로 바뀌게 된다. 시작이 사랑이었던 만큼(9,10; 11,1) 끝도 사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분노를 이길 뿐만 아니라(11,6-9) 죄까지 없애 버릴 것이다(14,5).
5. 호세아서의 형성
호세아 예언서가 경이로운 약속의 말씀으로 끝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예언서에서는 편집의 자취를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확실한 형성 과정을 밝혀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사실 호세아서는 특정한 여러 상황에서 선포된 신탁들과 말씀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그 상황들에 대해서 우리는 일부만 밝힐 수 있을 뿐이다.
앞부분의 몇몇 장은 예후 왕조가 머지않은 장래에 멸망하리라고 내다본다(1,4 참조). 이 장들은 호세아의 활동 초기에 속하는 것들로서, 아마도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때에 선포되었을 것이다. 5장의 둘째 부분은 통상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불리는 싸움을 시사하는데, 이 전쟁 중에 남부 유다 왕국이 북부 이스라엘 왕국 쪽으로 영토를 확장한다(5,10 참조). 예언서의 끝 부분은 사마리아의 파멸이 이미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임박한 것으로 소개한다(13,9-14,1).
이상 말한 사항들이 호세아서 연대의 틀을 이루는데, 이 연대는 기원전 8세기의 3/4분기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집트와 아시리아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이스라엘의 노력에 대한 수많은 암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왕위 계승을 끊임없이 뒤집어 놓는 왕궁 내의 음모에 대한 신랄한 비난(이를 전하는 7장의 세부 사항들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 전체적인 뜻은 명백하다.) 등이 또한 이 책 전체를 같은 시대에 연결시키는 표지들이다. 아무튼 많은 신탁이 당시의 윤리적, 종교적 상황과 관련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이 예언서의 절정으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책이 전반적으로 풍기는 인상은 일정한 직선 구도를 따른다기보다는, 같은 주제를 꾸준히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 예언서에서 호세아가 한 말 가운데 그 자신이 직접 기록한 부분을 구분해 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1-3장은 다른 부분보다 어조가 훨씬 더 개인적인 것으로 보아, 호세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탁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것들에서 이 예언자의 삶의 일부, 더 나아가서 그의 심층적 심리를 재구성하려는 의도로 전기적인 요소들을 밝혀 내려고 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뿐더러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 자체를 지나쳐 버릴 위험이 있다.
호세아의 혼인 생활이 정확히 어떠하였든 간에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해서, 3장이 그의 두 번째 혼인을 말하든, 아니면 아내와 헤어졌다가 재결합하는 것을 말하든 간에), 그것이 그 자체로서, 또는 단순히 호세아와 그의 부정한 아내 사이의 일로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께서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민족 사이에 맺어진 관계의 상징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녀들의 상징적인 이름, 그리고 끊임없이 2인칭에서 3인칭으로, 단수에서 복수로 오가는 변화, 똑같은 질책을 하면서 그 대상을 어미에서 자식들로, 또 자식들에서 어미로 바꾸어 가는 의도적인 혼동 등, 이 모든 것은 호세아의 혼인과 관련된 이 비통한 이야기가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청중 또는 독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임을(1고린 10,11) 뜻한다(호세 14,10 참조).
이미 여러 학자가 말한 대로, 호세아서의 첫 절은 사마리아의 멸망 뒤에 유다 땅에서 쓰여졌음이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이 밖에도 호세아서 전체에 걸쳐 이 책이 유다에서 편집되었다는 표시들을 볼 수 있다(1,7과 각주 참조).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본디 북왕국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하여 선포된 말씀들이 어떻게 유다 왕국에 적용되었는지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유다의 이름을 담은 모든 구절이 유다의 편집자에게서 유래한다는 뜻은 아니다. 끝으로, 글자로 기록된 이 예언자의 메시지 전체에 대한 반향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절 역시 편집자가 쓴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문학 비평적인 고찰은 순전히 전문가적인 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성서의 저자들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도록 여건을 만들어 낸 명백한 역사적 상황 너머로, 그 말씀이 항상 지니는 생생한 현실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호세아가 말씀들을 직접 기록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일부분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충실히 전해졌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매우 개인적인 성격의 언어와 문체가 이 사실을 강하게 뒷받침해 준다. 그의 문체는 열정적이고 격렬하며, 그의 언어는 강력하고 힘이 넘친다. 그러나 특히 아름다움을 더해 주는 간결함 때문에, 그 언어는 종종 난해하고 그 문체는 때로 모호하기도 하다. 문장들은 빈번히 짧고 율동적이다. 표현의 간결성, 축약성, 부조화 등은 매혹적인 시의 모습을 부여하면서도, 또한 이것들은 호세아서를 히브리 말 구약성서에서 가장 난해한 책 가운데 하나로 만든다. 따라서 호세아서는 본문 비판과 관련해서 추측에 따른 수정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책이기도 하다.
