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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라헬이 훔쳤던 수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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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4,279 추천수0

[성서의 풍속] 라헬이 훔쳤던 수호신

 

 

야곱과 삼촌 라반은 처음과는 달리 재산이 늘어나면서 자꾸 다툼이 생기기 시작했다. 야곱은 부인 라헬과 레아와 함께 이 문제를 의논했다. 그러자 라헬과 레아는 "아버지 집에서는 우리에게 돌아올 몫을 더 바랄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마치 남처럼 여겼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팔아먹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돌려주셔야 할 돈도 혼자 가로채신 거예요.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에게서 빼앗아주신 재산은 어디까지나 우리 것이요, 우리 자식들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당신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야곱은 서둘러 처자들을 낙타에 태우고  모든 가축 떼를 몰고 아버지 이사악을 찾아 가나안 땅으로 길을 떠났다. 그런데 라헬은 아버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나간 틈을 타 친정집 수호신들을 훔쳐냈다. 라반은 야곱이 도망친 지 사흘 만에야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드디어 라반은 일가친척을 이끌고 이렛길을 달려 길르앗 산악지대에서 야곱을 따라잡았다. 라반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야곱을 나무랐다. "어쩌자고 나를 감쪽같이 속이고 내 딸들을 전쟁포로 잡아가듯이 하느냐? 나에게 알렸더라면 즐겁게 떠나 보냈을 것이 아니냐? 그런데 내 집 수호신들은 왜 훔쳐가는 거냐?"

 

야곱은 라반에게 "장인께서 제 처들을 빼앗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장인댁 수호신들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만약 감추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죽이셔도 좋습니다."

 

야곱은 라헬이 그 수호신들을 훔쳐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라반이 이 잡듯이 야곱 일행의 숙소와 짐을 검사했지만 수호신을 찾아내지 못했다. 라헬이 낙타 안장 속에 집어넣고 그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저는 지금 월경 중이어서 낙타에서 내리지 못합니다." 결국 라반은 수호신을 찾아내지 못했다(창세기 31장 참조). 라헬이 훔쳤던 물건은 라반 집안의 수호신이었다. 수호신은 족장시대의 일종의 우상이었다. 가정의 수호신은 작은 사람의 형상을 닮은 것과 거의 사람 키와 같이 큰 것도 있었다.

 

수호신은 나무나 은으로 만들었고 점을 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고대 근동세계에서 이 가족 수호신상은 매우 중요시 여겨졌다. 야곱도 누구든지 그 수호신상을 훔쳐온 사람은 죽여도 좋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고대세계에서는 이 수호신상이 중요시되었다.

 

라헬이 왜 아버지에게서 이 가족 수호신의 신상을 훔쳤는지는 알 수 없다. 고대세계에서는 가족 수호신상이 그 가족을 보호해준다고 믿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라헬이 이 수호신을 훔쳐 가지고 나온 데는 종교적 이유보다는 재정적 이유였을 것 같다. 왜냐하면 가정의 수호신은 우상일 뿐 아니라 재산상속의 증표였기 때문이다. 라헬은 아버지 재산에 탐이 나서 수호신을 훔쳤을 것이다.

 

수호신을 가진 사람은 그 가정의 재산을 상속하기도 했지만 비단 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더 나아가 가족의 일원으로서 가족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고대 결혼풍속에서 신부는 아버지로부터 신랑이 지불한 지참금이나 유산을 상속받을 권리를 갖고 있었다. 무일푼이었던 야곱은 지참금 대신에 14년을 봉사해야만 했다.

 

라반은 자기 딸들을 시집보내면서 아무 것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라헬과 레아도 결혼 지참금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자신들을 남처럼 여긴 것을 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라헬은 이것을 지금까지 자기와 남편 야곱이 아버지 밑에서 일한 대가로  충분히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라헬이 수호신을 훔친 것은 자신들의 유업과 함께 가족의 일원으로서 권리를 되찾으려는 것이었다. 라헬이 남편과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수호신에 집착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수호신에는 일반적으로 개인 수호신, 가정을 지키는 신, 씨족·도시·국가를 지키는 신 등이 포함된다. 이들 신은 항상 개인이나 집단을 가호하는 신이다. 수호신은 종교와 국가, 시간을 초월해서 인간 삶과 역사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신의 보호를 받으려는 인간본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도 수호천사 외에 수호성인이 있다. 어떤 직업, 장소, 국가, 개인은 특정한 성인을 보호자로 삼아 존경하며 그 성인을 통해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다. 세례명도 선택한 성인을 따라 살겠다는 의지와 성인의 보호를 나타낸다. 직업이나 단체의 수호성인도 있는데 요셉은 교회, 알로이시오는 청년과 학생,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자선단체의 수호성인이다.

 

[평화신문, 2003년 3월 30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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