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동물] 성서 동물의 세계: 어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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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3 | 조회수4,170 | 추천수0 | |
파일첨부 성서동물_어강.hwp [312] | ||||
척추동물문(脊椎動物門 : Vertebrata)
성서 동물의 세계 : 어강(魚綱 : Pisces)
히브리인은 동물을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땅의 생물, 즉 수(水), 공(空), 육(陸)의 3계로 나눠서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이 그 모두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창세 1,26).
“하느님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지어내셨다”(창세1,21).
이집트인의 생활은 물고기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강물을 칠 터인데 그러면 이 강물이 피가 될 것입니다. 강의 고기는 죽고, 물에서는 썩는 냄새가 나서 에집트인들은 강물을 마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출애 7,17-18. 시편 105,29 참조).
이집트에는 목장으로 적합한 광야가 없어 목축업이 성하지 못했으며 국민의 주식(主食)은 곡물이었다. 나일강이 범람하면 지류나 연못 할 것 없이 온통 물바다가 되고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나일강의 범람은 옥토를 조성할 뿐 아니라, 어류를 전국에 분포하게 했다.
“큰 물줄기의 물이 말라 강바닥은 드러나 갈라지고 개천에서 썩는 냄새가 풍기며 에집트 땅 개울마다 물이 줄어 바닥이 나리니 갈대와 왕골은 시들고 강가의 풀은 마르리라. 강가의 심은 곡식도 모조리 말라 바람에 날려 자취도 없이 사라지리라. 고기잡이들도 탄식하리니 강에 낚시를 던지는 자들이 모두 슬퍼하고 물에 그물을 치는 자들이 낙담하리라.”(이사 19,5-8).
에집트에 대한 경고의 이 예언은 그 나라 백성들이 나일강을 중심으로 어업에 종사해 온 생활상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이집트는 역사상 어느 시대에나 어류가 풍부했다. 식료품 중에서 가장 싼 것이 어류였다. 그래서 이집트의 가난한 사람들은 곡물 값이 어류 값처럼 싸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에집트에서는 공짜로 먹던 생선,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이 눈앞에 선한데” (민수 11,5).
식료품 중에서 `생선‘이 맨 앞에 나오며 `공짜로’라는 말은 `마음 내키는 대로‘의 뜻일 것이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림은 받았으나 배는 곯지는 않았었다 왜냐하면 풍부한 생선과 야채가 있었기 때문이다.
생선을 잡는 방법에는 어디서나 대체로 세 가지가 있었다. 가장 단순하고 또 오래 전부터 해 온 것은 어차(魚?)이다. 즉 길다란 막대기 끝에 쇠창을 달아 물고기를 찔러 잡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산란기에 강을 따라 올라온 연어는 주로 이 작살로 잡는데 이것은 6-7천년 전부터 조상들이 해온 어로법이다. 다만 먼 옛날에는 작살의 끝이 쇠붙이 대신 돌로 되어 있었다. 석기시대에 사람들은 돌칼을 막대기 끝에 고착시켜 물고기를 잡았던 것이다. 청새치 작살, 다랑어 작살, 고래 작살 등이 다 그것이다. 이것은 어로의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라고 하겠다. 욥기40,31에 “너는 그 살가죽에 창을, 머리에 작살을 꽂을 수 있느냐? 손바닥으로 만져만 보아라.”는 말씀이 있는데 작살이 보인다. 팔레스타인에서 오늘날 이런 작살을 사용하는 것은 개천이나 레바논 부근의 강이라고 한다.
두 번째 어로 방법은 낚시이다. 낚시줄과 낚시바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낚시대는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가 있다. 에집트나 앗시리아의 옛 그림에 보면 낚싯대가 있기도 하고 낚시줄만 있기도 한다. 그리고 낚시대는 비교적 짧고 낚시줄은 굵은 편이다. 낚시줄에 대한 기사는 성경에 한 군데만 언급되어 있다. “누가 저 베헤못을 눈으로 흘리며 저 코에 낚시를 걸 수 있느냐? 너는 낚시로 레비아단을 낚을 수 있느냐? 그 혀를 끈으로 맬 수 있느냐? 코에 줄을 꿰고 턱을 갈고리로 꿸 수 있느냐? (욥기40,24-26).