6. 호세아 예언서의 영향
호세아 예언서의 영향은 성서 전체에 걸쳐서 넓게 나타난다. 구약성서에서는 예레미야가 그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예레미야는 ‘광야로의 귀환’이라는 주제를 이어받고(예레 2,2-3과 호세 2,17 참조), 또 ‘새 계약’이라는 주제도 더욱 명확히 한다.
호세아 예언서의 표상 가운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주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를 혼인 관계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또 부정, 간음, 매음 등과 같은 명제가 뒤따른다. 이 표상은 예레미야서(2,23-24; 3,1; 30,14; 31,22), 에제키엘서(16장과 23장), 이사야서의 후반부(50,1; 54,4-7; 62,4-5)에서 다시 볼 수 있고, 아가서에서는 해석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구약성서에서 혼인의 표상이 주님과 그분 백성의 일치를 상징하듯, 신약성서에서도 이 표상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게 된다(마르 2,19-20; 에페 5,25 등).
신약성서에서는 호세아서가 17번 인용된다. 그러나 그 영향은 단순히 동일한 표상의 반복이나 인용 횟수에 따라 평가할 수 없다. 호세아의 신학은 하느님 사랑의 신학이다. 이 사랑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표상 안에서 정성과 자애로 표현된다. 호세아는 남녀간 사랑의 표상 속에 인간적 열정의 언어를 사용한다. 호세아가 이러한 표현을 대담하게 채택함으로써, 이 예언자 이후부터 주님께서는 열정적인 하느님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바람, 실망, 분개와 분노를,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날이 커져 가는 당신의 자애를 말씀하신다. 결국은 분노나 징벌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이 되어 버린 시련 너머로, 이제는 정결한 일치 속에 이루어지는 행복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애는 약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뿐더러 죄에 대한 기억마저 소멸시켜 버릴 수 있는 하느님의 힘이다. 이렇게 호세아서는 신학과 신앙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호세아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면서 바로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요한 복음서에서처럼 그렇게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사랑의 계시 자체는 호세아서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호세아서가 그 메시지의 깊이와 열정을 통하여 신앙의 본질적인 것에까지 다다르기 때문에, 이 예언서는 과거처럼 오늘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당신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 된다. 호세아서의 마지막 절은 읽는 이에게 하느님 말씀의 현실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촉구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14,10). 예수님께서도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신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르 4,9). 이렇게 성서의 계시는, 역사의 특정 상황에 깊숙이 끼워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듣는 모든 이에게, 그리고 성서를 펴는 모든 이에게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호세아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의 교회에 말씀하신다. 그것은 질책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자비의 말씀이고, 준엄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엇을 요구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너희에게서 모든 불의를 내쫓고, 우상의 속임수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이 요구는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요구이다. 그러나 이 요구는 또한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요구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유일하신 분이 되려고 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진실로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상은 무(無)일 뿐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사람들에게는, 인간에게서 구원을 바라는 것이 헛일일 따름이다. 오로지 주님에게서만 행복과 생명이 나온다.
이것이 호세아서를 마무리짓는 말씀이다. 그것은 신앙과 희망의 기초가 되는 말씀이다. 물론 호세아 예언서가 성서의 모든 계시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예언서가 그토록 멀리 또 깊이 나아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백성은 이 예언서를 읽으면서 희망의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또 자기 신앙의 순수성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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