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하느님께 올바른 기도를 한 세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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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3 | 조회수4,512 | 추천수1 | |
[성서의 인물] 하느님께 올바른 기도를 한 세리
어느 날 세리는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갔다. 늘 그렇지만 그에게 성전에 들어가는 건 큰 고통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이 멸시하며 마치 벌레 보듯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이 너무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늘은 용기를 내어 성전에 오게 된 것은 며칠 전부터 마음이 너무 불안하고 답답했기 때문이다. 간신히 눈치를 보며 성전을 기웃거리는데 어떤 사람이 자신을 흘깃 쳐다보며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낯이 익은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다.
바리사이파라는 말은 "분리된 사람"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교의 종교적 당파 중 하나로 불경건한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일반인과는 구별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생을 철저히 율법 중심적으로 살고 있다. 그들에게 율법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죄인들, 특히 세리 같은 사람을 무척 경멸했다. 바리사이파인들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성전에 들어간 바리사이파 사람은 큰 소리로 마치 세리더러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기도를 했다.
"하느님 아버지 저를 특별히 보살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저는 하느님 말씀대로 탐욕스럽지도 않고, 부정한 행위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저 구석에서 뻔뻔스럽게 기도하는 저 세리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수입 중에 십일조를 꼬박 꼬박 헌금했습니다. 저를 특별히 보살펴 주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기도를 하면서 자기 자랑을 엄청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마치 기도가 무슨 유세를 하는 것으로 착각을 갖게 할 정도였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의롭게 되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느님을 계약을 충실히 지키면 복을 내리고 아니면 벌을 주는 분으로 믿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행동은 본받되 마음은 본받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의 위선을 질책하셨다. 위선이란 단순히 행동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종교적 행위만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왜곡된 신앙에서 비롯되는 종교적 행위를 언급한 것이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실제로는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자선, 기도, 단식 등과 같은 종교적 행위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하여 하기 때문에 비뚤어진 행위가 되기가 쉽다. 예수시대 종교 지도자였던 율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사람들을 하느님께 순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예속시킴으로써 하느님의 권위를 빼앗는 결과를 초래했다. 율법은 어떻게 보면 유대사회의 기득권 층의 권리와 자리를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잘못된 가르침은 특히, 십일조와 같은 율법의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저버리는 데서 가장 잘 드러난다.
예수는 이처럼 위선적인 율사와 바리사이들을 두고 눈먼 길잡이들이라고 공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허위를 진실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모르며, 자신들만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영혼의 장님들이요, 귀머거리들이었다.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대변자며 의롭다고 생각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이 사랑의 존재임에는 눈을 뜨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실 자신만이 열심히 생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데 인색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죄인인 세리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기도했다. 그는 성전 안에서의 다른 이들의 시선도 따갑고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죄스럽다.
"하느님 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어느 것 하나 부끄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세리는 아무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세리는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하느님께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오직 자비만을 빌었다.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세리는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아니 분명하지는 않더라도 세리는 어렴풋이나마 죄 많은 자아를 깨닫고 겸손하게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느님 앞에서 크고 작은 죄인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죄스러움을 아는 것이다. 신비스럽게도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될 때 하느님의 존재에도 눈뜰 수 있게 된다. 인간적인 판단가 하느님의 판단은 다를 때가 많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입법자가 아니라 바로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예수님도 비유의 말씀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열심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죄인인 세리였다."
[평화신문, 2001년 11월 4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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