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공관복음서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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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5,759 | 추천수0 | |
파일첨부 공관복음서_입문.hwp [1,493] | ||||
공관 복음서 입문
1. 한 복음과 여러 복음서
‘복음’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용어가 뜻하는 대로 구원의 ‘기쁜 소식’(마르 1,1 각주 참조),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의 선포를 뜻한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자기가 전하는 복음에 관하여 말할 때에 이해하는 바이기도 하다.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인격체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선포이다. 이러한 연유로 복음은 본디 책이 아니었다. 문학적 또는 역사적 작품이 아니었다(150년쯤에 와서야 유스티노가 처음으로 ‘복음’이라는 낱말로써 ‘복음서’를 가리키게 된다. 곧, 우리말에는 ‘복음’과 ‘복음서’라는 용어가 따로 있지만, 그리스 말을 비롯한 서양 언어들에서는 한 용어가 이 둘을 다 가리킨다). 그리고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이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네 책에 각각 ‘복음’이라는 제목이 달린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이야기에서도 그렇지만, 네 저자가 저마다 예수님의 말씀 및 행동과 이루는 고유한 관계 안에서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함을 뜻한다. 곧 서로 조금, 때로는 많이 다른 이 고유한 관계에 따라 네 개의 복음서가 나오게 된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정확성을 중시한다. 늘 확증되고 재확인되는 사실을 추구한다. 이러한 현대인에게 복음서 문학은 조리가 없어 보여 당혹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각 복음서의 줄거리에 연속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들 사이에도 적지 않은 모순들이 드러난다. 그러한 모순들을 극복할 방도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한 상태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찾아 내지 못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들이 복음과 관련된 더 고차원적인 문제들, 무엇보다도 먼저 그 문학 유형의 문제들로 이어진다면, 유익하게 작용할 수 있다.
모든 글은 처음부터 일정한 문학 유형에 따라 쓰여진다. 편지를 단편 소설처럼 쓰거나 시를 신문 기사처럼 쓰지는 않는다. 글을 접하는 이도 문학 유형에 따라 그것을 이해한다. 광고 문구를 보면서 신문 기사처럼 읽거나 시를 과학 논문처럼 대하지는 않는다. 문학 유형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형식과 어투, 논리와 목적을 지닌다.
복음 역시 고유한 문학 유형을 이룬다. 복음서들을 편집한 이들은 책상에 앉아 완전한 목록을 갖춘 문헌들을 가지고 나자렛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에까지 이르는 그분의 전역사를 기록하려고 했던 저술가가 아니다.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했던 방식은 그러한 것과 전혀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다.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사람들의 갖가지 병을 고쳐 주시며 여러 가지 뜻 깊은 행동을 하신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수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신다. 그리고 직접 예고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 예수님의 부활로 제자들은 이제 열렬한 설교가가 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과거에 하신 모든 언행을 새로운 ‘눈’과 ‘마음’, 곧 ‘파스카 신앙’으로 돌아보게 된다. 이 파스카 신앙 속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한다. 그리고 각 교회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분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그분께서 하신 여러 가지 일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여 약 사십 년 동안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여러 구전(口傳) 전통이 형성된다. 설교와 전례와 교리교수 등을 통하여, 이 전통들이 오늘날 우리가 복음서에서 보게 되는 모든 자료를 보존하고 전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자료들 가운데 일부가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미 글의 형태를 취하였을 수도 있다. 신앙 고백처럼 전례에서 이용된 고정 표현, 예수님의 여러 어록(語錄), 그리고 틀림없이 매우 일찍부터 명확한 구조를 지녔을 일련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수난사 등이 그 예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들은 초기 공동체들의 생생한 삶 속에서 이미 여러 가지 형태를 갖춘 이러한 전통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작업을 한다. 이 형태들은 ‘기쁜 소식’이 글로 완전히 고정되기 전에 이미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키우고 신도들을 가르치며, 갖가지 환경에 적응하면서 여러 교회의 필요에 응답하고 전례에 생기를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성서에 대한 새로운 숙고의 결과를 내놓고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오류들을 바로잡으며, 때로는 적대자들의 반론에 대답함으로써 활기찬 생명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복음서 저자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들을 이어받아 자기들의 고유한 관점에 따라서 기록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작업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생각하며 그 공동체를 위하여 복음서를 저술한다. 그들 역시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공동체를 가르치고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답을 제시하려고 애를 쓴다.1)
각 복음서 저자의 고유한 관점은 나중에 보기로 한다. 지금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서 전통과 형성의 역사에 관한 작업들이 이루어진 뒤로 더 이상 반론이 제기되지 않는 중요한 사실 하나만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복음서들이 여러 가지 특수한 세부 사항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초대 공동체들의 믿음과 삶을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여러 실례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전하는 본문을 들 수 있다. 최후의 만찬 이야기는 넷이 있다(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가 복음서, 고린토 1서). 이 넷은 결국 두 가지 원형으로 환원된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 내려오는 것, 그리고 루가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에 전승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점에서 서로 다른2) 이 두 원형은, 저마다 전례에서 이용됨에 따라 이미 고정된 전통적 양식을 그대로 글로 옮긴 본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바오로는 자기도 이어받은 것을 전할 뿐이다. 복음서 저자들 역시 예수님의 최후 만찬을 그 세세한 사항까지 이야기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예컨대 기자(記者)처럼 최후의 만찬 장면을 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이미 성찬례에서 되풀이되는 스승님의 행동과 말씀에 이야기를 집중시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이 하는 것과 비슷하게) 빵 또는 잔을 들고 찬미를 드리셨다는 양식(樣式), 곧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 본문은 팔레스티나 땅의 전례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감사를 드리셨다는(그리스 말로, 에우카리스테오) 양식, 곧 루가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의 말투는 헬레니즘 세계를 가리킨다.
