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신약성서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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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6,429 | 추천수0 | |
파일첨부 신약성서_입문.hwp [1,482] | ||||
신약성서 입문
신약성서는 스물일곱 권의 책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 말로 쓰여 있는데 그 길이는 제각각이다. 이 작품을 ‘신약성서’라는 이름으로 일컫는 관습은 2세기 말엽에야 생긴다. 사실 여기에 포함된 문헌들은 한꺼번이 아니라 조금씩 권위를 더해 간다. 그리스도인들도 본디는 유다인들처럼 구약성서를 유일한 성서로 여기고, 유다인들의 당시 관례에 따라 그것을 “율법과 예언서”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기들의 문헌들도 구약성서의 본문들과 실질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새 문헌 전체를 ‘신약성서’라는 이름으로 일컫게 된 것은, 바오로 사도에 이어서(2고린 3,14) 그리스도교 초기 신학자들이 내린 결론에 기인한다. 곧 이 본문들 안에 새로운 계약이 들어 있고, 구원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성립되는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의 관계가 바로 이 계약의 규정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사실 ‘구약’ 또는 ‘신약’의 ‘약’은 ‘계약’의 준말로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새 계약’을 이야기함에 따라, 마침내 그 때까지 “율법과 예언서”라고 부르던 작품에 ‘구약성서’라는 명칭을 부여하기에 이른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약성서를 무엇보다도 먼저 모세를 통하여 체결된 옛 계약의 법전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옛 계약을 갱신하셨으며, 그럼으로써 구약이 그 자체로서는 이제 지난 계약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스물일곱 책이 각각 편집되고 신약성서라는 한 작품으로 결집되기까지는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이것들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거의 2000년 동안 전승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본문이 변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신약성서를 접하는 지금의 우리는 신약성서의 세계와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본질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약성서가 태어나고 처음에 보급되던 당시의 상황 속에 그것을 재배치시키는 일이 오늘날 필수적인 작업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무리 간략한 신약성서 입문이라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여건 속에서 새로운 성서를 만드는 작업을 하였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 이 사람 저 사람이 손으로 옮겨 쓰고 또 옮겨 쓴 것을 다시 베끼는 과정에서, 성서 본문들이 편집될 때부터 인쇄술이 발명되어 더 이상 변경될 수 없도록 고정될 때까지, 천사백 년이라는 세월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도 고찰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수사본(手寫本)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생긴 다양한 변형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신약성서 입문에 빠질 수 없는 셋째 사항은, 신약성서가 탄생하고 퍼져 나간 역사적, 종교적, 그리고 문화적 환경을 가능한 대로 자세히 서술하는 일이다.
입문서의 이 세 가지 주요 분야를 통상 경전 문제, 본문 문제, 그리고 신약성서 탄생의 배경 문제라고 부른다.
1. 신약성서 경전
‘경전’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카논(kanwjn)’이다. 이 용어는 히브리 말의 ‘카네(hn,q;)’처럼 본디 ‘갈대’를 뜻하는데, 히브리 말이 속한 셈족 말에서 유래하는 차용어일 가능성이 있다. 옛날에는 길게 뻗은 갈대가 길이를 재는 자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 낱말이 ‘자’를 뜻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척도, 기준, 표준, 규범’ 등의 의미도 가지게 된다. 성서는 그리스도교에서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되는 책이다. 그래서 4세기 중반부터 성서를 본격적으로 ‘카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한자말 ‘경전(經典)’은 우리 나라에서 통상 세 가지 뜻으로 풀이된다. 첫째는 변하지 않는 법식(法式)과 도리, 둘째는 성현들이 짓거나 그들의 언행을 적은 글이나 책, 셋째는 종교의 교리를 적은 책이다. 우리는 성서의 경전을 이 세 가지 뜻이 한꺼번에 다 담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렇게 경전에 속하는 책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생활에 규범으로 작용한다. 반면에 어떠한 책이 경전에 속하는지, 곧 성령의 감도로 저술되었는지는, 구약성서와 관련해서는 유다교가, 구약성서 및 신약성서와 관련해서는 그리스도교가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약성서 경전’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진 책들과 아울러 경전이 확정될 때까지의 과정도 뜻하게 된다. 그리고 토비트서·유딧서·바룩서·지혜서·집회서·마카베오 상하권처럼, 성령의 영감(靈感)으로 쓰였음을 유다교와 개신교에서 부정하는 책들은 ‘제2경전’, 아예 경전으로 채택되지 않은 책들은 ‘외경(外經)’이라고 부른다.1)
이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서 “율법과 예언서(= 구약성서)”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에 덧붙여, 거룩한 책들의 새로운 선집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또 제작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첫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 문제와 관련하여 최고의 권위를 행사하는 주체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하느님의 계시라는 인식 아래 거의 모든 부분을 인용하는 구약성서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매우 빠르게 퍼져나간 권위의 둘째 주체는, 일반적으로 “주님”이라고 불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표현은 전에 예수님께서 내리신 가르침(1고린 9,14),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부활하신 분의 권위를 가리킨다(2고린 10,8.18). 기준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이 두 주체 가운데에서 구약성서만 문서로 되어 있었다. 반면에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설교는 오랫동안 구두(口頭)로만 보존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사도들이 세상을 떠날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글로 적어 놓거나 그들이 편집한 것들을 안전하게 보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초창기에는 구두 전통의 권위가 문서에 비해 크게 우세한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 작품들에 부여된 권위가 문제로 떠오른다.
150년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거룩한 책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선집의 기본 골격을 향해 나아간 것 같다. 처음에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집회를 열고 바오로 사도의 서간 선집을 봉독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기존 (구약)성서의 보충판을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다. 단순히 여건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이다. 사실 바오로의 문헌들은 전반적으로, 복음서 전통이 구두로만 보존되어 내려오던 시기에 이미 저술되어 있었다. 게다가 바오로 자신이 자기의 서간들을 신도들이 모여서 읽을 뿐만 아니라 부근의 다른 공동체들도 돌려 가며 보도록 권장한다(1데살 5,27; 골로 4,16).
아무튼 2세기 초부터, 여러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바오로의 많은 서간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서간들이 매우 일찍 선집으로 만들어져, 빨리 그리고 널리 퍼져 나아갔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 이 사도가 신도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하였다는 사실이 틀림없이 이러한 움직임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바오로의 이 문헌이 권위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는 하였지만, 2세기 초 이전까지는(2베드 3,16 참조) 그것이 거룩한 문서로, 곧 성서에 비길 수 있는 권위를 지닌 문헌으로 여겨졌다는 말은 없다.