낚시바늘에는 미끼를 달았다. 미끼를 달지 않은 제물낚시는 훨씬 후에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 제물낚시는 깃털로 모기 모양으로 만든 낚시바늘에 의해 미끼 없이 낚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맨 처음의 낚시바늘은 돌로 만들었다고 고증하지만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짐승의 뼈로 낚시바늘을 만들었다는 말은 신빙성이 있다. 낚시가 일반화된 것은 철기 시대 이후일 것이다.
작살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조상들은 활로 짐승과 새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잡았을 것이다. 그런 동적인 어로 행위에 비하면 낚시는 매우 정적(靜的)이다.
세 번째가 그물이다. `낚시로 잡고 그물로 잡지 않는다‘(論語)는 공자의 말에는 언제나 여유 있게 사는 성인의 심정이 담겨 있지만 어부는 이런 말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이집트인의 그물은 아마의 실을 사용하고 종류도 여러 가지였다. 팔레스타인과 페니키아의 어부들도 이처럼 아마의 실로 엮은 그물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나 안드레아가 던진 그물(마태 4,20),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루가 5,4)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보아라”(요한 21,6)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물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분명치 않다.
“예수께서 갈릴레아 호숫가를 지나 가시다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있는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마르 1,16). 이것은 투망(投網)이다. 우리나라의 투망과 사용법이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물의 한 끝을 팔에 감고 가장자리가 일제히 퍼지도록 힘껏 던지면 그물은 추(錘)에 의해 물속에 가라앉는다. 마태 4,18의 “그물 던지는” 것이 바로 이 투망을 가리킨다. 전도서 7,26의 그물, 에제키엘 32,3의 망, 미가 7,2의 그물도 이 투망이다.
이 투망 이외에 후릿그물이 있다. 끌어당겨서 고기를 잡는 그물을 말한다. 배에서 끌어당기는 경우와 기슭에서 끌어당기는 경우가 있다. 루가 5,4 이하의 어로는 그물을 배에서 끌어당기는 것이다.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 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린다.”(마태 13,47-48).
이것은 땅에서 하는 후릿그물이다. 이집트의 옛 그림에서도 이런 후릿그물의 광경을 볼 수 있다. 하박국 1,15에는 “그자들의 낚시에 걸리게 하십니까? 그물을 쳐서 사람을 끌어 내고 좽이로 사람을 잡아내고는 좋아 날뛰며...”고하여 세 가지 방법을 모두 망라하고 있다.
고기를 잡기에 가장 알맞은 때는 밤이다. 밤에 그물을 치는 것은 위험이 따르지만 많이 잡힌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루가 5,5)와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그 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요한 21,3)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부는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오면 고기를 골라 담고(마태 13,48), 그물을 씻고(루가 5,2), 그물을 깁고(마태 4,21, 마르 1,19), 다음에는 기슭에서 그물을 말린다(에제 26,5).
그물로 고기를 잡을 때에는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요한 21,3)는 것 처럼 동료와 함께 간다. 이들은 바다에서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고락을 함께 나누므로 자연히 친해진다. “재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놀랐는데 그들은 다 시몬의 동업자였다.”(루가 5,10)의 `동업자‘란 어부들의 친밀한 결합을 말한다. 이곳에 그물을 던지면 반드시 고기가 많이 잡힐 것으로 생각했던 늙은 어부의 날카로운 눈도 빗나가는 경우가 있으며 오랜 경험에 비추어 날씨가 좋을 줄로 생각하고 배를 저어 나갔다가 뜻하지 않은 폭풍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마르 4,37).
자연의 혜택을 많이 받으면서도 자연에 곧잘 농락 당하는 어부의 생활은 일종의 경건한 느낌을 준다.
“도데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 할까?”(마르 4,41)하는 발상도 그렇다.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이라든지(마르 6,49), “저더러 물 위로 걸어 오라고 하십시오”(마태 14,28)라는 베드로의 말은 어부로서 지닌 신념의 표시일 것이다. 에집트인들은 생선을 말려 건포로 만들었다. 그늘에서 말리는 것이 아니라 소금에 절여서 말린다.