본디 한 전통에서 출발하였다가 두 갈래로 갈라진 다른 예를 ‘주님의 기도’(마태 6,9-15; 루가 11,2-4), ‘행복 선언’(마태 5,3-12; 루가 6,20-26) 같은 데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복음서 저자들이 전해 받은 전통들의 성격, 그리고 각 복음서 저자의 특수한 생각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복음의 전통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었다는 것은, 왜 많은 구절이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정확한 짜임이나 순서 없이 예수님의 행동이나 말씀 한 가지에만 집중된 작은 문학 단위로 나타나는지도 설명해 준다(소제목이 달린 복음서의 단락들이 대체로 상당히 짧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자체만 가지고서는 명확하지 않은 도입 문구들이 이러한 단락들을 나타낸다. 예컨대 “그 무렵에”(직역은, “그 날들에”: 마태 3,1; 마르 8,1), “그 때에”(마태 11,25), “그 뒤에”(루가 10,1), 그리고 우리말에서는 통상 생략되는 “그런데”(루가 8,22; 9,18.37.51; 11,27) 등이다. 이 이야기들은 본디 저마다 독립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의 복음서에서 보는 배치는 때로 복음서 저자들 자신이 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세대들이 이러한 전통들을 이용하는 가운데, 기억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들이 상대적으로 고정된 문학 형식을 갖추게 된다. 그러한 것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어떤 말씀이 틀을 이루면서 그 말씀을 특정 상황 속에 배치시키는 일화들, 적대자들과 벌어지는 논쟁 장면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거나 기적을 일으키시는 장면 등을 이야기하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문학 유형들은 저마다 특수한 구조를 지니는데, 그러한 구조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복음서 속에 글로 고정되기 전에 각 공동체에서 나름대로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이 전통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전통들을 어떤 식으로 믿어야 하는가? 이 전통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역사를 이루었던 요소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러한 질문에, 이 전통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증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사람들이 신앙을 통해서 알아본 분이다. 복음서의 이 증언들은 다른 이들도 바로 이 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복음서는 설교이다. 그리고 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루가도 포함하여(루가 1,1-4 참조), 복음서 저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쁜 소식’의 증인이 되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이 전하는 것들의 (역사적) 실체에 복음서 저자들이 무관심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자구적 내용, 그리고 그분께서 하신 행동의 정황과 세부 사항을 정확히 재구성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3) 그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에 큰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이미 해석을 거친, 곧 이미 하나의 해설인 전통을 전한다. 그래서 복음서 본문들을 세밀히 연구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런 말씀들이나 저런 이야기들이 예수님의 사명 수행 역사를 가리키는 확고한 준거점(準據点)으로 드러난다.4) 이러한 준거점들을 설정하려고 시도하는 역사가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첫째, 복음서들의 모든 내용을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복음서 안에 흩어져 있는 많은 표지를 바탕으로 복음서 전통들을 거슬러 올라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나자렛 예수님의 역사적 삶과 행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둘째, 예수님 당시 팔레스티나 땅에서는 아람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복음서들은 그리스 말로 전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테면 ‘번역문’을 통해서만 예수님께서 하신 언행에 접근할 수가 있다. 이 ‘번역문’은 고대 전통들과 복음서 저자들의 편집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다. 본디 아람 말로 이루어진 것들을 그리스 말로 옮겨 적은 것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전승 현상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진 면일 따름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모국어로 말씀하셨음직한 것들을 다시 구성해 볼 수도 있다. 또 그분께서 어떠한 비유를 드시거나 어떠한 병을 고쳐 주신 정확한 상황을 다시 구성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세부 사항에 들어가면 크든 작든 개연성을 띨 수밖에 없다. 역사적 확증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 한계는 복음서들의 성격 자체에서 나온다. 