이 기간 내내, 복음서들의 위치는 바오로의 서간들처럼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초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의 작품에서 복음서들을 인용하거나 시사하는 글귀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그 저자들이 실제로 문서들을 눈앞에 펼쳐 놓고 인용하였는지, 말로만 전해지는 전통의 단편들을 머릿속으로 상기하면서 썼는지 추정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140년까지는 복음을 수록한 문헌들을 모아 놓은 것이 있다고 언급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작품들이 개별적으로 어떤 규범의 성격을 지니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2세기 후반에 와서야, 복음서들의 총서(叢書)가 존재하고 그 권위가 점진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증언들이 점점 분명하게 나타난다.
대략 150년부터 신약성서의 경전 형성에 결정적인 시대가 시작된다. 유스티노 순교자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집회 때 네 복음서를 봉독하고 이 복음서들을 사도들(또는 최소한 사도들과 직접 관련되는 사람들)의 작품으로 여기며 이 복음서들에 성서와 비슷한 권위를 부여하면서 인용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 문헌들이 그토록 큰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사도들에게서 유래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때까지 내려온 전통과 일치하는 “주님”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점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곧 이어서 이 작품들이 사도들과 직접 관련된다는 사실이 강조되기에 이른다. 특히 같은 유형의 문헌들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대부분 조잡한 모방이나 순전한 상상에 속하므로, 복음서들을 보호해야 할 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실 150년 직후, 교회 안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규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자, 네 복음서를 모아 놓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복음서들이 지니는 내적 자질과 “주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그 증언의 진실성 덕분에, 이미 모든 신도의 주의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관점을 지닌 이 네 복음서의 우월성이 너무나 명백하여 삽시간에 유사한 작품들을 모두 압도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170년경에는, 그 때까지 ‘카논(경전)’이라는 용어가 쓰이지는 않았지만, 네 복음서가 경전의 자리를 획득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은 개별적으로 경전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경전이 있다는 생각이 교회 안에 확고히 자리잡았을 때, 서간의 선집 전체가 경전 안으로 받아들여졌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미 복음서들의 권위를 확정하는 요인이 된 사도성(使徒性)이라는 개념이, 점진적이며 우연한 방식으로 선집의 꼴을 갖추어 가며 2세기의 여러 교회에서 폭넓게 권위가 인정된 바오로의 문헌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서의 새로운 경전에 관한 원칙이 생겨났음을, 그러나 그 원칙이 실제로 논의된 적은 한 번도 없음을 엿볼 수 있다. 경전은 일차적으로 교회 안에서 순식간에 보편화된 실재가 아니다. 나중에 구체적으로 어떤 문헌들이 경전에 포함되는지 상세히 밝혀야 할 때에 가서야 비로소 경전에 관한 신학적 숙고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움직임은 (160년에 사망한) 이단자 마르키온의 등장으로 촉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마르키온은 구약성서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자기 교회에 새로운 성서, 결과적으로 새로운 경전을 마련해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마르키온파(派)가 새로운 경전의 원칙을 퍼뜨리는 데에 일조를 한다. 그 원칙은 구약이 두 부분 곧 ‘율법과 예언서’로 구성되어 있듯이, 새 경전도 ‘복음서와 사도 문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2세기 말부터 새로운 성서 기준에 관한 생각이 교회 안에 굳게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먼저 어떤 문헌들이 새 경전에 들어가느냐 하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경전에 속하는 작품들의 최종 목록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사이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교회는 하나라는 의식이 점점 커진다. 그에 따라 경전에 관한 의견의 일치도 서서히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150년과 200년 사이에 사도행전이 점차 경전에 속하는 작품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2세기 말, 리옹의 이레네오는 이 작품을 성서로, 또 사도들에 관한 루가의 증언으로 여겨 직접 인용한다. 사실 사도행전은 무엇보다도 셋째 복음서와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그 후속편을 이루기 때문에 경전으로 받아들여진다. 2세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사도적 권위’라는 개념의 발달도 사도행전이 경전에 받아들여지는 데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작품은 경전이 된 뒤에 곧바로 서간집 전체에 필요한 입문서로 간주된다.
3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발전의 결과를 총괄적으로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디에서든지 네 복음서는 더 이상 논박되지 않고 확고 부동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이 시대부터는 복음서 경전이 이미 종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경전의 둘째 부분 곧 ‘사도 문헌’과 관련해서는, 성서로 인용되는 바오로의 열세 서간과 사도행전과 베드로의 첫째 편지를 도처에서 보게 된다. 요한의 첫째 편지와 관련해서도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최종적 경전이 이제 기본 형태 이상으로 꼴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 사실 한편에서는 이러한 일종의 내적 명료성 덕분에 온 교회에서 인정을 받는 작품들과 함께, 일부 교부들은 경전으로 인정하지만 다른 교부들은 유익한 문헌으로만 여기는 적지 않은 수의 ‘유동적’ 작품들도 보게 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야고보와 유다의 편지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와 동시에, 이 시대에는 통상 거룩한 책으로, 곧 경전에 속하는 것으로 인용되던 작품들이 그러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경전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있다. 「목자」라는 제목이 달린 헤르마스의 작품, 「디다케」, 「클레멘스의 첫째 편지」, 「바르나바스의 편지」, 「베드로의 묵시록」 등이 그러하다.
경전이 형성되어 가는 이 단계에서는 사도성(使徒性)의 기준이 상당히 보편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그래서 사도와 결부되지 못한 작품들은 조금씩, 그러다가 마침내는 모두 배제됨을 보게 된다. 3세기까지도 여전히 논의의 대상이 된 문헌들은, 바로 교회 여기저기에서 그 사도성과 관련하여 논쟁이 벌어진 것들이다. 논란이 가장 많았던 것이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묵시록이다. 서방 교회에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동방 교회에서는 묵시록의 경전성(經典性)이 오랫동안 강경하게 부정되었다. 요한의 둘째 편지와 셋째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유다의 편지도 서서히밖에 인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전의 형성은 4세기에 끝나는데 전과정을 세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렇게 종결된 경전은 대체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문헌들의 배열 순서만 여전히 불확실하였다. 아무튼 로마의 우위성(優位性)이 점점 뚜렷해지는 교회에서의 일치를 위한 배려가, 경전 형성의 여러 단계에서 드러나는 대립을 완화시키는 데에 작지 않은 공헌을 하게 된다.
2. 신약성서 외경
경전으로 인정을 받게 된 책들은 거룩한 문헌이 되었다. 그리고 경전으로 받아들여진 날부터 일종의 불가침성(不可侵性)을 누리게 되어, 인쇄 시대까지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왔다.
