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시편 23(22),5-6을 중심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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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4,371 | 추천수0 | |
파일첨부 호의와_자애만이_저를_따르리니.hwp [744] | ||||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 시편 23(22),5-6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성서는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선사된 하느님의 귀중한 말씀이다. 또한 성서는 한 민족 공동체의 삶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개개인의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성서 가운데 한 책인 시편은 성서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여 시로써 그려낸 책이다. 시편집은 모두 150편의 시를 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시편 23편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한 편의 걸작시이다. 이 시는 아주 짧고 단순하지만 인간 실존의 문제, 곧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필자는 이미 이 시편의 전반부(1-4절)를 연구 발표한 바 있기에 여기에서는 그 후반부(5-6절)를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우리 본문에 나오는 '상, 향유, 술잔, 원수, 호의와 자애, 주님의 집'과 같은 말들은 심오한 성서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용어들이다. 필자는 이 단어들에 대한 성서적 의미를 살펴본 다음, 이 시구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들을 알아보겠다. 그리하여 이미 우리보다 오래전에 인생 승리를 이룬 한 시편 작가의 삶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본문에 대한 예비적 이해
시편 23편을 이해하는 데 주요한 문제는 이 시편이 내용적으로나 구조적인 면에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점이다. 시의 전반부(1-4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착한 목자로 그려져 있고, 후반부(5-6절)에서는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집주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 배경이나 등장인물도 다르다. 시의 전반부에서는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가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등장인물은 목자이신 주님과 양떼 중의 하나인 시편 작가이다. 반면에 후반부에서는 잔칫집(주님의 집)이 배경을 이루고 있고 등장인물은 집주인이신 하느님, 시인을 괴롭힌 원수 그리고 시편 작가이다. 이 때문에 시의 통일성 문제가 생겨나는데, 우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목자와 주인의 관련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고대의 유목생활에서나 이 시가 생겨난 시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목자는 두 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곧 목자는 강도나 야수로부터 양떼를 지키며 인도하기도 하지만, 사막에서 원수로부터 쫓기는 사람을 자기 천막이나 집에 받아들여 보호하며, 식사도 대접하고 상처를 치유하여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친절한 집주인의 역할도 하였다.
시편 작가는 바로 이러한 목자의 두 가지 역할을 이용하여 참 목자이시며 친절한 주인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뛰어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3. 본문 해석
1) 환대(5절)
시편 23편의 전반부(1-4절)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새롭게 바뀌어 묘사된다. 단순하면서도 간략한 시구이나 손님 접대에 대한 독특한 요소들이 빼어나게 정리되어 나타나고 있다. 여기 '상을 차려줌'은 집주인과 초대받은 손님의 일치와 친교를 표시하며 '머리에 향유를 발라줌'은 기쁨을 상징하고, '가득한 술잔'은 손님에게 필요한 것을 풍성하게 마련하여 그를 극진히 대접하는 주인의 너그러운 마음을 나타낸다. 시편 작가는 주인의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주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1)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주시고"
히브리 말 본문의 첫 단어 '타아록'(당신은 … 차려주다)은 어근 '아락'의 변형으로서 그 뜻은 '준비하다, 정돈하다, 배치하다'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질서정연하게 놓다'이다.1) 구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다양한 사물들을 목적으로 취하여 사용된다. "짐승을 잡고 술에 향료를 섞고 상을 차렸다."(잠언 9,2; 창세 22,9; 레위 1,8; 이사 21,5; 에제 23,41 참조). 우리 본문에서는 우리말로 '상'으로 옮긴 '슐한'을 목적어로 취하고 있다.
