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삶의 의미를 찾은 니고데모(니코데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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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3 | 조회수4,498 | 추천수0 | |
신약성서의 인물 : 삶의 의미를 찾은 니고데모
요즘 많이 들리는 소리 중 하나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의 중심을 갖지 못한 채 방황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방황의 근본적 원인은 급격한 신자유주의 사상과 극심한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해 자기 지평을 알 수 없도록 만들고 있으며, 삶의 참된 가치를 퇴색시키고 있다. 물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방황과 혼돈의 상황은 변하지 않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어둠으로 머물지 않고 빛을 기다리기에 참된 삶의 가치는 끊임없이 시대 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는 말씀 속에서 희망의 이정표를 갖도록 한다. 우리는 참된 가치를 찾는다는 것, 즉 참 진리를 느끼며, 참 사람의 모습을 살고픈 마음을 가진 니고데모를 통해 우리의 삶의 이정표를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하겠다.
우리 주위를 한 번 돌아보면 자신이 과연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이것저것에 흔들리며 살아간다. 또한 이들은 그 무엇인가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며, 어려움에 부딪쳐는 때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쉽게 좌절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무엇을 체험함으로써 삶의 전환의 계기를 갖는다. 그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어떤 체험을 통해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깨달으며 비로소 자기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특히 종교적 체험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 과거에 얽매어 놓았던 모든 껍데기를 벗어버리도록 하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니고데모는 요한 복음에서 세 번 나오는 인물이다(요한 31-21; 7,45-52; 19,38-42). 처음 그의 등장은 밤에 예수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분을 찾아가는 인물로 묘사된다(요한 3,1-21). 그는 예루살렘의 명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영향력이 있는 바리사아파 사람이었으며, 예루살렘의 최고 의결기관이며 법정이었던 산헤드린의 한 유대인들의 의회의원이었다. 니고데모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참된 삶의 가치 즉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라는 끊임없는 구도자의 모습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밤중에 예수를 찾아갔다. 이는 그가 다른 바리사이들을 두려워서 밤중에 몰래 예수를 만났다기 보다 조용한 시간에 진지하게 삶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찾아갔을 것이다.
놀라운 일은 니고데모가 나이도 자기 보다 훨씬 적고 율법을 체계적으로 공부도 하지 않은 예수를 처음 만나자마자 '랍비'(선생님)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니고데모가 젊은 예수에게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붙었다는 것은 마음 안에 그려왔던 동경의 인물이었기에 스스럼없이 예의를 갖추어 불렀던 것이다. 어떤 때 우리는 별 볼일 없는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허깨비 같은 지위나 명예로 인해 많은 이들을 비하시키거나 오만한 모습으로 대하며 살아간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모르겠다.
한 사람이 예수의 등장으로 그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흔들리게 된다. 니고데모가 지금까지 확고부동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3,3)라는 예수의 말씀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그에게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3,4)라고 예수께 반문을 하였다. 그의 반문은 진리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한 매달림이었기에 스승께 대한 제자로서의 겸손된 질문이었다.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다.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있다. 그런데 그 생활 속에서 기쁨보다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한 모습에서 무언가 다시 매달리고 픈 마음이 있다. 그 무엇이란 즐거움, 일상에서의 도피, 어디론가 떠나고 픈 마음이 일 수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기에 결국 진리에 대한 매달림을 통해 참된 자기를 찾고자 한다. 니고데모는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확실히 진리를 붙잡으려 하였다.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끊임없이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께 계속해서 질문하면서 진지한 모습으로 니고데모의 배움의 자세는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예수는 니고데모에서 새로운 진리인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3,5)라고 말씀하신다. 니고데모는 예수의 이 말씀으로 인해 거듭나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하였다. 그에게 있어 생각이나 일상의 활동이 단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의 힘을 통해 거듭나는 삶의 모습은 이제 혼자라는 외로운 모습에서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결정적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의 일에 관한 최고 회의에서 당당하게 예수를 위해 변호를 하였고(7장), 돌아가신 예수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19장). 그는 처음 예수와의 대면을 통해 얻었던 삶의 의미를 찾았기에 가슴속에 자신의 모든 삶을 그 분에게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늘 바쁘게 생활하고 있지만, 삶의 의미가 생활 안에 없다면 맥이 빠지고 공허한 모습일 수 없다. 그런데 니고데모를 보면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도 젊은 예수를 통해 성령 안에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감으로서 삶의 의미를 분명하게 가졌다. 우리도 이제 거듭나는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겠다. 그래야 우리가 바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인천가톨릭대학교 김일회 신부님께서 신학교 홈페이지 성서신학 자료실에 올려주신 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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