반면에 경전에 들지 못한 작품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물론 (「디다케」와 「바르나바스의 편지」 등처럼) 전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경전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보존이 잘 된 작품들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을 누리지 못한 작품들은 교회 생활에서 노골적으로 배척을 받아 쉽게 손상될 수 있었다. 이 문헌들이 오늘날 자취만 남게 된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구약 및 신약 성서의 경전을 둘러싸고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사이에는 용어의 차이가 있다(괄호 속 낱말은 그리스 말에서 유래하는 영어 명칭이다).
가톨릭 교회 개신교 경전/정경 경전/정경 제2경전 외경(Apocrypha) 외경(Apocrypha) 위경(Pseudepigrapha)
‘아포크리파(Apocrypha)’라는 말은 ‘감추어진 것, 숨겨진 것’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신약성서 외경’이라 함은, 신약성서 경전에 속하는 문헌들과 비슷한 면을 지니면서도 교회와는 다른 생각을 전파하는 것으로 판단된 일정 수의 작품들을 일컫는다. 이 작품들은 본디 일반 사람들에게는 통상 비밀로 되어 있거나 감추어져 있었다. 곧 자기들만이 참 진리나 영지(靈智)를 획득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분파’가 저희만을 위한 것으로 여기던 문헌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교회가 교리와 신앙의 바탕으로 삼기를 거부하고, 또 그 결과로 주일 전례에서 공적으로 낭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작품들을 ‘외경(Apocrypha)’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 책들은 나름대로 교화적(敎化的) 성격을 지니므로 특별한 경우에는 개인적인 독서가 권장되기도 하였지만, 공공 전례가 거행되는 동안에는 ‘숨겨져’ 있어야 했다. ‘외경(Apocrypha)’이라는 낱말은 바로 이러한 뜻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다가 경전이 확정될 때에는, 사실과 달리 사도들을 저자로 내세우는 작품들을 가리키게 되었다(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이 부류의 문헌들을 ‘그릇된 표제 또는 제목이 달린 것들’이라는 뜻을 지닌 Pseudepigrapha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 때부터 ‘아포크리파(Apocrypha)’라는 용어에 상당히 경멸적인 의미가 붙게 된다. 외경에 속하는 작품들은 오류를 전파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문학적 가치가 어떠하든 간에, 신약성서 외경들은 2세기와 3세기에 종교 사상이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연구하는 데에는 매우 값진 작품들이다.
경전에 속하는 문헌들을 분류하는 네 개의 범주에 따라 외경 문학도 대충 분류할 수 있다. 외경에도 복음서, 사도행전, 서간, 묵시록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가운데에서 몇 개만 언급해 보기로 한다.
「나자렛인들의 복음서」, 「히브리인들의 복음서」, 「이집트인들의 복음서」는 교부들의 인용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이를 바탕으로 판단할 때에 이 문헌들은 경전의 복음서와 매우 흡사하다. 19세기 말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베드로의 복음서」 단편은 이미 그노시스주의(主義)라고도 불리는 영지주의(靈智主義)의 흔적을 담고 있다. 이 사조(思潮)는 근래에 이집트에서 이루어진 발굴로 잘 알려진 작품들 속에 그 모습이 완전히 드러난다. 곧 「진리의 복음서」, 「필립보의 복음서」, 「토마의 복음서」 등이다. 이 가운데에서 「토마의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들과 많은 공통점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문헌들은 이야기 요소가 실질적으로 전혀 없기 때문에, 경전에 속하는 복음서들과는 매우 다르다. 「야고보의 원(原)복음서」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작품은, 예수님의 유년기에 관한 복음서 이야기를 더욱 발전시킨 형태를 제시하는데, 특히 마리아의 역사와 예수님의 탄생을 둘러싼 사건들에 관심이 많다.
외경의 사도행전들은 일반적으로 대중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작품인데, 경전의 사도행전에서는 거의 아무런 영감도 받지 않는다. 이 문헌들은 사도들의 생애를 영광스럽게 서술하려는 의도를 지니는데, 그 생애 가운데에서 특히 기적적인 요소들을 발전시킨다. 아무튼 「요한 사도 행전」, 「바오로 사도 행전」, 「안드레아 사도 행전」 등이 그러한 인상을 준다.
150년경에 쓰인 것으로, ‘편지’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묵시 문학의 유형에 속하는 「사도들의 편지」 외에는, 외경의 서간들에 대해서 말할 거리가 별로 없다. 이 작품들은 사실 경전의 서간들과 견줄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한다. 편지라기보다는 조그마한, 그것도 평범한 신학 논문에 더 가깝다.
외경 묵시록으로는 헤르마스의 「목자」 외에, 저승의 생활 및 천당과 지옥에 관한 추측을 펼치는 「베드로의 묵시록」, 2고린 12장에 나오는 유명한 환시, 곧 바오로가 삼층 하늘까지 들어올려졌다는 환시를 세세히 서술한다고 내세우는 「바오로의 묵시록」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작품은 경전에 속한 문헌들보다 후대의 것으로 왕왕히 이 문헌들의 모작(模作)일 뿐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옛 역사 전통을 하나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후대의 그리스도교 사상 역사와 관련해서 어떠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든, 신약성서만을 공부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3. 신약성서 본문
신약성서를 이루는 스물일곱 책의 본문은, 고대 번역본들과 교부들의 인용문까지 포함시킬 경우 여러 언어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도서관에 흩어져 보관되는 수많은 수사본의 형태로 우리에게까지 전해진다. 그 가운데 저자가 직접 쓴 원고(原稿)는 하나도 없다. 모두 옛날에 저자가 직접 쓰거나 그가 부르는 것을 곁에서 받아 적은 원고의 필사본 또는 필사본의 필사본일 따름이다. 신약성서의 작품들은 예외가 하나도 없이 모두 그리스 말로 쓰였다. 이 언어로 필사된 수사본이 오천 개 이상 된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 된 것들은 파피루스로, 나머지 것들은 양피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파피루스 수사본들은 온전한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모두 부분으로만, 그것도 때로는 작은 부분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신약성서 대부분 또는 전부를 담고 있는 가장 오래 된 수사본으로는, 4세기 것으로 판단되는 양피지 성서 두 권이 있다. 이 둘 가운데에서 높이 평가되는 수사본은, 바티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관계로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알려지지 않은 이 수사본은 불행히도 일부가 훼손되었다. 신약성서에서 잘려 나간 부분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9,14─13,25,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와 둘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묵시록이다. 시나이 산 기슭의 성 가타리나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하여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이라고 불리는 두 번째 수사본에는 신약성서가 모두 들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후대에 신약성서의 최종 경전에 들지 못한 「바르나바스의 편지」, 헤르마스의 「목자」 일부도 포함된다. 이 시나이 사본은 오늘날 런던의 영국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두 수사본은 ‘대문자’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글자체로 쓰여 있다. 그러나 이 둘은 3세기에서 10세기 또는 11세기 사이에 동일한 글자체나 비슷한 글자체로 작성된 250여 개의 양피지 수사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일 따름이다. 이것들은 대부분, 특히 가장 오래된 사본들은 신약성서 본문의 단편(斷片)으로만, 그것도 왕왕히 아주 작은 단편으로만 남아 있다.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온 신약성서의 필사본들은 모두 똑같지 않다. 갖가지 차이가 드러나는데, 그 중요성은 경우에 따라 달라지지만, 아무튼 그 수가 매우 많다. 일부는 문법적인 세부 사항, 어휘나 낱말 순서같이 소소한 것들이다. 그러나 때로는 단락 전체의 의미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있다.
