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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베드로 1서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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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3 조회수4,640 추천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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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1서 입문

 

 

베드로 1서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신학자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한다. 이 서간이 교리를 깊이 있게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며, 신약성서 전체와 관련하여 특징적인 가르침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의 사제단” 또는 ‘왕적 사제직’과 관련되고(2,9), 또 그리스도께서 “감옥” 또는 ‘저승’에서 하셨다는 설교가 언급되는(3,19) 글로만 간주되어 왔다. 서간의 나머지 부분은 공관 복음서, 사도행전의 설교, 바오로 사도의 도덕적 훈계와 비슷하다는 사실이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다양한 문헌들과 베드로 1서가 신약성서라는 이름으로 한 곳으로 모아진다는 사실은, 사도 시대에 이루어진 교리교수에 대하여, 그리고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근본적인 면에 관하여 우리가 배울 점이 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많은 주석가들이 이러한 사실을 확신한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이 서간의 연구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다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 수신인

 

이 서간에는 수신인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단서가 별로 들어 있지 않다. 우선, 이 베드로 1서는 소아시아에 있는 다섯 개의 로마 속주 또는 지방의 신자들, 곧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다(1,1). “흩어져”라는 말은 “디아스포라에서”를 뜻하는데, 이 그리스 말은 본디 팔레스티나 땅 밖에 사는 유다인들과 관련하여 쓰이던 전문 용어이다. 그래서 언뜻 볼 때, 이 서간의 수신인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낱말이 대부분 이교 출신으로 세상(2,11 참조) 이곳 저곳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고자 상징적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이들의 옛 생활 방식을 시사하는 글들은, 이들이 유다인이라기보다는 이교를 신봉하던 비유다계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더 잘 들어맞는다(1,14.18; 4,3). 그렇지만 이들 역시 성서 곧 구약성서와 이미 상당히 친숙해져 있다. 이 서간에서 구약성서가 자주 이용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베드로 1서의 수신 공동체들은 대부분 바오로의 선교 활동으로 설립되었다. 여기에는 바오로가 직접 가서 교회를 설립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협력자들이 세운 지역들도 포함된다. 바오로가 어떤 중심지에서 활동할 때, 그의 협력자들이 주변 고장으로도 가서 교회를 세우곤 하였던 것이다(골로사이에 복음을 선포한 에바프라가 한 예이다: 골로 1,17). 이 수신 공동체들의 교회 직무는 사목 서간(디모테오 1·2서와 디도서)에서보다 아직 체계가 덜 잡혀 있고, 초대 교회 생활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옛 시절의 생활을 반영한다. 교회의 직무 수행자 가운데에서 “원로들”만 언급되고(5,1-4), “봉사자”들은(사도 6,2-4 참조) 간접적으로만 시사될 뿐이다(4,11 각주 참조). 수신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회적 신분은, 하인 또는 노예의 처신에 관하여 특별히 자세하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2,18-25) 전반적으로 낮았을 것이다.

 

 

2. 필자와 저술 시기

 

서간 자체에 따르면,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인데(1,1), 교회 “원로”이며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다(5,1). 그는 “실바노”에게 이 서신을 받아 쓰게 한다(5,12). 그 때에 그의 “아들” 마르코도 곁에 있었다(5,13). 베드로 사도가 이 서간의 필자임은 교회 전통에서도 확인된다. 신약성서 가운데에서 가장 후대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베드로 2서도 이 사실을 증언한다(2베드 3,1). 나중에 이레네오와 테르툴리아누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같은 교부들도 베드로 사도가 이 서간의 필자라고 말한다.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2세기 초엽에 파피아스가 베드로 사도와 둘째 복음서의 저자인 마르코의 관계가 밀접하였다고 밝히는데(5,13), 이러한 사실도 이 서간을 베드로의 작품으로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사도 12,12도 참조).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베드로가 이 서간의 필자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제기하는 주된 논거는 다음과 같다. 그러한 논거에 대하여 제시할 수 있는 반론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가. 이 서간의 그리스 말은 갈릴래아의 어부였던 베드로가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훌륭하다(사도 4,13 참조). 베드로가 아람 말로 이 서간을 쓴 다음, 예컨대 실바노와 같은 사람에게(5,12) 그리스 말로 번역을 시켰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실 이 경우, 왜 아람 말 또는 히브리 말 성서를 번역하지 않고 예외 없이 칠십인역에 따라 구약성서를 인용하였느냐는 사실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 그러나 이 논거는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최근에 발견된 문서들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에서도 그리스 말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리스 말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다른 한편, 베드로는 서신을 쓰면서 그리스 말을 모국어로 하는 실바노의 도움을 받았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베드로 1서의 문체가 빼어나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다.