히브리 말 '슐한'은 그것의 동계어인 우가릿어[thhn]와 아라비아어[slh] 그리고 시리아어[shalha]에서도 발견된다. 구약에서는 이 단어가 여러 가지로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모두 탁자와 관련된 용례에서 비롯된 것이다.2) 그 용례를 보면, 첫째로 전례의식에 사용된 제사상(祭祀床)이 있다(출애 25,23; 레위 24,6; 민수 3,31; 1열왕 7,48; 1역대 28,16; 에제 40,39-43; 말라1,7). 둘째로, 왕의 식탁(1열왕 5,7; 1사무 20,34),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음식을 가득 차려놓은 특상(욥기 36,16), 일반 식탁(2열왕 4,10) 등이 있다. 끝으로 주님께서 백성을 위해 마련하시는 잔칫상(에제 39,20; 시편 79,19)이 있다. 우리 본문의 '상'은 잔칫상을 말하고, "상을 차려주시고"란 말은 잔치를 베푼다는 뜻으로 주인과 손님의 관계에 대한 시편 작가의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집주인과 손님의 친교를 더욱 깊게 해주는 잔칫상이 원수들 앞에서 차려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원수는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 이는 본 시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이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리 본문에서 '저의 원수'로 번역된 히브리 말 '초르라이'는 어근 '차라르'(다른 사람에게 적의를 보이다, 괴롭히다)에서 유래한 분사적 명사 형태이다. 성서에서 이 단어는 이스라엘의 적(민수 10,9; 25,17-18) 또는 개인적인 원수(2사무 24,13; 욥기 6,23)를 묘사할 때 사용된다. 특히 시편에서는 우리 본문의 '초레르'(원수)와 비슷한 개념을 갖고 반대자(시편 10,5) 또는 시편 작가 자신의 개별적인 원수(시편 31,12-14; 42,11; 143,11-12)를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다.
시편 작가는 지난 삶 동안 온갖 고통을 당했다. 지금도 원수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서는 상을 차려주신다. 원수들의 모든 악행 앞에서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보살핌 때문임을 시편 작가가 깨달은 것이다. 지금은 주님께서 함께하시어 자기를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위안과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심을 확신한다. 이 같은 확신에 근거하여 시편 작가는 잔칫상을 통한 주님과의 일치를 즐기며 노래한다. 더군다나 여기에다 주님께서는 기쁨의 향유를 발라주신다.
(2)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시니"
고대 근동지역의 관습에 따르면 집주인은 자기가 초대한 손님이나 자기 집에 들어온 길손에게 기름을 발라주었다. 이러한 행위는 손님이나 길손에 대하여 정성을 다하는 환대의 표시이다.
우리말로 '향유'로 번역된 히브리 말 '셰멘'은 근본적으로 기름을 뜻하나 가장 많은 용도로 쓰이는 올리브 기름을 말한다. 올리브 열매에서 짜낸 이 기름은 고대로부터 순수하게 기름으로만 쓰일 때도 있었으나, 향료를 섞어 병 치료(이사 1,6; 에제 16,7), 화장품(2사무 14,2; 시편 104,15; 아가 1,3; 에제 16,7)으로도 사용되었다.3) 그러나 무엇보다 이 기름의 중요한 용도는 희생제사나 예배와 관련해서 사용되었으며(레위 2,15-16; 에제 45,14) 특히 봉헌식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특히, 왕(1사무 10,1; 16,13; 1열왕 1,39), 사제(레위 8,12), 예언자(1열왕 19,16), 성소의 기물(출애 30,23-33)은 하느님의 풍성한 축복의 상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기름은 하느님의 축복의 표징일 뿐 아니라 사랑(아가 1,3), 우정(잠언 27,9), 형제적 화목(시편 133,1-2ㄱ), 기쁨을 상징한다.4) 그리하여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시편 23,5; 92,11; 루가 7,46; 마태 26,7), 그 사람의 기쁨과 행복을 빌며 우정과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보통 때보다는 축제 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시편의 다른 곳에서 자주 언급된다. 우리 본문에서 "주님께서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셨다."(시편 23,5)는 사실은 주님께서 시편 작가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신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주님의 풍성한 축복과 환대를 깊이 체험한 시편 작가가 감사와 기쁨의 외침을 어찌 토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귀한 손님에게 상을 차려주고 향유를 머리에 발라주는 행위에 이어서 또 하나의 상징적 행동이 뒤따른다. 이 행위를 통하여 손님에 대한 주인, 곧 시편 작가에 대한 주님의 환대는 더욱 심화된다.
