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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르코 복음서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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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3 조회수8,233 추천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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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서 입문

 

 

1. 순서와 주제

 

이 두 번째 복음서는 언뜻 보기에, 대체로 짧을 뿐만 아니라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별로 없는 이야기들만 나열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여러 가지 틀이 짜여져 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지리적 표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활동은 먼저 갈릴래아에서(1,4), 그리고 이교도들의 땅까지 포함하는 그 주변 지역에서 펼쳐진다(7,24.31; 8,27).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 동녘의 베레아 지방과 서녘의 예리고를 거쳐(10장),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11,1).

 

그렇다고 이 지리적 구조가 마르코 복음서의 내적 순서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몇몇 주제의 전개에 의해서 확정된다.

 

가. 복음

 

마르코 복음서는 그 첫마디에서부터, “하느님의 복음”(1,14), 더 짧게는 그냥 “복음”이라고도 불리는(1,15)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1,1) 주된 관심사임을 분명히 한다. 복음은 바오로 사도에게처럼 마르코에게도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느냐 않느냐에 따라,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당신의 약속을 실현시키셨음을 믿는(1,1 각주 참조) 그리스도교 신앙이 결정된다. 그래서 복음은 만민에게 선포되어야 한다(13,10; 14,9).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이 사명을 받는다. 이 사명에 따라 제자들이 처한 현실도 결정된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말씀을 과감히 이 새로운 상황에 적용시키기도 한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이 세상을 떠나신 이제, 자신을 포기하고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복음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8,35 둘째 각주; 10,29).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행위는, 제자들에게 맡겨진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에 존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이 말씀 곧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투신해야 한다. 복음은 바로 사람들 사이에 계속되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이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하느님의 메시지 이상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복음서를 저술하는 마르코가 서 있는 현주소이다. 그는 단순한 전기 작가가 아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현재에 서서 현재를 위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복음서 저자는 현재에서 출발하여 과거로 돌아가 현재의 “시작”을 이야기하고(1,1), 또 그러한 빛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을 조명하고 특징짓는다.

 

나.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리신 약속들은, 나자렛 예수님께서 가실 길을 여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로 실현되기 시작한다(1,2-8).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이라고 계시하신 예수님, 또 광야에서 사탄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이제 갈릴래아로 가시어 복음 선포를 개시하신다(1,14-15). 그 뒤를 이어 그야말로 극적인 사건들이 펼쳐진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는 이 사건들은 두 단계로 펼쳐진다.

 

(1) 악의 세력들을 무찌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의 힘을 많은 군중이 알아본다(1,21-45; 3,7-10 등).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은 비밀로 남아 있어야 한다(1,25; 3,12). 다른 한편으로, 모세의 율법만을 충실히 지키는 오만한 자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나설 뿐만 아니라(2-3,6), 마침내는 그분을 마귀 우두머리의 앞잡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3,22-30). 그러는 가운데 제자들과 군중이 확연히 구분된다(4,10.33-34). 그리고 “이게 어찌 된 일이냐?”라는(1,27) 무의식적인 질문이, 제자들에게서는 ‘도대체 이분이 누구이신가?’라는(4,41) 물음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대답한다(6,14-16; 8,27-28).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6,52; 8,14-21), 드디어 베드로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기에 이른다(8,29). 그러나 제자들도 이 사실에 관해서 침묵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는다(8,30).

 

(2)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을 기점으로 이제 새로운 가르침이 시작된다.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리라는 것이다(‘사람의 아들’에 관해서는 마태 8,20 각주 참조). 세 번에 걸쳐 되풀이되는 이 가르침은(8,31-33; 9,30`-32; 10,32-34),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적대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결로까지 독자들을 이끌어 간다(11-13장). 예수님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극적인 사건들은 이 예루살렘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 대단원의 첫 부분인 수난 때에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비밀도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당신께 사형을 선고한 최고의회에서 하신 선포와(14,61-62) 그분께서 돌아가실 때에 백인대장이 한 말이(15,39), 예수님의 세례와 거룩한 변모 때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시와 합쳐진다(1,11; 9,7).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책 첫머리의 칭호가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1,1과 각주). 그 동안에 적의가 담긴 경솔한 말을 지껄이는 마귀들과(1,24.34; 3,11)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라고 믿는 제자들은(8,29) 침묵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전에는 그 뜻이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수난 이야기가 이 복음서의 절정을 이룬다. 예수님의 수난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갈등으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이어지는 세 차례의 예고로, 그리고 이미 3,6에 나오는 말로 준비된 바 있다(“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수난은 그뿐만 아니라, 마르코가 전하는 예수님의 첫 공적 활동 때부터 제기된 질문(“이게 어찌 된 일이냐?”: 1,27)에 대답을 제시한다. 수난은 또 흔히 ‘메시아 비밀’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1,34 각주; 1,44 둘째 각주; 8,30 둘째 각주 참조) 이 복음서가 왜 그리 강조하는지도 이해하게 해 준다. 이러한 강조는 의심의 여지 없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실 적에는 부활하신 뒤에 받는 인정을 받지 못하셨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이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이 표현되는 예수님의 칭호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1,1; 3,11; 8,29). 그래서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굴욕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시어 진리가 인정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 생전에 “그리스도”나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칭호를 쓰는 것이 아직 일렀다는 점을, 그리고 이 칭호들이 유다인들에게도 이교도들에게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려고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 예수님과 제자들

