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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 나지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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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7,209 추천수1

[성서의 풍속]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 나지르인

 

 

- '삼손과 들릴라', 폴 구스타브 도레(1832~1883), 삽화, 프랑스. 자료제공=정웅모 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

 

 

구약성서를 읽다 보면 나지르인이라고 하는 조금 생소한 단어를 만날 때가 있다(아모스2,12:민수 6,13:1마카 3,49 참조). 나지르(Nazi rite)란 본래 '하느님께 성별(聖別)된 사람' 또는 '특정한 서원을 통해 하느님께 스스로를 봉헌한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어이다.

 

따라서 나지르는 속(俗)의 세계에서 뽑혀 성(聖)의 세계에 속하게 된 사람으로, 하느님께 봉사하고 민족을 영도하도록 선택된 사람을 가리키던 말이다. 나지르인들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기에 봉헌과 충성의 표지인 긴 머리카락이 그들의 표지가 되었다.

 

예로부터 머리카락은 사람의 생명 또는 힘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태어날 아이를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면서 "평생 그의 머리를 깎지 않겠다"(1사무 1, 11)고 다짐했던 것이다.

 

나지르인 제도는 구약성서 시대 초기부터 2000년 넘게 전해온 제도였다. 이스라엘 역사 초기 나지르인은 평생을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고 살아가도록 뽑힌 이들을 가리켰다(아모스 2,11-12 참조).

 

삼손 이야기나 아모스의 신탁에서 볼 수 있듯이 나지르인은 본래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이었다. 예언자와 비슷하게, 하느님의 신비로운 은사를 입고 나지르인이 되어 '주님의 성령'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판관 13,25참조).

 

본래 나지르인은 금욕과 고행 생활을 하도록 뽑힌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으로서, 한평생 그분께만 충성을 바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초기에는 나지르인 신분은 평생 계속되는 것이었다. 초기 나지르인은 삼손처럼 하느님께서 부르심을 통해 세운 이로서 특별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영도해 나가는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시대가 지나면서 차츰 변하여 누구든 원하면 특별한 서원을 통해 남녀 구분없이 일시적으로 나지르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한번 나지르인이면 평생 그렇게 살아야 했지만 일정 기간만 생활할 수도 있었다. 기한은 서약할 때 정하는데, 후대 유다교 전통에 따르면 기한을 정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30일만 하게 되어 있었다.

 

야훼께 헌신하기로 하고 나지르인 서약을 할 경우에는 그 기간에는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음 세가지를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었고 술과 포도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없었다.

 

또 부모 형제가 죽은 경우라 할지라도 죽은 사람에게 접근하여 부정을 타면 안되었다(민수기 6,1-13 참조).

 

이 세 규정을 지킨 나지르인은 서원 기간이 끝났을 때 만남의 장막 문간에 나와서 각종 제물을 바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불에 태웠다. 이런 일시적인 나지르인 풍습은 구약 말기와 신약시대에도 계속되다가 중세에 이르러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신약시대 사도 바오로도 하느님께 서약한 일 때문에 겐크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는 말이 나온다(사도 18, 18참조). 머리를 자른 행동은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지르인 서약을 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나지르인 제도는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려는 신앙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나지르인이 '세상과 구별된 사람, 또는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진 사람'의 의미라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은 나지르인이라 할 수 있다.

 

세세한 규정은 아니더라도 나지르인 정신만은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이 절실하게 본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죄의 문화가 시시각각으로 홍수처럼 몰려오는 현대의 삶은 하느님께 대한 더욱더 철저하고 온전한 헌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04년 1월 1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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