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막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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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7 | 조회수7,178 | 추천수0 | |
[성서의 풍속] 성막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 성막과 주변 모습, 삽화. 자료제공 = 정웅모 신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 도착했다. 이때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 십계명이 적힌 돌판과 성막에 관한 법규를 받았다(탈출 24-27장 참조). 성막에 관한 법규는 이스라엘 종교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광야에 성막을 지었는데, 금과 은과 놋과 아름답게 수놓은 휘장을 포함하여 귀한 것들로 만들어졌다.
성막에는 '하느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상이 깃들어 있다. 유다인들은 예로부터 말에는 힘이 있고 인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무한한 능력을 지닌 인격적 하느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막은 사람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신이 움직인다'는 것을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산과 강과 들, 사막에는 그곳을 다스리는 신이 따로따로 있다고 믿었다. 각 지역을 다스리는 신은 자기들 관할지역을 벗어나면 힘을 쓸 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신전을 만들어 놓고 거룩한 장소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를 분리시켰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막은 고대인들의 신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계시는 분이셨다. 하느님 현존을 상징하는 성막은 이동할 때나 행진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막이 백성들의 생활 중심부에 위치했던 것은 신전들이 백성들이 사는 거주지와 떨어진 곳에 건립된 것과는 대조된다.
제사를 거행하는 성막은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여, 거룩한 곳과 거룩하지 않는 곳을 구별해 놓았다.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쪽에 하나밖에 없고, 이 문을 통해서만 성막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제사장들은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제사를 드렸다. 제단 위에는 항상 신선한 빵 12개가 놓여 있었다. 대사제들은 이 빵을 먹고 하느님을 섬기는 직분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늘을 향해 피우는 분향은 언제나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어서 오로지 대사제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원칙을 무시하고 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죽음을 당했다(레위 16장 참조).
지성소에 들어가면 증거의 궤가 놓여 있었다. 증거의 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지팡이,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이 들어 있었다. 증거의 궤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인간 삶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었다.
대사제는 일년에 한번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해 속죄판에 피를 뿌리고 하느님과 대화했다. 이처럼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 현존의 증표였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성막을 매개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다. 성막은 신앙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사람들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막은 성과 속의 일치, 종교와 생활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하느님 백성들의 삶은 일상적인 것일지라도 하느님의 거룩함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현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성막의 영적 의미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라 할수 있다.
[평화신문, 2004년 5월 1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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