 

마르코 복음서의 “시작” 부분부터 예수님께서는 혼자가 아니라, 당신께서 개시하신 일을 이어 갈 제자들과 함께 나타나신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네 어부를 부르신 일을 이미 그분의 갈릴래아 활동 초기에 배치한다(1,16-20).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처음부터 제자들을 불렀는지에 관한 그분의 활동 연대라든가, 아직 별다른 가르침이나 활동을 보이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부르신다고 제자들이 그렇게 무조건 따라 나섰겠느냐는 그들의 심리와 관련된 사실성에는 아무런 배려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아무튼 그 뒤로 스승께서는, 설교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신 때 외에는(6,7-30), 늘 그들을 동반하신다. 수난 때에 제자들이 달아난 다음에야 혼자 되신다. 그러나 이 복음서는 끝을 맺기 전에,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갈릴래아에서 다시 모이리라는 것을 두 번에 걸쳐 예고한다(14,28; 16,7). 이 밖에 복음서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부여된 위치에 따라 여러 단계가 구별된다.

 

(1) 예수님의 활동 초기에 나오는 세 장면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이가 점점 더 밀접해짐을 보여 준다. 곧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면서 네 사람을 부르신 일(1,16-20), 함께 생활하고 또 복음을 선포하라고 파견하시겠다면서 열두 사람을 선택하신 일(3,13-19), 끝으로 제자들을 직접 파견하신 일이다(6,7-13). 이 세 이야기는, 마치 말하는 이가 말을 이어 가기 위해서 어떤 시발점을 마련해 놓는 것처럼, 예수님의 활동 또는 그분께서 불러일으키시는 반응을 전체적으로 살피는 조망과 함께 이루어진다(1,14-15; 3,7-12; 6,14-16).

 

첫째 단락(1,16-3,6)에서는 제자들이 따로 하는 일 없이 그냥 예수님 곁에서 지낸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계율 준수와 관련하여 제자들의 태도가 비판을 불러일으킬 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나서시어 그들과의 연대성을 드러내신다(2,13-28). 둘째 단락(3,7-6,6)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친척들을 비롯하여(3,20-25) 그분께 반대하는 자들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또 특별한 가르침을 받고(4,10-25.33-34)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는 특권적인 증인이 됨으로써(4,35-5,43) 군중과도 구별된다. 이어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신 일이 셋째 단락(6,7-8,30)의 도입부 구실을 한다. 이 단락에서 열두 제자는 예수님께 파견을 받아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이제 ‘파견된 자’ 곧 ‘사도’로 등장한다(6,30). 그들은 또한 군중을 먹이라는 분부를 받는다(6,34-44; 8,6). 그러면서 자기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계시를 받기도 한다(6,45-52; 7,17-23). 그러나 이미 비유들과 관련하여 질책을 받은 바 있는(4,13) 제자들의 몰이해는 더욱 굳어진다(6,52; 7,18; 8,14-21). 그래서 이 단락 끝(8,22-26)에 나오는 눈먼 이를 고침이 제자들에게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8,22 앞의 소제목 각주 참조).

 

(2)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이후(8,27-30), 수난과 부활이 세 번에 걸쳐 예고될 때마다 그 예고는 제자들의 몰이해에 부닥친다. 그리하여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제자들의 개인적(8,34-38) 그리고 집단적 조건이 선포되기에 이른다(9,33-50; 10,35-45). 군중이나 제자가 아닌 다른 이들이 등장할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주로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시거나, 아니면 특별히 그들에게만 당신의 요구 사항을 설명하신다(9,28-29; 10,10-16; 10,23-31). 이 단락에서는 부단히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또 이 둘과 관련하여,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춤에서 약속된 영광으로 넘어감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의 운명에 참여시키시려는 데 반하여 제자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 이 단락 역시 나음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눈먼 이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10,46-52).

