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서의 세계: 자녀 교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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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7 | 조회수3,526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자녀 교육
수많은 민족이 흥망성쇠를 계속하는 이 세상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또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잃는 일 없이 꿋꿋이 살아가는 겨레가 있다. 수가 많지도 않으면서 철학, 과학, 문학, 경제, 정치 등에서 세계의 어떤 민족보다도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겨레가 있다. 바로 유다 민족이다. 이들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녀 교육이고, 이러한 그들의 교육은 이미 구약성서 시대부터 시작된다.
자녀를 어떻게 키우며 교육시키느냐는 문제는 그들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보느냐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모두 그분의 길을 걷는 이 모두! 네 집 안방에는 아내가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올리브 나무 햇순들 같도다"(시편 128,1-3). 자녀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주어지는 "상급"이다(시편 127,3). 그래서 자녀가 많음은, 하느님 앞에서 영위하는 훌륭하고 복받은 삶의 표지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인들에게 자녀는 곧바로 하느님과 관련된다. 또 그들에게는 종교가 사회, 경제, 정치, 군사 등 개인과 집단 생존의 모든 면에서 그 바탕을 이룬다. 이러한 연유로 이스라엘인들의 자녀 교육에서도 종교 교육이 근본이며 핵심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자녀가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러한 신분에 맞갖게 키우고 교육시켜야 하는 것이다.
종교가 교육의 근본이라는 말은 교육의 민주성, 전민족의 의무 교육이라는 사실을 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개인이나 가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겨레를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자녀로 삼으신다(신명 32,6; 이사 63,16; 64,7 등).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양반과 상민 같은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임금 역시 당시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어떤 초인적 존재가 아니라(2사무 7,18 참조), 하느님을 대신하여 그분의 백성을 이끄는 일종의 기능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반유목민이라는 단일한 사회체제에서, 특히 왕정체제로 넘어가면서 사회계층이 생겨나고 계층 사이에 차이와 갈등도 일어난다. 그러나 어떠한 예외 없이 모든 이스라엘인이 하느님의 아들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예컨대 사제나 예언자, 관리들이나 임금처럼 따로 교육을 더 많이 받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결국 자기 직책을 수행하기 위한 특수 교육인 것이다. 이들을 포함한 온 민족은 모두 공통적으로 기본 교육을 받아야 한다. 참다운 이스라엘인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뜻에 합당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맞는 교육을 잘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무 교육에는 제한이 하나 있다. 남자 아이만 정식 교육을 받고, 여자 아이는 어머니 밑에서 주로 가사만 배운다는 것이다(출애 35,25-26; 2사무 13,8 참조). 그렇다고 여자가 교육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우선 자녀 교육의 첫 책임자는 어머니이다. 아이가 예닐곱 살이 될 때까지는 온전히 어머니(경우에 따라서는 유모) 손에서 자란다. 물론 아이들은 우리 나라 텔레비전 이전 세대와 별다름 없이 길거리나 광장에서 뛰논다(이사 9,20; 즈가 8,5 참조). 그리고 특히 여자 아이들은 질흙으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는 가운데 교육상 중요한 이 시기에 어머니가 자녀의 교육을 담당한다. "내 아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들어라.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마라"(잠언 1,8; 6,20).
이스라엘의 교과서 가운데 하나인 잠언에 들어있는 현인 또는 스승의 말이다. "가르침"은 히브리말로 "토라"이다. "토라"는 ’가리키다, 가르치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서, 일반적으로도 쓰이지만 하느님의 "가르침"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그리고 이 낱말은 그분의 뜻을 담은 "율법",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인에게 절대적 중요성을 지니는 ’오경’을 의미하게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란히 나오고, 또 이러한 용어로 어머니의 교육을 표현한다는 사실에서, 성서의 사람들이 어머니의 교육을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자들이 비록 공식적으로 교육받지는 못하였지만 제도 밖에서 비공식적으로,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합당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은 그러한 여자 또는 어머니의 교육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아이가 크면 아버지가 맡아서 교육한다. 아버지의 교육은 여러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대대로 이어지는 가업의 교육이다. 아이는 농사나 목축, 또 대장간일이나 목수일 등, 집안의 직업을 배운다. 어린이들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술 교육’도 받는다. 다윗은 어릴 때 이미 비파에 능숙하였다(1사무 16,16-18). 그는 특출한 능력의 소유자임이 분명하지만,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서 목자일을 하는 젊은이였다. 이로써 음악 교육이 출신 성분이나 경제 여건과 큰 관계 없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시편 137; 애가 5,14 참조). 또 이스라엘인들은 남녀 모두 민속적, 그리고 종교적 춤도 좋아하여, 자녀들에게 그것을 가르쳤을 것이다(판관 21,21; 예레 31,4와 2사무 6,14; 시편 150,4 참조).