 

나. 베드로 1서의 몇몇 생각과 바오로의 신학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는 점도 베드로의 친저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실로 지적된다. 몇 가지 예만 들면 다음과 같다. 곧 구약성서에서 유래하는 걸림돌의 표상(1베드 2,4-8과 로마 9,32-33), 국가 권력에 복종하라는 권고(1베드 2,13-17과 로마 13,1-7),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바오로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1베드 3,16; 5,10.14) 등이다. 그런데 바오로가 베드로의 “위선”을 비난하였다고 말하는 갈라 2,11-14 같은 구절은, 바오로의 사상이 베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베드로 1서와 바오로 계열의 문헌이 비슷한 점들을 보여 준다는 사실은, 초창기 교회 전체에 공통된 교리교수 자료가 있었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 자료를 베드로도 사용하고 바오로도 사용하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갈라 2,11-14가 안티오키아에서 벌어졌다고 전하는 일화는 정확히 말해서, 이 두 사도 사이의 신학적 대립을 뜻하지는 않는다. 바오로가 베드로를 비난한 것은 베드로의 신학 때문이 아니라 그가 특정 상황에서 보여 준 처신 때문이다.

 

다. 베드로 1서는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과 달리, 필자가 예수님을 생전에 직접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다. 필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이야기한다. 게다가 그는 예컨대 “하느님의 나라”나 “사람의 아들”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가르침의 핵심 개념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그토록 가까웠던 제자인 베드로가 과연 이런 식으로 예수님에 관하여 글을 쓸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베드로가 이 서간의 필자라면 스승님 바로 곁에서 겪은 체험을 더욱 생생히 또 자세히 말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친저성을 반대하는 이러한 논거에 대하여, 이 서간에 들어 있는 일련의 구절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반영한다고 응답할 수 있다. 곧 1,8과 요한 20,29; 2,2와 마르 10,15 및 병행구; 2,12와 마태 5,16; 2,23과 마태 5,39; 3,9와 루가 6,28; 3,14와 마태 5,10; 5,3과 요한 13,15-17 등이다(2,25와 마태 9,36도 참조). 게다가 이 서신의 여러 가지 말이 베드로와 직접 관련된 맥락에서 유래한다(예컨대 5,2와 요한 21,15-17; 1,4.13과 루가 12,33.35.41). 이와 관련하여 ‘고난받는 종’의 주제가 특별한 관심을 끈다. 이사야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주제는(이사 52, 13-53,12), 복음서와(루가 22,37과 이사 53,12) 베드로의 설교만이 아니라(사도 3,13.26. 그리고 사도 4,27.30도 참조), 이 서간에도 나온다(2,21-25). 물론 이러한 비교나 유사성의 의미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매우 일찍부터 예수님의 어록 같은 것들이 교회 안에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어쨌든 위와 같은 사실은, 지상 생활 중의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점을 바탕으로 한 논거가 반론의 여지를 많이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라. 일부 주석가들은 베드로 1서가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로마 제국 전체에 걸쳐 일어난 첫 번째 공식 박해를 시사한다고 본다. 이 박해를 81년에서 96년까지 다스린 도미티아누스 황제 이전으로는 잡을 수 없는데, 이 때는 베드로 사도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상당한 기간이 흐른 뒤라는 것이다(4,12와 5,9).- 그러나 이러한 견해도 이론의 여지가 많다. 무엇보다도 먼저, 베드로 1서에 반영된 자세는 국가를 분명하게 박해자로 서술하는 묵시록의 자세와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묵시록의 이와 같은 면을, 로마서와 똑같이 국가 권력을 존중할 것을 가르치고(1베드 2,13-17과 로마 13,1-7) 또 국가 권력의 긍정적인 역할을 말하는 이 서간에서는(2,14)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다 베드로 1서에서는 박해는 물론 고소나 고발, 법정이나 재판을 뜻하는 전문 용어가 아니라 신학적 어휘만 쓰인다는 사실을 덧붙이기도 한다. 곧 시련, 그리고 의로움을 위하여 불의하게 겪는 고난 등이다. 그래서 이 서간이 시사하는 바는 공식 박해보다는 비판과 비방, 배척과 근거 없는 밀고나 학대 등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적대 행위는 그리스도인들이 애초부터 이교 출신 동포들이나 옛날에 같은 종교를 믿었던 동료들에게서 받아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서간의 집필 시기를 상대적으로 일찍 곧 베드로가 살아 있던 때로 잡는 데에 별다른 장애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베드로가 이 서간의 필자일 수 없다는 논거들은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필자와 집필 시기에 관한 전통적인 견해가 전혀 맞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곧 네로 황제의 박해가(64년) 있기 조금 전, 베드로가 실바노에게 신자들을 격려하는 회람 서신을 집필하도록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라든가 그리스도교 발전에 관한 여러 연구 결과는, 베드로가 순교한 얼마 뒤인 70-80년으로 집필 시기를 잡는 가설의 개연성을 더 높이 평가하게 한다. 곧 “바빌론”으로 상징되는(5,13) 로마의 어떤 제자가 사도의 전통을 생생히 보존하고 이곳 저곳 흩어져 있는 여러 공동체의 신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사도의 이름으로 이 격려 서한을 집필하였다는 것이다.