(3) "저의 술잔도 가득하나이다."
성서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배부르게 하시는 중요한 음식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다(신명 11,14). 올리브 열매에서 짜낸 기름과 마찬가지로 포도나무 열매에서 빚어지는 포도주는 사람의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 기쁨을 주는 음식이다.5)
우리 본문에서 '술잔'으로 번역된 히브리 말 '코스'는 기본적으로 마시는 데 사용하는 '그릇'이나 '잔'을 뜻한다. 그러나 이 시의 배경을 감안할 때, 우리 본문의 '코스'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맛 좋은 포도주가 가득 담긴 술잔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본문의 "저의 술잔 가득하나이다."란 시구에서 집주인의 관대한 모습과 손님으로 초대받은 사람의 충만한 기쁨을 연상할 수 있다. 실제로 근동지역의 관습에 따르면 집주인은 초대한 손님에게 맛 좋은 포도주를 잔이 넘치도록 부어준다. 이러한 행위는 필요한 것을 풍족하게 마련해 주는 너그러운 집주인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방랑자로 살아오던 시편 작가를 귀한 손님으로 초대하시어 당신 스스로 마련하신 좋은 것을 마음껏 들라고 하시며 특별한 환대를 하신다. 이제 시편 작가는 주님과 겸상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자기를 괴롭히던 모든 근심과 불안에서 해방되어 큰 기쁨 속에 위로와 평안을 마음껏 누린다. 다음 절에서 이러한 기쁨과 평안은 시편 작가에게 굳은 확신과 큰 기쁨을 서원 형식으로 토로하게 한다.
2) 확신과 기쁨(6절)
6절은 시편 23편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 절에서 시편 작가는 인생의 수많은 고초를 겪은 후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된다. 그는 인생 여정에서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총을 깨닫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비길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을 누리면서 마음의 결심을 노래한다.
(1) "저의 한 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여기 우리말 '호의'로 번역된 히브리 말 '토브'는 기본적으로 '선'이나 좋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경우에 따라 유쾌한, 기분 좋은, 만족한, 호의적인, 인정 많은, 정다운, 인자한, 아름다운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6) 성서에서 유쾌한 식사(판관 19,6-9; 1열왕 21,7; 룻기 3,7), 은혜를 베푸는 사람(창세 40,14) 등 행복을 가져오거나 삶을 더 안이하게 해주는 데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창조와 구원 행위의 긍정적인 측면 전체를 표현하는 데 있다. 하느님의 좋으심은 구약성서에서 핵심적 계시의 하나이며, 인간생활의 가장 소중한 물질적 정신적 선(좋은 것 = 토브)은 모두 그분의 좋으심과 관련된다. 하느님과 그분의 창조 행위를 보도하는 창세기 1장에서만 이 단어가 7번이나 등장한다.
여기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의 뜻과 목적에 맞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목적에 좋은 것을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다. 시편 작가는 자기를 위해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토브'가 자기의 한평생 모든 날에 따른 것이라고 노래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토브(호의)는 하느님의 헤셋(자애)과 짝을 이루어 나타난다.
여기 '자애'로 옮긴 히브리 말 '헤셋'은 보통 자비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으나 사랑, 은총, 선, 자애, 인자함, 성실함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7) 구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계약에 충실하신 자애로운 하느님을 드러낼 때 사용되는 아주 중요한 말이다. 특히 시편 작가들의 하느님은 어느 때, 어느 상황에서나 신뢰할 수 있는 근본적으로 성실하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며(시편 106,1; 118,1-4; 136,1-26) 하느님은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시다(시편 86,15; 103,8; 145,8). 그분의 자애는 세심하고 사려 깊으며 성실하게 끊임없이 계속된다. 시편 작가는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헤셋'이라는 말로 노래한 것이다.
하느님의 '토브'(호의, 좋으심)와 '헤셋'(자애)은 창조물에 대한, 특히 하느님의 자녀들에 대한 그분의 본바탕을 나타내는 말이다. 시편 작가는 하느님의 토브와 헤셋이 의인화된 시종들처럼 자기를 뒤따랐음을 발견하게 되고, 현재를 즐기며 미래의 잔칫상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마음의 결단을 서원 형식으로 다음 행에서 노래한다.