 

이어지는 두 단락(11-13장과 14-16장)은 예수님과 군중, 예수님과 그분의 적대자들, 그리고 예수님과 그분의 재판관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담도 자주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과 기도의 힘을 깨우쳐 주시고(11,20-25),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세를 갖추라고 경고하신다(13,1-37). 또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가운데에 일어나는 당신 죽음의 의미를 밝히시고(14,22-25), 그들이 당신을 버리리라는 것을 예고하시며(14,27-31),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타이르신다(14,37-40). 그러나 예수님께서 게쎄마니에서 잡히실 때에 제자들이 달아난 일과 베드로가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 일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름에 실패하였음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보다 앞서 갈릴래아로 가신다(14,28; 16,7).

 

마르코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믿는 데에 느리고 줄곧 이해하지 못하며 또 그리스도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계시가 진리로 드러나는 때에 무능하였다고 강조되는 것은, 사전에 깊이 생각해 낸 구상에 따른 것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복음의 계승자라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직접적으로 그들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부활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마르코에게는 예수님의 지상 생활이 그분을 실제적으로 드러내는 때이기는 하지만, 그분의 신원이 비밀로 부쳐져야 한다는 필요성과 제자들의 몰이해로 인하여 억제되고 제한된 시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몰이해가 또 역설적으로, 부활이 아니면 해독할 수 없는 예수님의 신비를 돋보이게 한다.

 

제자들의 몰이해는 또한 바로 그들처럼 하느님의 계시에 늘 늦게 반응을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전형을 드러내기도 한다. 십자가는 계속 걸림돌로 남는다. 복음이 선포되고 또 진리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신앙 고백의 말마디를 충실히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너머로 예수님을 따르는 진실한 삶이 요구된다. 예수님의 신비를 깨닫는 것은 제자의 조건을 천천히 그리고 어렵사리 깨우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마르코 복음서의 기원

 

이 두 번째 복음서를 쓴 이 역시 다른 복음서 저자들처럼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이 두 번째 복음서 저자의 이름을 처음으로 말한 이는, 기원후 150년경, 소아시아 지방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였던 파피아스이다. 곧 베드로가 로마에 있을 때에 그의 “통역”으로 일하였던 마르코라는 것이다. 같은 기원후 2세기의 이레네오 성인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가 순교한 다음에, 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 따르면 베드로가 살아 있을 때에 마르코 복음서가 저술된다. 이 마르코가 바로 사도 12,12에 나오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선교 여행을 할 때에 동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사도 12,25; 13,5.13; 15,37-39; 골로 4,10). 1베드 5,13에는 이 요한`-`마르코가 나중에 “바빌론” 곧 로마에 있는 베드로의 협조자가 된 것으로 나온다.

 

이 복음서가 기원후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고 난 다음에 로마에서 저술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리스 말식으로 된 몇몇 라틴 말, 라틴 말식의 여러 어법 등이 그러한 설명을 뒷받침할 수 있다. 적어도 유다인들의 관습을 설명하고(7,3-4; 14,12; 15,42), 아람 말을 쓸 경우에는 그것을 그리스 말로 번역하며 또 복음이 다른 민족들에게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노력은(7,27; 10,12; 11,17; 13,10), 이 책이 팔레스티나 밖에 사는 비(非)유다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네로의 박해로 충격을 받은 공동체 안에 일어난 특수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이 밖에도 성전이 파괴되리라고 예고되는데, 만일 이 복음서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과 성전이 실제로 파괴된 다음에 저술되었다면, 구체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이 그 예고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22,7)나 루가 복음서(21,20)와 달리,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그러한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두 번째 복음서의 저작 시기를 기원후 65년에서 70년 사이로 잡는 데에 별다른 지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의 “통역”이었다는 마르코가 저술한 이 복음서와 베드로의 가르침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문제는 더 까다롭다. 우선 마르코가 베드로의 “통역”이었다는 파피아스 주교의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복음서에서는 서술적인 세부 사항들이 제시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직접 사건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밖에도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베드로가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어떤 전통이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이 복음서에서 미화된다는 말은 아니다. 또 반대로, 그가 늘 좋은 역할만 하지는 않는데, 이 역시 그에 대한 어떤 논쟁의 표지가 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해서 마르코 복음서가 저술될 때에 이용된 사료의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는다. 이 사료에 관한 학자들의 생각은, 마태오 복음서 및 루가 복음서를 마르코 복음서와 비교하면서 서로 엇갈리게 된다. 한쪽에서는, 앞의 두 복음서가 편집될 때에 마르코 복음서가 자료로 이용되었다는 의미에서 이 복음서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다른 쪽에서는, 지금은 소실되고 없지만 마르코 복음서가 저술되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에 관한 전통을 나름대로 정리한 첫 문헌이 있었다고 전제하기도 한다. 