예수님이 수천 명의 사람에게 배불리 먹게 하는 기적을 행할 때 사용하신 두 마리의 건포는 당시에 상당히 잘 팔렸다. 생선은 굽거나 쪄서 먹었다. “그들이 육지에 올라 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요한 21,9), 신명기 14, 9-10에 보면 “물에 사는 것 가운데 너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이런 것 들이다.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다. 지느러미도 없고 비늘도 없는 것은 먹지 못한다. 그것은 부정한 것이다.”는 말씀이 있으며 레위기 11,9-12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비늘의 유무에 의한 이 구별은 이집트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옛 로마시대에도 이런 유풍이 다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대체로 이런 금기(禁忌)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 다른 것 같다. 그리스인은 400여 종의 어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히브리인의 문헌에서는 어류의 이름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특히 신약성서의 저자 중에는 어부도 있는데 그 까닭을 알 수 없다(세계의 물고기는 약 1만 5천 가지가 된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의 담수어(淡水魚)로서 트리스트람이 기록한 문헌에 의하면 43종이고 그 중에서 지중해와 서부지역의 강이나 호수에 사는 담수어는 8종에 불과하다. 요르단강과 그 지류에 사는 36종 중에는 베드라치 과(科)의 Blennius lupulus만 지중해변의 담수어로 어디나 살고 있다. 나일강에 살고 있는 담수어가 7종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사는 담수어가 7종, 시리아와 그 밖의 지방에 사는 담수어가 10종, 요르단 분지의 개천에 사는 담수어가 16종이라고 한다.
담수어는 바다에서처럼 널리 교류하지 못하고 격리되어 있는 셈이므로 다른 고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변종(變種)이 생기게 된다. 갈릴레아 호수나 요르단강의 어류가 이디오피아계(系)에 가까운 것은 팔레스타인의 호수나 강과 아프리카 서북부의 강들과 수로가 통해 있던 지질시대(地質時代)의 잔재이다.
Mugil이라는 숭어의 동족인 담수어도 네 가지 이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내륙 어류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Chromis의 일종이다.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열대 지방에서 사는 담수어로 동부 아시아에는 살지 않는다.
Chromis nilotica라는 몸이 동그스름한 담수어가 팔레스타인에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Chromis tiberialis는 요르단 분지의 특산이다. 강의 빠른 물결에 밀려 사해(死海)에 이르러 많이 죽으면, 물고기를 좋아하는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와 쪼아 먹는다. 그리고 같은 과(科)에 속하는 Hemichromis sacra는 요르단강이나 나일강에서도 살고 있다. 탐험가 리빙스턴도 이런 아프리카의 어류를 채집하여 세상에 소개한 적이 있다.
겐네사렛 호수나 나일강 사류의 흙바닥에는 메기와 비슷한 Clarias macracanthus라는 물고기가 잠복하여 살고 있다. 극성스럽고 고집이 센 물고기로 잔잔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물이 별로 없는 곳을 지나 상류의 연못이나 늪에 알을 낳는다. 이틀쯤은 물이 없는 맨땅에서도 살 수 있다. 아가미의 구조가 다르므로 이런 일이 가능하다. 물에서 나와 걸어갈 때에는 마치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가 난다. 살이 대단히 맛있다고 하는데 유대인은 비늘이 없어 먹지 않는다. 유럽에서도 볼 수 있는 뱅장어(Anguilla vulgaris)가 안티오키아의 호수나 근처의 강에도 살고 있다.
우리나라의 송사리와 같은 과에 속하는 Cyprinodon이 팔레스타인의 연못이나 호수에 네 종류가 살고 있다. 어류 중에서 가장 작으며 수컷이 암컷보다 더 작다. 이 물고기는 섭씨 34도의 고온에도 견디며 염분이 많은 물 속에서도 자유롭게 헤엄친다. 그러나 사해에 들어가면 이 물고기도 죽게 된다. 사해에서 가까운 유황분이 포함된 온천에서 사는 것은 C. Hammonis이다.