이러한 상이점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쉽게 밝혀진다. 신약성서 본문은 수백 년에 걸쳐 능력에 차이가 있는 필경사들의 손에 필사되고 또 필사되어 왔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작업을 하면서 아무런 실수도 저지르지 않을 만큼 완벽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무리 공을 들이고 주의를 기울여도, 필사본과 ‘원본’이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가끔 일부 필경사들은, 자기가 옮겨 적는 수사본에 명백한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신학적으로 더 명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서는, 좋은 뜻으로 그것을 교정하려고 하였다는 사실도 덧붙여야 한다. 이렇게 하여 전혀 새로운, 그러나 대부분 잘못된 이문(異文)들이 본문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또 신약성서의 많은 구절이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사용되는 가운데 때로는, 전례적으로 더 아름답게 꾸미거나 구두 낭송을 쉽게 하려고 낱말들을 서로 조화시키는 쪽으로 본문이 서서히 변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성서 본문이 수백 년 동안 전승되면서, 필경사들이 끌어들인 변형(變形)들이 점점 더 덧붙여져 인쇄 시대까지 내려온 최종 본문은 여러 가지로 훼손되어 있었다. 달리 말하면, 이문(異文)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성서 본문의 상태가 이러하기 때문에 학문적인 작업이 필요한데, 이를 ‘본문 비평학(批評學)’이라고 부른다. 본문 비평학에서 추구하는 이상적 목표는, 서로 다른 이 모든 문헌을 바탕으로 원문(原文)에 가까울 확률이 가장 높은 본문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문 그 자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아야 한다.
본문 비평학의 첫 작업은 본문의 모든 증거를 살펴보는 일이다. 달리 말하면, 전부든 일부든 신약성서 본문을 담고 있는 모든 문헌을 조사하고 분류하는 일이다. 여기에서는 그리스 말 수사본들만이 아니라, 초기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던 언어로 쓰인 모든 신약성서 번역본도 함께 고려된다(주로 라틴 말, 시리아 말, 콥트 말 번역본들이다). 번역본들 가운데에는 바티칸 사본이나 시나이 사본 이전의 그리스 말 본문을 바탕으로 한 것들도 있다. 그래서 이 번역 성서들은 가장 오래 된 그리스 말 수사본들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것보다 더 옛날의 본문 상태를 보여 주기도 한다. 그리스 말 대본(臺本)을 얼마나 정확히 복원하느냐에 따라, 이 고대 번역본들이 신약성서 본문 복구에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하느냐가 결정된다.
본문 비평학은 그리스 말 수사본들과 고대 번역본들 외에도, 초대 교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신약성서 인용문도 유익하게 이용하려고 노력한다. 이 인용문들의 명백한 장점은 특히 가장 오래 된 번역본들이 전하는 것보다 (그리고 가장 오래 된 그리스 말 수사본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는 것보다) 더 이전의 본문 상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 이 인용문들이 언제,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밝혀 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로써 어느 시대에, 교회의 어떤 분야에서 신약성서 본문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는 편리한 방도가 생기는 셈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인용문들이 이중으로 불편한 점을 제시하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 인용구마다 성서 본문이 단편적으로만 인용된다. 둘째, 우리에게는 불행스러운 일로서, 대부분의 경우에 성서 본문을 직접 옮기지 않고 기억만으로, 그것도 별로 철저하지 않게 인용한다. 그래서 교부들이 전하는 내용을 언제나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다.
본문 비평학은 그리스 말 수사본, 고대 번역본, 교부들의 인용문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문헌을 조사하고 분석한 다음, 가능한 대로 원문에 더 가까이 가는 데에 유용히 이용할 수 있도록,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전망으로 자료들을 주의 깊게 고찰한 결과, 이 수많은 문헌이 매우 한정된 수의 큰 집단으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문헌들을 셋이나 네 ‘계통’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각 ‘계통’에 속하는 문헌들은 모두 동일한 대본(臺本)의 사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직 완결되지는 않았지만 괄목할 만한 경지에 다다른 이러한 작업의 결과로, 본문 비평학은 오늘날 상당 부분에 걸쳐 더 이상 수많은 개별적 문헌이 아니라 그것들의 집단에 바탕을 둘 수 있게 되었다. 이 집단들은 각자 생성 시기와 장소를 어느 정도 확정지을 수 있는 본문 형태를 대표한다.
본문 비평학이 밝혀 낸 주요 본문 형태는 다음과 같다.
- ‘안티오키아 본문’ 또는 ‘시리아 본문’ : 일반적으로 300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유래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으로 불린다. 대부분의 그리스 말 수사본, 특히 가장 후대의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이 매우 일찍 비잔틴 지방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본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비잔틴 본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본문은 문장을 유려하고 명확하게 꾸미려는 전형적인 노력을 드러낸다. 다소간의 병행구를2) 이루는 단락들은 서로 조화시키고, 같은 단락 내의 이문(異文)들은 합병시킨다. 본문 비평학상 이 본문의 자질은 빈약하다. 이 본문이 이렇게 후대에 생겨난 이문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신약성서가 인쇄될 때에는 이것이 채택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본문’이라는 뜻의 라틴 말 명칭) ‘textus receptus’로서 삼백 년 이상 표준 본문으로 인정을 받아 왔다.