 

복음서는 어느 날 갑자기 저술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큰 전통의 흐름 가운데 한 단계로서, 그 전통의 일부를 글로 고정시킨 것이다. 모든 사항을 고려할 때에, 마르코 복음서 이전에 이미 형성된 전통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의 생애 또는 그분의 가르침 전체를 온전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분의 언행이 모아져 전승되었다. 처음에는 여러 일화가 엮어진 형태로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제시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가파르나움 활동’(1,21-38)이라든가 ‘적대자들과의 논쟁’(2-3,6)과 같이, 활동 장소라든가 주제에 따른 자료들의 단순 결집이 상당히 일찍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러한 것들이 마르코가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사용한 사료 가운데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하는 문제가 또 하나 있다. 곧 이 복음서가 본디 어떻게 끝났느냐는 문제이다. 현재의 끝맺음인 16,9`-20이 복음서 저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나중에 덧붙여졌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복음서가 16,8절과 함께 너무나 갑작스럽게 끝나 버리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이 16,9`-20으로 보충하였다는 것이다(16,9 각주 참조). 그러나 이 책의 원맺음말이 소실되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8절로 끝났는지, 곧 마르코가 독자들에게 이미 알려진 갈릴래아 발현의 전통을 참조하라는 말로써 자기의 이야기를 충분히 끝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명백히 알 수 있는 방도가 없다.

 

 

3. 마르코 복음서의 중요성

 

마르코 복음서는 네 복음서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저술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복음서’라고 불리는 문학 유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첫 본보기이다. 복음서들이 교회 안에서 사용될 때에, 흔히 마르코 복음서보다 나중에 저술되고 또 분량이 더 많은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가 선호되곤 하였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에 이루어진 성서의 문학 연구와 역사 연구로, 마르코 복음서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더 이상 마르코 복음서의 순서만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전기를 구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매끄럽지 못한 문장, 꾸밈없는 서술, 많은 셈족 말식 표현, 그리고 신학적 숙고를 하는 데에서 드러나는 미숙함 등은, 이 복음서에서 사용된 자료들이 옛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거기에서 언급되는 장소들은 매우 오래 된 전통에서 유래한다. 또 예수님의 가르침, 하느님의 나라가 곧 도래한다고 강조하는 것, 비유, 논쟁, 더러운 영을 쫓아 내는 일 등이 벌어지는 역사적 상황은, 팔레스티나에서 사신 예수님의 생애 안에서만 기원될 수 있다. 물론 이 복음서가 회상하는 것들이 개인적인 기억에서 직접 유래하지는 않는다. 먼저 첫 제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이 증언이 복음 선포, 교리 교육, 이교도들과의 논쟁, 또는 교회 전례 등, 여러 상황에 알맞은 형태로 구성되어 사용되었고, 이렇게 사용되던 자료들이 복음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마르코의 공로는, 팔레스티나 밖으로 퍼져 나간 교회의 생활, 그리고 여러 이교 문화와의 접촉으로 자극을 받아 이루어지는 신학적인 숙고가, 복음의 원천과 직접적인 접촉을 상실할 위험이 있는 시점에서, 교회의 전통을 글로 고정시킨 데에 있다. 그리고 그는 파란만장하고 난해한 한 존재의 모습을 지워지지 않도록 생생하게 보존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이신가?’(4,41). 예수님이라는 이 존재는 누구이신가? 이 물음에 대해서 마르코는 그분의 첫 증인들, 곧 첫 신앙인들의 답변을 들려 준다. 그러나 이 복음서를 읽는 이가 그들의 답변을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마르코는 독자들에게도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신앙은 타협 없는 투신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가운데에, 또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위하여 일하는 가운데에 체험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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