 

 

3. 문학 유형과 단일성과 목적

 

여러 주석가들은 특별히 이 서간의 처음 세 장에서 세례가 시사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4,12에서부터 서간의 분위기가 바뀜을 감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곧 신자들이 겪는 고난이 이제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4,12; 5,9. 그리고 2,20; 3,14.17 참조).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이 서간의 문학 유형과 단일성에 관한 여러 가지 가설이 제기된다. 그러면서 특히 이 서신이 전례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어떤 학자들은, 이 서간이 본디 세례 전례를 거행할 때의 설교를 기록한 것인데(1,3-4,11), 나중에 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려는 글(4,12-5,14)이 덧붙여졌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1,3-4,11과 4,12-5, 11 사이의 차이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이들에 따르면, 1,3-5,11이 원래 세례 때의 설교인데 추후에 1,1-2와 5,12-14가 덧붙여져 서신의 성격을 갖추게 된다. 또 다른 이들은 이 서간이 부활 주간 전례를 반영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가설들은 여러 가지 반론에 부닥친다. 이 서간이 전체적으로 어휘와 문체의 단일성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유래하는 두 개의 단락이 합쳐졌다는 견해가 별로 신빙성이 없음을 밝혀 준다. 서두의 인사와 끝인사도 서간의 본문과 명백한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다(“나그네”라는 주요 낱말이 1,1과 2,11에도 나오고<1,17도 참조>, 서간의 주제인 격려가 5,12와 2,11에서도 되풀이된다). 게다가 감사의 말(1,3-9)과 그리스도교 도덕 ‘규범’(2,13-3,7)은, 베드로 1서가 처음부터 서신으로 구상되었다는 확신을 더욱 굳게 해 준다. 서신을 쓴 이와 그것을 받는 이들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는 필자가 전체 교회에서 권위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자기가 서간을 보내는 공동체들은 직접 세우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에 이해가 간다. 4,12에서부터 볼 수 있는 분위기 또는 전망의 변화는 그 의미를 너무 과장해서는 안 된다. 고난은 이미 1,6에서부터 실제 상황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서간의 본문을 가지고 세례 전례 또는 세례 강론을 재구성하려는 매우 다양한 시도는 거꾸로 그러한 가설의 매우 불확실한 성격을 드러낸다. 여기에 두 가지 사실을 덧붙일 수 있다. 첫째, 베드로 1서에서는 (로마 6,3-4; 골로 2,12; 디도 3,5와 같은 본문과는 반대로) 세례 의식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예형론적인 의미를 지닌 단락에서 단 한 번 나올 뿐이다(3,21). 둘째, 이 서신의 본문에서는 세례 의식의 여러 단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어떤 진행의 흔적이 전혀 없다(1,23에서 세례를 통한 새로운 탄생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 동사 역시 이미 1,3에서 쓰인다; 1,3 둘째 각주 참조).