예수님에 대한 기억은 단순히 객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기억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조명을 받는다. 그리고 이 신앙은 중립적으로 진술될 수 없다. 생생한 증언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증언에는 증인이나 이야기하는 이들 자신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비롯하여, 그들이 여기저기에서 되풀이하고 조정하고 손을 댄 것들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들의 기능과 그 효력은 여전히 독자들을 신앙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들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예컨대 복음서와 역사서를 혼동하는 고지식한 이해를 뛰어넘어 신약성서 자체의 전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연구를 깊이 해 나아가면서 설사 역사적 예수님께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여도,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그대로 남는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복음서들을 잘 봉독하고 특히 복음서 본문들을 서로 비교해 가며 봉독하는 독자는,5) 결코 소득 없이 불확실성 속에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처음에 예상하였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복음서들은 저마다 전통으로 내려오는 것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또 그것에 응답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지닌다. 이러한 요소들과 함께 복음서들은 독자에게,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확인하고 또 그것을 더욱 풍부히 하는 방도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의 예수님에게서 현재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흐름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준다.
2. 복음서들의 상호 관계
복음은 네 개의 소책자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것들을 한 번만 통독해 보아도, 넷째 복음서가 앞의 세 복음서와 연관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들과 구분되는 특징들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요한 복음서 입문 참조). 앞의 세 복음서는 요한 복음서보다 먼저 편집된 증언이다. 로마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이는 마르코 복음서는 65-70년쯤에 편집되었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는 그보다 15년에서 20년 뒤에 저술된다. 그런데 이 두 복음서가 집필된 주변 환경은 마르코 복음서와 같지 않다. 그리고 독자들도 서로 상당히 다르다. 그러면서도 이 세 복음서는 관점이 같다고 하여 ‘공관(共觀) 복음서’라고 불릴 만큼 비슷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한다. 이 명칭은 18세기 말에 ‘공관’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어떤 작품에서 유래한다. 이 작품에서는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가 복음서의 본문이 서로 비교하기 쉽게 세로로 세 단(段)에 나누어 배열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특수한 문제를 제기한다.
(1) 공관 복음서들의 문제
그 문제란 각 복음서에 이용된 자료들, 그 배열 순서, 그리고 표현과 관련된 유사점들과 상이점들을 말한다.
자료와 관련해서는 둘 또는 세 복음서에 공통된 절(節) 수를 대략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세 복음서에 공통된 절 수 - 330 개 마태오-마르코에 공통된 절 수 - 178 개 마르코-루가에 공통된 절 수 - 100 개 마태오-루가에 공통된 절 수 - 230 개 각 복음서에 고유한 절 수 마태오 - 330 개 / 마르코 - 53 개 / 루가 - 500 개
이렇게 서로 공통된 부분도 있지만 각 복음서마다 고유한 출처가 또 존재한다.
배열 순서와 관련해서는 구절들이 네 개의 큰 단락으로 모아져 있다.
가. 예수님의 공생활 준비 나. 갈릴래아 전도 다. 예루살렘 상경 라. 예루살렘 전도 및 수난과 부활
이러한 네 단락 안에서 마태오는 14장까지 자기의 고유한 순서에 따라 구절들을 배치한다. 그리고 14장부터는 마르코 복음서와 공통된 구절들을 마르코 복음서와 같은 순서에 따라 배열한다. 루가는 자기의 고유한 구절들을 마르코 복음서와 같은 단원(單元) 속에 삽입한다(루가 6,20─8,3 또는 9,51─18,14가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전체적인 일치 속에서도, 때로는 공통 구절 안에서까지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루가 복음서에서는 4,16-30에 나오는 나자렛 방문과 5,1-11에 나오는 제자들을 부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표현과 관련해서도 세 복음서 본문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죄를) 용서하다’라는 의미로는 드물게밖에 쓰이지 않는 그리스 말 ‘아피에나이’라는 동사가 마태 9,6과 마르 2,10과 루가 5,24에 똑같이 나온다. 그리고 마태 3,7ㄴ-10과 루가 3,7ㄴ-9에서는 63개의 낱말 가운데 두 개만 다르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체적으로 매우 유사한 구절들에서도 서로 다른 요소들이 불거져 나오기도 한다. 곧 구절의 구조는 고정되어 있는데 낱말들이 다르다거나, 낱말들은 같은데 구조가 서로 다르기도 하다는 것이다.