- ‘알렉산드리아 본문’ 또는 ‘이집트 본문’ : 제반 사항이 이 본문의 생성지로 이집트를, 더 구체적으로는 의심의 여지 없이 알렉산드리아를 가리킨다. 이 본문의 주요 증거는 ‘바티칸 사본’과 이보다 그 증거의 정도가 조금 약한 ‘시나이 사본’이다. 이 본문은 늦어도 300년경부터 있어 왔다. 그리고 근래에 이루어진 여러 사본의 발견에 따르면, 적어도 복음서와 관련해서는 그 훨씬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이 본문을 더러 ‘중립 본문’이라고도 일컫는다.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개정한 결과로 생긴 본문 형태가 아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체적으로 이 본문에 높은 비평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 의견이 일치한다. 이 본문은 특별히 충실한 수사본 전통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학구적 세계에서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던 질 높은 본문의 복구 작업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후반부터는 그리스 말 신약성서가 흔히 이 본문 형태에 따라 출판된다. 그렇다고 이 형태가 항상 옳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서방 본문’ : 18세기부터 시작된 이 명칭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정확하지 않음이 밝혀졌다. 여러 고대 라틴 말 신약성서, 그리고 복음서들과 사도행전과 관련된 (6세기의?) ‘베자 사본’ 같은 일부 그리스-라틴 말 수사본들은, 이 본문 형태가 서방에 널리 퍼졌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일부 동방 번역본 그리고 많은 인용구와 고대 그리스 말 수사본의 단편들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 본문 형태가 동방에도 존재하였음이 분명하다. 기원과 통일성이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에 이 본문은 가장 오래 되고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입증되는 신약성서 형태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본문은 설명을 붙이고 상세히 이야기하고 주석을 달고 상이점들을 조화시키는 경향이 두드러져 주목을 끈다. 그래서 원문에서는 일반적으로 상당히 멀어졌지만, 때때로 그 곳의 오래 된 이문들 특히 짧은 이문들은 신약성서 본문을 연구하는 데에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수사본들의 이 ‘큰 계통들’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이 가장 두드러진 본문 형태들 사이에는 중간 형태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본문의 형태들을 하나씩 밝혀 내어, 번역본들과 인용문들과 때로는 고문서학이 드러내는 연대기적·지리적 자료를 바탕으로, 그 형태들이 언제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규명해 내는 이 본문 비평학적 방법론의 모든 관심의 대상을 살펴보려고 세부 사항으로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다. 아무튼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개개의 이문, 신약성서의 각 책, 그리고 신약성서 전체와 관련하여 대충이나마 본문의 역사를 그려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역사로써 어떤 형태들이 가장 오래 되고 또 가장 널리 증언되는지, 그래서 여타의 조건이 모두 같을 경우, 원문에 상응할 가능성이 가장 큰지 알게 된다.
본문 비평학의 이러한 첫 작업을 ‘외적 비평’이라고 하는데,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컨대 어떤 구절과 관련해서, 2세기 또는 3세기에 거의 비슷하게 퍼져 있던 두 개의 이문이 있는데, 이 둘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 수가 가끔 있기 때문이다. 이러할 경우에는 ‘내적 비평’ 작업으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이 내적 비평 작업은 더 이상 이문들을 신약성서 본문의 다양한 형태의 증거로 고려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개개의 이문은 필경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잘못 개입하여 생겨난 개별적인 경우로 고찰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내적 비평의 우선적인 목표는, 필경사가 어떤 식으로 개입하여 이문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의도로 개입하였는지 규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밝혀지고 나면, 이러한 이문들이 생겨난 원래의 본문을 비교적 수월하게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본문에 대한 학자들의 개인적 느낌, 그리고 필경사들의 습관 및 상습적인 실수에 대한 지식 등을 동시에 활용해야 하므로 주관적인 판단이 끼여들 여지가 많다. 이러한 주관성 때문에, 이 방법은 일반적으로 외적 비평을 보충하는 것으로만 이용된다.
아무튼 지난 150여 년 동안 신약성서 본문 비평학이 이루어 놓은 결과는 막대하다. 신약성서 본문은 이제 잘 확정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새로운 고대 문헌들이 발견되지 않는 한, 현재의 그리스 말 신약성서 본문은 심각하게 문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아주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는 현대의 그리스 말 신약성서 판(版)들과, 본문 비평의 원칙들이 엄격히 적용되기 이전인 1520년부터 1850년경까지 나온 판들을 비교해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가장 널리 퍼진 것은 네스틀레-알란트(Nestle-Aland) 판이다. 이것은 19세기 후반부 티쉔도르프(Tischendorf), 웨스트콧(Westcott)과 호르트(Hort), 그리고 봐이스(Weiss)가 펴낸 세 개의 현대적·과학적 판의 본문을 바탕으로 한다. 세계성서공회가 편찬하고 알란트(Barbara Aland와 Kurt Aland), 카라비도풀로스(J. Karavidopoulos), 마르티니(C.M.Martini), 멧즈거(B.M.Metzger)가 편집한 「그리스 말 신약성서」(Greek New Testament)는 위의 본문을 더욱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다. 우리의 번역본은 이 판을 대본으로 이용한다.
4. 신약성서의 세계
그리스도교는 역경에 찬 역사를 체험한 백성에게서 태어난다. 유다인들의 의식 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고통스러운 바빌론 유배 이후,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은 그럭저럭 팔레스티나 땅에 다시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약속의 땅을 복구하면서, 시대가 이제 변하였고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실 팔레스티나는 과거보다 더 이민족들의 관심의 표적이 된다. 그리고 전보다 더 외국적인 그래서 이교도적인 갖가지 사상으로부터 은근하고도 끈질지게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사상들은 어떻게 해서든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유다인들의 조상 전래의 전통들과 더욱 날카롭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르면서 유다교와 주변 세계의 대립은 점점 더 폭력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죽은 뒤, 팔레스티나는 이집트와 시리아 지방을 나누어 다스리게 된 그리스계 임금들에게 종속된다. 이들은 유다인들에 대해서 상당히 다양한 자세를 취한다. 어떤 때에는 매우 관대하고, 어떤 때에는 유다인들을 자기들의 그리스 세계로 동화시키려고 난폭하기 그지없는 시도를 벌이기까지 한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포악한 자가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임금이다(기원전 175-164년). 아무튼 이들은 유다인들에게 그리스계 종교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함으로써, 유다인들의 종교적 배타주의를 난폭하게 억누르려고 한다. 이러한 박해의 정점은 예루살렘 성전이 제우스 신에게 봉헌되는 사건이다. 마카베오서가 전하는 이 사건의 결과로, ‘하시딤’이라고도 불리는 신심 깊은 유다인들은 모두 수동적으로 저항을 하거나 아예 적극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들은 마침내 마카베오 형제들의 지휘 아래 군사적 봉기를 일으켜 정치적 · 종교적 독립을 어느 정도 회복한다. 그리고 이 상태는 약 백 년 동안 지속된다. 사실 마카베오 형제들의 조상 이름에서 유래하는 하스몬 왕조가, 로마 제국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까지 팔레스티나를 다스리게 된다. 그러다가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하스몬 왕가의 마지막 자손들 사이의 내분을 종결지으려고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로마 제국이 팔레스티나를 다스리던 시대의 초기에는 헤로데 왕조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대(大)헤로데가(마태 2,1) 가끔 공포 정치를 펴면서 기원전 40년에서 4년까지 다스린다. 잔인한데다가 다윗 혈통이 아니라 이두매아 출신이기 때문에, 대헤로데는 유다 백성에게 미움을 많이 받는다. 그가 죽자 세 아들이 왕국을 나누어 차지한다. 그 가운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루가 3,1) 페래아를 받아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다스린다. 바로 이자가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마르 6,17-29)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일정한 구실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루가 23,6-16). 유다와 사마리아를 차지한 아르켈라오와(마태 2,22) 페래아 이북의 영토를 차지한 필립보에(루가 3,1) 관해서는, 복음서 저자들이 그들의 이름만 전할 따름이다.