 

이렇게 볼 때, 베드로 1서가 서한의 성격과 함께 단일성을 지녔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서간은 초창기 교회에 공통된 교리교수의 전통 속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끝인사(5,12)가 이 서신의 목적을 정확히 밝힌다. 곧 열성이 식어 가고 그에 따라 갖가지 환난으로 시련을 겪으면서 용기를 잃을 위험이 있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또 세례를 받을 때에 이미 들은 가르침을 바탕으로 삼는다.

 

 

4. 내용

 

이 서간에서 어떤 논리적인 구상은 볼 수 없다. 이는 권고와 권고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려는 교리적 요소들이 줄곧 뒤섞여 나오는 이 문헌의 특수한 성격에서 유래한다. 전반적으로 명령형의 권고가 먼저 나오고, 이 권고를 뒷받침하는 교리 선포의 서술문이 그 뒤를 잇는다(이는 바오로의 주요 서간과는 반대되는 현상이다. 바오로의 서간에서는 먼저 교리 부분이 나오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지니고 있는 것들을 가리키는 서술형이 주로 쓰인다. 이어서 교훈 부분이 나오는데, 이 둘째 단락에서는 신자들에게 이미 받은 것에 합당한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권고하는 명령형이 주로 쓰인다). 그러나 신자들에 대한 위협의 현실성이 4,12에서부터 구체화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권고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인정할 수도 있다.

 

베드로 1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인사: 1,1-2

 

가. 희망에 대한 감사: 1,3-12. 에페 1,3-14와 비슷하게 유다교의 찬양 문체로 펼쳐지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는 구원 계획의 계시에 대한 숙고로 이어진다.

 

나. 첫째 권고: 1,13-2,10. 이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옛 생활 방식을 이제 완전히 끊어 버리라고 촉구한다.

 

    - 1,13-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으니 희망을 가지고 거룩히 살아가라는 권면

    - 1,22-2,3: 신자 생활과 관련된 몇 가지 권고

    - 2,4-10: 교리적 근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기초이신 영적 성전의 한 부분이 되라고 신자들을 선택하셨는데, 이 선택의 목적은 신자들이 자기들을 빛으로 불러 주신 하느님의 업적을 널리 선포하는 데에 있다.

 

다. 둘째 권고: 2,11-3,12.

 

    - 2,11-12: 이교인들 사이에서 취해야 하는 일반적인 처신

    - 2,13-17.18-25; 3,1-7: 여러 가지 상황에 따른 신자들의 의무. 국가 권력에 대한 의무, 주인에 대한 종의 의무, 부부 사이의 의무.

    - 3,8-12: 형제적 사랑의 재촉구

 

라. 셋째 권고: 3,13-4,11

 

    - 3,13-17: 적대적인 세상 앞에서 신자들이 지녀야 하는 확신

    - 3,18-22: 이 확신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

    - 4,1-6: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본보기의 실천적 결론인 죄와의 단절

    - 4,7-11: 종말과 공동체 생활

 

마. 넷째 권고: 4,12-19. 임박한 박해에 따른 권면

 

바. 특수 권고: 5,1-11

 

    - 5,1-4: 공동체 지도자들의 의무

    - 5,5-11: 겸손과 깨어 있음

 

끝인사: 5,12-14

 

 

5. 베드로 1서에 따른 신자 생활

 

베드로 1서가 전하는 내용의 특수한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 왔다. 이 서간이 목표로 삼는 상황이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고려하기만 하면, 그 가치가 뚜렷이 드러난다. 필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신앙의 기초를 놓는 일이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수신인들이 이미 배워서 알고 있다(1,12). 그의 관심사는 신자 공동체들이 겪고 있는 대로 점점 커져 가는 난관 앞에서, 자기들에게 선포된 희망에 의지하여 꿋꿋이 견디어 가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필자는 신자들의 시선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간다. 그분 안에 있는 새 생명의 힘을 다시 깨달으라는 것이다(1,3; 2,2). 필자는 더 나아가서, 신자들이 받은 희망은 결국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그 근본 성격을 강조한다. 이 희망이야말로 나날이 이어지는 삶에서 끈기와 기쁨으로 펼치는 활동의 근원이다.