(2) 공관 복음서의 해석
이러한 공관 복음서의 문제는 유사성과 상이성을 함께 고려할 때에 해결된다.
몇몇 사항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한다. 우선 복음서들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두 가지 요인이 복음서 본문들의 현재 상태를 결정하였다. 첫째는 구두(口頭) 전통이든 문서 전통이든, 그 전통을 형성한 공동체의 역할이다. 둘째는 갖가지 전통들을 배열한 복음서 저자의 역할이다. 공관 복음서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가설이 있고, 그러한 가설들 안에 또 변형들이 있다. 그 변형들은 본질적으로 학자들이 공동체의 역할과 복음서 저자의 역할 가운데에서 어느 쪽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가에 달려 있다. 곧 복음서들 사이에 다른 점들이 저자의 편집 활동으로 완전히 설명되느냐, 아니면, 공관 복음서 이전 단계에서 이루어진 전통들의 접촉에서 해결점을 찾아야 하느냐이다.
공관 복음서의 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의견이 일치한다. 자료의 생략이나 첨가, 표현의 수정은 여러 편집자의 ‘의도’로써 다소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해석하는 데에는 임의(任意)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자료나 표현의 단계에서는 문제의 해결이 제시될 수 없다. 배열을 검토한 뒤에야 비로소 견실한 답을 내놓을 수 있다.
길게 이어지는 본문들 사이의 일치는, (구두 전승상의 종속성은 물론) 문학적 종속성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 종속성에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존하는) 직접 종속과 (공통된 출처에 의존하는) 간접 종속이 있다. 복음서들 사이의 불일치를 설명하는 데에, 어떤 학자들은 공관 복음서 이전 단계에 이루어진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하고, 다른 학자들은 편집자들의 역할을 중시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원칙을 확인하는 데에는 동의한다. 곧 마르코 복음서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둘째로,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는 서로 종속되지 않는다. 사실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는, 둘 가운데 하나가 마르코 복음서의 순서와 어긋나는 지점에서 서로 달라진다. 곧 두 복음서에 공통된 마르코 복음서의 순서를 벗어나 독자적인 자료를 이야기하게 되면,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도 자연히 서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에는 서로 공통된 구절들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저마다 마르코 복음서와만 공통된 절들이 있다(마태오 복음서 178개, 루가 복음서 100개).
마르코 복음서와 다른 두 공관 복음서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해석에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여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 그리고 루가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 사이의 접촉이 마르코 복음서에 대한 직접적인 종속의 형태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공관 복음서 이전의 공통 문헌에 대한 종속의 형태로 이루어졌는지가 문제이다. 오늘날에도 유지되는 두 가지 가설 형태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 일치성보다는 상이성을 더 강하게 느끼는 일부 학자들은 공관 복음서들 사이의 직접적 종속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여긴다.
ㄱ. 그 가운데 어떤 학자들은 다양한 출전(出典)을 제시한다. 곧 복음서 저자들은 크고 작은 모음들을 이용하였다는 설이다. 처음부터(아마도 교회의 설교를 위하여, 예수님의 기적들을 수집한 것이라든가 그분의 말씀들을 수집한 것과 같은) 사건과 말씀의 작은 선집(選集)들이 그러한 모음들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가 몇몇 사소한 것들에서는 마르코 복음서와 다르면서 자기들끼리는 일치하는 사실이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 두 복음서는 곧 마르코 복음서와 종속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또 편집 작업이나 다양한 신학적 전망에서 유래한다고 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복음서 내의 여러 변형도 이러한 설명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고 말한다.