그러나 결정적 정치 권력은 언제나 로마 관리 곧 총독이 쥐고 있었다. 신약성서에는 이들 가운데 여러 명이 등장한다. 제5대 총독 본시오 빌라도는 기원후 27-37(또는 26-36)년에 난폭하게 직무를 수행한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포악한 안토니우스 펠릭스는 기원후 52-60년에 총독으로 재직하는데, 그의 관할 구역에서 내란이 일어난 것은 그 자신의 탓이 컸다. 바오로 사도는 가이사리아에 있던 이 펠릭스에게 호송되어 재판을 받는다(사도 23,23-24,26). 펠릭스의 후임자는 페스도인데(사도 25-26장), 바오로는 이 총독 앞에서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황제에게 상소한다(사도 25,11-12).
총독 통치는 헤로데 가문의 권력이 복구됨에 따라 잠시 중단되기도 한다. 이 때에 권좌에 오른 자가 대헤로데의 손자 아그리빠 1세이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이 아그리빠가 갓 태어난 교회를 처음으로 박해한 자이다(사도 12,1-23). 헤로데 가문 치하의 이 중간 시기(기원후 39-44년)에도 팔레스티나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 마지막 총독들이 다스릴 때에 정치적 혼란은 더욱 커지다가, 66년에는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난다. 이를 유다인들의 제1차 독립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 군대의 강경 진압으로, 마침내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됨으로써 독립의 꿈이 좌절된다. 성전이 허물어지자 유다인들은 더 이상 경신례(敬神禮)를 거행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의 정치적·종교적·민족적 체제가 역사상 최악의 환난 속에 빠져든다.
조그마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데카폴리스 지방의 펠라로 피신한 것은, 이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것 같다.
70년 이후, 유다교의 역사는 종교적·정치적·지리적 구심점을 잃은 채, 지난 수백 년 동안 근동을 뒤흔든 정치적 격동에 따라 지중해 변 전체,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페르시아까지 흩어져 사는 수백만 유다인들의 역사로 축소된다. 여기저기 흩어진 유다인들의 이 거류지 곧 ‘디아스포라’ 가운데에서 인구가 가장 많기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그리고 로마였다. 이 곳의 유다인들에게는 법적으로 특수한 신분이 인정되어, 저희끼리 모세의 율법에 바탕을 둔 종교적 · 민사적 행정을 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대중 속에 잠재해 있는 반(反)유다인 경향 때문에, 이들의 공동체를 사회 환경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러한 일을 폭력적으로 일으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종교적 · 문화적 삶은 회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회당은 전례 장소이면서 동시에 학교와 문화 공간의 기능을 수행하여, 거기에서 거행되는 전례는 근본적으로 기도, 그리고 토라 곧 율법의 봉독 및 설명으로 이루어졌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교(유다이즘)는 전능하시고 한 분뿐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과 절대적 규범인 토라의 존중에 바탕을 둔 동질의 사회적·종교적 조직이었다. 이 두 근본 요소에서 출발하는 유다인들의 사상은, 특히 종교 지도층의 폭넓은 관용을 누리며 매우 자유롭게 전개될 수 있었다.
유다인들의 삶은 율법을 통해서 비추는 하느님의 빛 속에 펼쳐진다. 유다인들에 따르면 율법은 하느님에게서 유래하는 것으로 완전하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문제에 적용할 수 있으려면, 설명과 해석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수백 년 동안 설명하고 해석해 온 노력의 결과로 구약성서의 ‘성문(成文) 율법’을 중심으로 이른바 ‘구두(口頭) 율법’이 발전하게 된다. 이 둘째 토라는 또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불리는데, 랍비들의 끊임없는 승계를 통해서 모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여겨졌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토라 해석가들이 “율법학자”라고 불린다. 예수님 시대에 이들은 대중 특히 중간 계층에 상당한 권위를 행사한다. 이들은 유다인들의 사회에서 신학자와 법학자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유다인들의 삶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기원후 3세기부터, 랍비들은 그 때까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온 율법학자들의 전통을 모두 글로 적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 방대한 작업은 미쉬나(= 율법의 반복, 곧 설명)를 만들어 내고, 이 미쉬나는 또 탈무드(= 가르침)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토라 곧 율법에 이어, 기원후 1세기 유다인들의 삶의 또 다른 구심점은 이론의 여지 없이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온 백성의 종교적·민족적 감정이 바로 이 곳으로 모아진다. 사실 유다인들은 성전을 세상의 중심으로, 하느님께서 종말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곳으로 생각하였다. 유다인 성인 남자는 모두 성전 유지를 위하여 해마다 ‘성전세’를 어김없이 내야 한다(마태 17,24와 각주 참조). 제의(祭儀)와 전례의 기능은 아론 집안의 후손 가운데에서 뽑힌 사제들이 수행한다. 사제들이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레위인들이 그들을 보조한다. 사제 계층 전체가 예루살렘의 이 성소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사제들은 대사제의 최고 권위 아래 엄격히 조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사제는 사제와 평신도 70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유다인들의 민사와 종교 문제를 다루는 최고의회(그리스 말로는 쉬네드리온, 아람 말로는 산헤드린)의 의장직도 맡는다.