(2)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이다."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이다.'라는 시편 작가의 소망과 결심은 생애 동안 자기를 뒤따르면서 한결같이 보살펴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호의와 자애에 기인한다. 이에 근거하여 시편 작가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님의 호의와 자애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을 수 없다는 확신을 이 시구로 노래하고 있다.
여기 주님의 집은 성전으로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를 가리킨다. 시편 작가는 지금 성전에 머물면서 희생과 감사의 예물을 바치고 주님과 겸상하면서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생의 풍요로움에 흠뻑 취해 있다. 이제 그는 주님 집의 식구로서 주님과 아주 깊은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한없이 기뻐하고 있다. 시편 23편의 마지막 절인 이 6절은 바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이 큰 기쁨을 마음에 담아 시로써 노래한 시편 작가 자신의 인생 승리에 대한 확신이요 결단이며 신앙고백인 것이다.
4. 나오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시편 23편의 후반부(5-6절)를 성서적으로 살펴보았다. 우리가 이 시편 구절을 문자적으로만 보게 되면, 손님을 친절하게 대하는 관습은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며, 특히 이 시가 생겨난 근동지역 사람들에게 삶의 일상적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시편 작가는 누구든지 잘 알고 있는 이러한 일상적인 삶의 소재를 이용하여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비유적 방법으로 노래하였던 것이다. 그는 우리 본문에 나오는 '상을 차려줌, 향유를 발라줌, 가득한 술잔, 호의와 자애, 주님의 집' 같은 용어들을 빌려 하느님께서 지난 삶 동안 자기에게 베푸신 수많은 은혜를 체험하고 깨달아 이를 바탕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과 확신을 기쁨에 겨워 토로하였던 것이다.
시편 작가의 이 외침은 누구를 위하여 던진 메시지인가? 불교의 표현대로 고해(苦海)와 같은 인생살이, 늘 근심과 걱정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나,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하느님과 절친한 관계를 이룸으로써 인생 승리를 획득한 옛날의 이 시편 작가처럼 우리 자신의 실상을 똑바로 보고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다면, 시편 작가의 삶이 우리의 현실이 되지 않겠는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스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시편 작가의 이 노래는 두렵고 불안한 우리의 마음을 위해서 얼마나 유익하고 위로가 되는 말인가? 마르티니의 표현대로 이 노래는 예수님 앞에서 믿음과 함께 반복해서 부를 필요가 있는 찬란한 기도문이 아닐 수 없다.
"주 예수님, 저에게 상을 차려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시고 술잔을 가득 채워주시며, 특히 저를 당신의 집에 살게 해주시나이다. 당신 집에 살게 해주시니 그 어떤 것도 아쉽지 않고 두렵지 않나이다."
* 시편 본문은 새 번역 1 「시편」(임승필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년)을 따랐다. - 편집자 주.
--------------------- 1) Willem A. VanGernerren 편,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3권, Mishigan :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년, 536면. 2) 위의 책, 4권, 123-124면 참조. 3) L. A. Schoekel, Trenta Salmi : Poesia e Preghiera, 볼로냐, 1982년, 119면. 4) X. 레옹-뒤푸르 편, 「성서신학사전」, 광주 가톨릭 대학교 출판부, 1984년, 86면. 5) 위의 책, 86면. 6) '토브'(호의)에 대한 다양한 의미에 대하여 다음 책을 참조. 정학근, 「주님 당신만이 저를 편안히 살도록 하시나이다」, 분도출판사, 1999년, 69-72면; E. Jenni/C.Westermann, Theological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2권, Mark E. Biddle 옮김, Hendrickson, 1997년, 487면. 7) '헤셋'(자애)에 대한 최근 학자들의 논의와 해설에 대해 Willem A. VanGemeren, 앞의 책, 2권, 211-218면 참조.
[사목, 2003년 9월호, 정학근(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 성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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