ㄴ. 다른 학자들은 위 가설의 유연성을 충실히 보존하면서도, 공관 복음서 전통의 기원에는 개별적인 전통들 외에도 두 가지 큰 문헌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이 확인될 수 있다. 중심 부분(갈릴래아 전교: 마태 4,13-13,58과 병행구) 또는 이 중심 부분의 앞뒤 틀을 이루는 두 단락(마태 3,1-4,12와 병행구; 마태 14,1-24,51과 병행구)과 관련된 문제에 따라 복음서들의 배열 순서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두 단락을 지배하는 밀접한 일치는 세 복음서에 공통된 근본 문헌의 존재를 전제한다. 반대로 중심 부분(갈릴래아 전도)을 특징짓는 불일치는 전통들의 구성이 덜 진척된 상태를 드러낸다. 그래서 세 공관 복음서의 기원에는 개별적인 전통들 외에 두 가지 주요 문헌이 있다고 본다. 복음서 저자들이 이용할 당시에 이들 사이의 융합이 다소 진척되기는 하였지만, 하나는 구조가 이미 견고하게 짜여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유동적이었다는 것이다.
나.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가 두 개의 출전(出典)에서 나왔다는 이른바 ‘이출전설(二出典設)’을 지지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는 마르코 복음서에 직접적으로 종속된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와는 무관한 또 다른 공통 원천이 있다(이 원천은 독일 말의 Quelle에 따라 흔히 ‘Q-문헌’이라고 부른다). 각 복음서의 고유한 전통들 외에, 마르코 복음서와 이 Q-문헌이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의 주요 원천이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이 가설을 종합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서 공통 문헌(Q-문헌) ↓ ↘ ↙ ↓ 마태오의 고유 전통 → 마태오 복음서 루가 복음서 ← 루가의 고유 전통
오늘날 이 가설은 그것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보다 훨씬 복잡한 모습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 가설은 마태오와 루가의 편집 작업에 관한 연구를 용이하게 해 주는 큰 장점을 지닌다. 또 이로써 공관 복음서들에서 보게 되는 첨가나 생략 또는 위치 변경 등이 잘 설명된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에 공통된 Q-문헌이 이미 글로 정착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구전 원천이었는지,6) 또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에서 이용된 마르코 복음서의 본문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문인지 아니면 다른 본문인지 하는 문제에 학자들이 과감히 답을 내놓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 공관 복음서 문제를 다루는 데에 어떠한 비평적 가설을 채택한다 하더라도, 세밀한 작업만이 각 복음서 저자가 지닌 전망의 성격을 명확히 밝혀 낼 수 있다. 문학적 출처에 관한 연구가 공관 복음서들을 더욱 잘 이해하는 데에 유일한 방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어쩌면 가장 중요한 방도도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 문학이라는 독창적 현상 전체를 설명하려면, 출전, 구두 전승, 각 복음서가 태어난 공동체의 영향, 마지막 편집자들에 의한 다양한 자료들의 이용 등을 같이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공관 복음서 문제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것만으로도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가 복음서 각각의 입문에서 더 자세히 언급될 각 복음서 저자의 관점을 조금이라도 더 잘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1) 복음서 본문에 딸린 각주에서, 가능한 한도 안에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각 복음서 저자의 고유한 경향을 지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서를 해석하는 일은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다르다. 해석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번역 성서의 해석이 다른 해설서의 설명과 다르다 하여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2) 다른 점은 ‘찬미를 드리다.’와 ‘감사를 드리다.’, “내 몸이다.”와 “너희를 위하여 내주는 내 몸이다.”, “내 계약의 피이다.”와 “내 피로써 맺는 새 계약이다.” 등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 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분부의 말씀이 들어 있지 않다.
3)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는 예컨대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복음서마다 형식이 다른 ‘행복 선언’(마태 5,3-11과 병행구), ‘주님의 기도’(마태 6,9-15와 병행구), 그리고 성찬례 양식(마태 26,26-29와 병행구) 참조.
4) 이러한 말씀 가운데에서 예컨대 마르 1,15 참조.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이 선포는 그리스도교의 설교를 반영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 뒤에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부활을 선포한다. 마르 13,32 곧 “그 날과 그 시간”에 관한 말씀도 참조. 그리고 이야기들 가운데에서는 예컨대 마르 6,8-9 참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물질적 도움 없이 열두 제자를 맨몸으로 파견하신다. 이는 그리스도교 첫 세대가 수행한 장거리 선교가 아니라, 시간적으로나 장소적으로 매우 한정된 파견을 전제할 것이다.
5) 공관 복음서를 번역하는 이는 때로는 문장이 부드럽지 않게 되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복음서들의 병행 본문들 사이의 유사점들과 상이점들을 드러내려고 애를 쓴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혼자서 공관 복음서 본문들을 서로 비교해 볼 수 있게 된다.
6) 이 문헌에서 어휘의 50%만이 두 복음서에 공통된다. 그리고 23단락 가운데에서 13단락만 순서가 같다.
[출처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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