이런 가운데 율법학자들과 사제 계층의 대표자들 사이에 반목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러나 이는 성전과 회당, 또는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사이에 팽배한 대립의 한 면일 따름이다. 이 두 큰 경향이 일반적으로 공적 유다교(또는 유다이즘)라고 불리는 현상을 구성한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들은 이미 자기들의 권위가 강력히 부인되는 현실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실 이들은 모든 관점에서 보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 통치를 하는 로마 제국의 것일지라도 질서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질서가 유지되어야 자기들의 녹봉(祿俸)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교도 식민 통치자들과 협력 또는 결탁한다는 혐의를 백성에게 많이 받는다. 아무튼 이들은 백성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상실하고 만다. 백성은 사두가이보다는 이들의 반대파인 바리사이들을 선호한다. 사두가이들과는 반대로, 바리사이들이야말로 애국자이고 주님과 율법에 충성스러운 사람이며, 또 마카베오 시대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거슬러 일어난 반란에 동참한 그 유명한 ‘하시딤’의 후예라고 여겼던 것이다. 기원후 70년에 성전이 파괴되자, 전적으로 성전에 종속되었던 사두가이들도 자연히 몰락하게 된다. 이 때부터 공적 유다교는 오로지 바리사이적 경향으로만 나타나게 된다.
예수님 시대에, 이 두 큰 ‘파벌’의 가장자리에는 여러 분파가 있었다.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그리스도교의 탄생 환경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흥미롭다.
통상 ‘열혈당’이라고 불리는 분파에 관해서는 부분적인데다 해석하기도 어려운 가르침만 전해진다. 이 당은 바리사이파의 극단적인 한 지류를 이루었던 것 같다. 여기에 속한 당원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폭력을 써서라도 사람들에게 율법 준수를 강요하기로 작심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더러 야비한 노상 강도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율법에서 직접 유래하지 않는 모든 형태의 권위에 완강히 반대하는 광신주의자였다. 이러한 이유로 열혈당원들은 중대한 율법 위반자, 특히 이교도 식민 통치자들의 협력자라고 판단되는 이들을 주저 없이 처형해 버렸다. 예수님, 그리고 바오로의 제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전에 이 열혈당과 관련이 있었을 수도 있다.
유다 사회의 주류에서 열혈당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20세기 중반에 사해 곁 쿰란에서 수사본들이 발견된 이후에는, 열혈당보다 더 잘 알려진 분파로 에세네파(派)가 있다. 여기에 소속된 이들은 대부분 수도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쿰란의 대수도원 밖에 거주하면서, 팔레스티나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수도 있다. 이 에세네파는 여타 유다인들의 권위, 특히 대사제직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매우 엄격한 유다인이면서도, 많은 이방 사상을 받아들여 자기들의 신학에 적응시켰다. 이들이 두 영(靈) 또는 두 권능의 근본적 대립을 바탕으로 매우 이원론적(二元論的)인 교리를 발전시키게 된 것은, 틀림없이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것이다. 하나는 ‘선’이요 다른 하나는 ‘악’인 이 두 존재는 세상 마지막 날까지 무자비한 전투를 벌이는데, 결국은 ‘빛의 제후’가 ‘암흑의 천사’를 완전히 쳐이기게 된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에세네파가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에세네파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어떠한 표지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라든가, 예수님 자신, 그리고 그분의 첫 제자들이 공식 유다교보다는 1세기 유다인들의 ‘분파적’ 세계의 영향권에 더 속하였음은 사실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분파적’ 세계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에세네파의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초의 그리스도교가 이 사상의 일부를 받아들여, 에세네적인 사고와 행동 방식이 예루살렘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적어도 한때 지배적이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에세네파는 반(反)로마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이들은 격동의 70년대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까지 몰고 간 일련의 사건들은, 로마 총독의 전제 통치에 시달린 유다 민중의 울분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말해 준다. 열혈당원들이 자기들의 목적에 널리 이용하기도 한 이 울분은, 팔레스티나에서 기원전 2세기부터 매우 발달한 모든 묵시록적 신앙의 원천에서 그 자양분을 얻기도 한다. 사실 거룩한 땅에 이교인들이 군림함에 따라 야기되는 도전을 하느님께서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받아들이시어, 이 지상에 당신의 나라를 경이롭게 세우시어, 정의, 그리고 동시에 당신께 선택된 이들의 특권을 복구시키시리라는 확신이 유다인들의 의식 속에 뿌리를 점점 더 깊이 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개입은 현 환난의 종식과 함께, ‘악’과 하느님에 대한 모든 불경이 사라진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재앙과 재난이 다시 창궐하여 하느님의 모든 적을 완전히 삼켜 버리는 것으로 예고된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믿음이 후기 유다교의 종말론을 이룬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에 유다인들이 품고 있던 종말론적 희망은, 일관성 있는 단일체를 이루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희망은 우선 체계화하기가 어렵고 쉽게 혼란을 일으키는 갖가지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 시대가 시작될 무렵, 이러한 생각들이 적어도 여러 특정 유다인 세계에서는 상당히 과격한 성향을 띠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불행이 너무나 커서, 역사적인 인간 메시아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의 존엄성을 언젠가 복구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더 이상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상태를 바꿀 수 있는 분으로서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게 된다. 거기에다 온 우주가 뒤집어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어야만, 유다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전환이 실현되리라고 본다. 이러한 종말론적 ‘각본’에서 메시아의 위치가 항상 특별히 중요하지는 않다. 묵시 문학 저자들이 이와 관련하여 이야기할 때, 더 이상 예전처럼 지상적 메시아, 야훼님의 ‘기름부음받은이’, 곧 다윗 가문 출신의 임금으로서 근본적으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직무를 맡아 하느님의 도움으로 민족의 해방과 번영을 보장하는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메시아는 점점 인간보다는 하느님과 더 결부된 초자연적 존재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향을 띠게 된다. 묵시 문학의 어떤 작품들에서는 메시아가 ‘사람의 아들(또는, 인자)’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다. 그러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인간과 아무런 접촉점이 없고 고통을 받을 리도 전혀 없는 천상적 존재로 나타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의 이러한 메시아 사상과 묵시록적 사고(思考)에서 자료들을 이어받아 자기들의 그리스도론을 정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동시대의 메시아 사상과 묵시 문학에서 ‘틀’을 가져오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그 ‘틀’을 전혀 새로운 내용으로 채우게 만든다.
5. 그리스-로마 세계에 관한 개요
그리스도교 시대가 시작될 때, 지중해 변과 근동은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이룩한 그리스계 제국을 이어받은 로마 제국의 세상이었다. 로마의 통괄 아래 동일한 지방 행정, 집단적·개인적 삶의 동일한 여건, 한 마디로 단일한 문명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통어는 계속 그리스 말이었다.