잉어류도 많다. Barbus longiceps는 갈릴레아 호수와 요단강의 특산이다. B. canis는 갈릴레아 호수의 어류 중에서 가장 많은 물고기이다. 트리스트람은 이 물고기가 물결의 흐름 속에서 몸을 거의 세로로 세우고 머리를 물 위에 내밀고 입을 크게 벌리고 강을 가로 질러 날아가는 메뚜기의 무리를 잡아먹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B. beddomii는 갈릴레아 호수에서만 살고 있으며 그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Capoeta damascina는 요단강에서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C. fratercula는 북아프리카의 회교도가 귀히 여기는 물고기이다. 황어와 동속(同屬)인 Lenciscus, 미꾸라지와 비슷한 Nemachilus도 몇 가지 있다.
Lates Niloticus는 송어와 같은 물고기로 나일강에도 많이 살고 있다. 이 물고기는 소아시아의 하천에도 살고 있다.
한편 바다의 물고기, 즉 지중해의 물고기도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해안에는 훌륭한 어장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어업은 페니키아에서 성행하였다. 키로나 시돈은 페니키아인이 어로 작업을 떠나는 기점이었다. 페니키아에 어업이 성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에는 띠로 사람들도 살고 잇었다. 그들은 안식일에 물고기 등 갖가지 상품을 예루살렘으로 들여다가 유다인들에게 팔았다.”(느헤 13,16)라는 말씀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지중해에는 곰치와 동속(同屬)인 Muraena helena라는 물고기가 있다. 곰치의 가죽은 돈지갑을 만들지만 곰치 자체는 별로 모양이 좋게 생긴 물고기가 아니다. 물리면 크게 다친다.
그리고 6-7척(尺)이나 되는 다랑어(Thynnus)도 잡힌다. 이것은 그곳 사람들에게 큰 수입원이 된다. 우리나라의 남해에서 잡히는 만새기(Coryphaea hippuris)도 잡힌다. 만새기는 맛도 좋고 색깔도 아름답다. 만새기는 죽은 후 얼마 있으면 색깔이 변한다. 그래서 로마인은 요리를 만들 때까지 살려 둔다고 한다. Uranoscopus scaber라는 머리가 큰 못 생긴 물고기도 있다. Mullus surmuletus는 시리아 근해에서 특히 많이 잡히며 맛이 좋은 작은 물고기이다. 이 물고기는 입 아래 수염같은 촉수가 두 개 달려 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성전세를 납부했는데 그 과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맨 먼저 낚인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그 속에 한 스타데르짜리 은전이 들어 있을 터이니....”(마태 17,27). 이때의 베드로의 낚시는 낚시대가 없는 줄낚시 일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의 물고기‘라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지중해나 유럽의 대서양 연안에서 주로 잡히는 Zeus faber이다. 작은 물고기로 몸의 한가운데 둥근 검은 점이 있다. 이 점은 베드로가 연보를 하려고 돈을 집은 두 개의 손가락 흔적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북대서양에서 잡히는 대구과(科)의 Melanogrammus aeglifinus라는 물고기이다. 이 물고기는 아가미 아래 검은 점이 있다. 이것도 베드로의 손가락 자국이라고 한다.
불레셋인은 민족의 신 다곤을 숭배하고 있었다(판관 16,23). 다곤은 물고기의 신이라고 전해진다. 다곤의 신당(神堂)은 가사와 아스돗에 있었다. 신명기 4,18에 “당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물고기의 모습도 안된다.”는 말씀이 있는데 아무튼 이런 민간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레셋인은 다곤을 섬겨도 삼손에게 죽임을 당하고(판관 16장) 하느님의 궤를 다곤의 신전에 가져온 이튿날에 다곤의 상(像)이 쓰러져있었다(1사무 5,1-5). 다곤의 얼굴과 손은 사람이고 몸은 물고기라고 한다. 따라서 “다곤의 몸통만 성한 채로 남아있었다”(1사무 5,4)는 이 구절은 “물고기인 동체만 남았다”는 뜻일 것이다. 바빌론과 앗시리아의 물고기의 신은 물고기의 껍질을 쓰고 있다. 태국에도 다곤과 비슷한 신이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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