 

가. 그리스도의 업적에 뿌리내리기

 

필자는 서간의 수신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선택을 받고 그분 백성의 일원이 되었음을 확신한다(1,2-3; 2,9). 이제 그는 이 신자들을 이끌어 자기들의 스승께서 이루신 업적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만들려고 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희생과(1,2; 1,19) 그분의 고난을 상기시키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2,21-24). 그들도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게 하려는 것이다(2,21). 그리스도의 승리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 승리는 우주의 모든 영역에 걸쳐 두루 퍼져 있다(3,18-22). 죽음까지도 이러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4,6. 그리고 3,19 참조). 신자들은 이제 모퉁잇돌이신 분, 공동체의 든든한 기초가 되시는 분과 결합해서 살아가야 한다(2,4-8).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 1서의 그리스도론이 바오로의 것보다는 사도행전 앞부분(특히 베드로의 강론)에 제시되는 그리스도론에 더 가깝다는 사실도 지적해 둔다(위에서 언급된 ‘고통받는 종’의 주제도 마찬가지이다. 세례의 역할에 관해서는 사도 2,38-40과 1베드 3,21 참조. 그리고 사도 2,31과 1베드 3,18도 참조). 아울러서 이 서간에는 예컨대 2,22-24; 3,22; 4,5에서처럼 여러 가지 신앙 고백이나 공동체의 찬미가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나. 생생한 희망

 

희망이라는 주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이 서간의 시작부터 명백하게 드러난다(1,3.13.21). 이 희망은 그 기원과 목표와 결과라는 삼중의 관점에서 고찰된다. 기원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이 희망은 인간의 상상이나 지적 노력이 가져다 준 열매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거저 베풀어 주신 은총이다(1,3). 1,21이나 3,21 같은 곳을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떠한 면에서 구원의 실현과 관련되는지 잘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지향하는 목표는 앞으로 올 하느님의 나라, 신자들에게 보장된 불멸의 상속 재산이다. 곧 믿음이 직접 봄으로 바뀌고 하느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된 구원을 충만히 또 궁극적으로 누리게 되는 순간이다(1,4.7. 13). 이러한 희망이 신자들의 구체적 삶에 가져다 주는 결과는 그리스 스토아 학파의 자세 또는 수동적 체념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이를테면 새로운 행동의 원동력이다(1,13-15). 신자들은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련 속에서도(4,12-13) 기쁨과 함께 투쟁해 나아갈 수 있다(1,6).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희망에 대하여 끊임없이 이의와 의문을 제기한다. 믿는 이들은 조용하지만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3,15-16).

 

다. 일상 속에 펼쳐 가는 증거의 삶

 

베드로 1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하는 사명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선택하신다. 그 목적은 그들이 당신을 섬기고 당신께서 이루신 일들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이 서간에서는 선택이라는 주제가 신자들의 사제직이라는 주제와 함께 짝을 이루어 등장하게 된다(2,5.9. 그리고 로마 12,1 참조).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하느님을 위한 봉사는 먼저 교회 안에서 실행된다(1,22; 2,1-5; 3,8-12; 4,7-11; 5,1-7). 원로들은 공동체가 형제애를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특수한 책임을 수행한다(5,1-4). 그러나 이 밖에도 신자 개개인이 정치와 사회와 가정 생활의 다양한 면과 관련된 온갖 의무를 지닌다(2,11-3,7). 이러한 관점에서 주어지는 지침은 당시의 일반 문헌이라든가 유다교에서도 볼 수 있는 도덕적 규범과 흡사하다. 그러나 서간의 지침은 주님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2,13), 또 가장 비천한 이들까지 도외시하는 일 없이 개개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새로운 방향과 새로운 내용을 얻게 된다. 베드로 1서는 신약성서의 다른 문서들처럼, 당시의 사회 구조에서 이론의 여지가 많은 부분들을 직접 문제삼지는 않는다. 이 서간 역시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음은 명백하다. 그러면서도 주어진 한계 안에서 신자들이 따라야 하는 노선을 제시한다. 곧 주님의 사랑과 그분에 대한 사랑 속에서 희망의 복음을 선포하고, 이러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인간 조건의 내적 변화를 통하여 기존의 사회 생활이 변혁되도록 일조를 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서간은 이교 세계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러한 세계에 대한 하느님 백성의 책임을 강조한다. 어떠한 경우에든, 가혹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도, 신자들은 이교인들에게 바른길을 가르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2,11-12; 3,13-17).

 

베드로 1서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생생한 희망”이(1,3) 내포한 바를 상기시킨다. 모든 악을 쳐 이기신 그리스도를 사랑과 신뢰의 마음으로 따르고, 그분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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