로마인들이 정복한 땅을 열거하기보다는 로마 제국의 지도를 한 번 펴 보는 것이, 그 광활한 영토를 더 잘 짐작하게 해 준다. 이 나라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제국으로서, 독립 운동을 진압하고 (게르마니아나 파르티아 같은) 야만족들의 공격을 물리쳐 그 세력을 점점 더 공고히 해 간다.
로마인들은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나서 그 영토를 여러 지위별로 재편성한다. 이집트는 황제의 개인 소유로서 부왕(副王)이 총독으로 파견된다. 이어 오래 된 왕국들로서 전통적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보호령들이 있고, 끝으로 속주(屬州)들이 있다. 속주들 가운데에서는 원로원 소속의 속주(예컨대 아시아 곧 소아시아의 서쪽 지방)와 제국 소속의 속주(예컨대 시리아)를 구분해야 한다. 이 속주에는 로마 군대가 계속 주둔하고, 황제 직속의 총독이 권한을 행사한다. 그리고 (유다처럼) 특수 성격으로 구분되는 지방들은 지방 장관 또는 총독이 다스린다.
이 권위적 체제는 각 지방에 (지방 의회처럼) 겉모습뿐인 자치만을 허용하면서도, 제국 내의 모든 사람에게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실제적인 평화를 보장해 준다. 특히 소아시아의 도시들이 그 덕을 많이 본다. 이 밖에, 도시들도 일정한 자유를 누리는데, 모든 시민이 속한 의회와 특히 귀족들의 평의회에서 관리한다. 동업 조합들도 지역 생활에서 큰 역할을 수행한다.
어느 한 도시의 시민이면서도 로마 시민권을 누릴 수가 있었다. 이 특권은 (바오로의 경우처럼) 부모에게서 물려받을 수도 있고, 비싼 값을 치르고 획득하거나 보상으로 부여받을 수도 있었다. 로마 시민은 수치스러운 체형(體刑)을 면제받고(사도 22,25-29) 황제에게 상소하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사도 25,10-12).
그리스도교 시대 직전부터 로마 황제를 신적 존재, 신의 아들, 마침내는 신으로까지 간주하기 시작한다. (이집트인이나 페르시아인 같은) 동방 민족들의 믿음에서 폭넓게 영향을 받은 이러한 과정은, 사실 로마 제국의 제반 여건에 논리적으로 잘 맞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인 제국 안에서 종교적 제의는 이 제국의 유일한 바탕 곧 황제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베스파시아누스는 죽은 황제들을 숭배하라고 종용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렇지만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는 자기들을 신으로 경배하게 내버려 둔다. 그러나 이 황제 숭배가 로마 제국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강요되지는 않는다. 황제는 다만 지방이나 도시나 동업 조합이 자기에 대한 열성으로, 감사의 정으로, 또는 단순히 아첨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신으로 섬기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황제 숭배가 번창하면서도(예컨대 에페소 시민들은 황제에게 여러 신전을 봉헌하였다.), 다른 종교 형태들과 완전히 공존할 수가 있었다. 대제관은 지방 관리 가운데에서 뽑혔다. 대제관직은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그 직함으로 큰 정치적 영향력이 보장되었다. 이런 식으로 종교와 행정이 밀접히 유착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박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곧 황제 숭배를 거부하면서 어떻게 훌륭한 시민이 되느냐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 가운데 여러 구절을 이러한 관점에서 읽으면,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난다. 곧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관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묵시록의 환시들에서도 가끔 이 긴박한 문제가 떠오른다.
일반 대중은 무엇보다도 자기들을 보호해 주고 일상의 걱정거리를 바로 곁에서 돌보아 준다고 믿는 가정(家庭) 신들에게 올리는 숭배에 애착을 갖는다. 그러나 황제 숭배와 함께 공공의 경신례(敬神禮)야말로 당시 종교의 본질적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 종교, 그것도 공식 종교가 일상 생활 전체에 깊숙이 스며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종교가 개인으로든, (가정, 씨족, 동업 조합, 도시 같은) 공동체나 사회의 일원으로든, 인생의 여러 단계에 깊은 표지를 남기게 된다. 모든 공공 의무에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경신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 종교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띤다(신들의 수도 대단히 많다). 그러나 그 경신례는 항상 의식(儀式)으로만 이루어진다. 신들을 공경하고 규정에 따라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이 종교에서 요구하는 신심이다.
의식에는 전례적 기도와 제물 봉헌이 포함된다. 기도는 먼저 신을 부르고 제사에 오도록 청하며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제물은 신에게 바치는 예물로서 음식이 주를 이룬다. 제물의 일부는 불에 태우고, 나머지는 해당 신전 소속 성직자나 신도들이 함께 먹기도 하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이들이 제사 음식을 먹는 데에 초대를 받거나 시장에서 제사 고기를 샀을 때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1고린 8장).
로마 제국에서는 사상뿐만 아니라 종족도 쉬 뒤섞이게 된다. 그리하여 동방에서 유래하는 비교적 덜 저속한 갖가지 종교도 널리 퍼질 수가 있었다.
종교적으로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고백하며 살게 된다. 곧 황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라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생활 전반을 관장하는 종교적 체계와 정면으로 충돌할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순종해야 할 분은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리고 이분을 숭배하는 것은 의식의 거행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봉헌하는 가운데, 이분께서 보여 주신 사랑에 따라 행동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바로 이분만이 영원한 생명을 보증해 주시는 분이시다.
---------------------- 1) 개신교에서는 주로 ‘정경(正經)’이라는 말을 쓴다.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크게 두 가지 뜻으로 이해된다. 첫째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 둘째는 올바른 유교의 경전이다. 개신교에서는 ‘올바른 그리스도교 경전’이라는 의미로 이 용어를 선택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그런데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경전에서는 올바름의 여부가 아니라, 경전에 속하느냐 않느냐, 경전으로 채택되느냐 않느냐가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다른 종교에서도 써 왔고(‘불교 경전’, ‘유교 경전’), ‘제2경전’으로 우리 귀에도 익은 ‘경전’이라는 용어를 쓴다(‘정경’을 쓸 때에는 ‘제2정경’보다는 ‘부경<副經>’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어울릴 것이다).
2) 앞으로 ‘병행구(竝行句)’라는 용어가 자주 쓰일 것이다. 이는 ‘공관 복음서(共觀 福音書) 병행구’의 준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가 복음서의 내용이 많은 경우 이 세 공관 복음서 모두 또는 두 복음서에 똑같이 또는 약간 다르게 나오는데, 이 공통된 구절을 ‘병행구’라고 일컫는 것이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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