둘째는 이를테면 인성 교육이다. 곧 한 인간으로서 훌륭히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가르침이다. 고대 근동인들은 삶의 지혜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혜를, 마치 우리의 속담이나 격언처럼, 대부분 두 줄로 된 간결한 시적 문장으로 함축시키기를 좋아한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지혜문학’이라고 한다. 잠언, 집회서, 전도서 등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아버지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는 ’지혜’를 아들에게 전해준다. 이러한 인성 교육에는 마을의 원로들도 큰 몫을 한다. 특별히 성으로 둘러싸인 고을에서는 상거래나 재판 등 모든 공적인 일이 성문 광장에서 벌어진다. 원로들의 주재 아래 남정네들이 모두 모여 이루어지는 일을 남자 어린이들도 보고 들음으로써 인생을 배우게 된다.
교육은 주로 구술로, 문답 형식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에게는 글쓰기와 읽기 공부도 빠질 수 없다(신명 6,8; 판관 8,14 참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말로써 인간과 대화하신다.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존재와 생존의 절대적 바탕인 하느님의 말씀은, 먼저 구두로 전해져 오다가 글로 정착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말씀’과 ’글’이 더할 수 없이 중요하다. 그래서 글을 배운다는 것은 그들에게 깊은 뜻이 담긴 일이다(1마카 1,56에 따르면, 이미 기원전 160년 이전부터 많은 사람의 집에 책 그 자체인 ’율법의 책’ 곧 성서가 있었다).
아버지가 수행하는 가르침의 셋째 방향은 종교 교육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두도록 하여라. 너는 집에 앉아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의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주어라"(신명 6,4-7).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오경에서 십계명 다음으로 중시하는 구절이다. 이와 같이 종교 교육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지고의 사명이다(출애 12,26-27; 13,8.14; 신명 4,9-10; 6,20-21; 32,7; 여호 4,21-22도 참조).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하느님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이루어진 민족의 역사,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거룩한 임무를 맡고 있다. 이러한 종교 교육에는 마땅히 도덕과 윤리도 포함된다.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려고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창세 18,19).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두고 하신 이 말씀은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모든 가장에게도 해당된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버지가 바로 교육자라 할 수 있다. 이는 가르치는 직책을 맡은 이들이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바로 부자 관계로 표현된다(2열왕 2,12. 그리고 잠언에 자주 나오는 "내 아들아", "나의 아들들아" 참조). 그리고 사제도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는다(판관 17,10; 18,19. 그리고 창세 45,8; 에스 3,13; 8,12도 참조).
사제들은 제사만 지내는 ’제관’이 아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대교육자 모세의 후계자, "토라" 곧 하느님의 가르침인 율법의 보존자요 전승가이며 해설가이다. 그들이 성소나 성전에서 거행하는 전례는 어린이들에게 생생한 교육이 되기도 한다. 거기에서 불려지는 시편들, 또 재현되는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 커나간다.
구약성서의 특징적 부류 가운데 하나인 예언자들, 지혜문학을 꽃피운 현인들, 그리고 특히 기원전 587년의 유배 이후에 중요성을 더해가는 율법학자들도 어린이들의 교육에 일조한다. 그리고 유배 이후 시대부터 거의 마을마다 생겨나기 시작한, ’하느님 말씀의 집’이라 할 수 있는 ’회당’도 어린이 교육에 큰 몫을 한다. 마침내 기원전 130년대, 또는 늦어도 기원후 60년대부터는 각 도시와 마을에 정식 초등학교가 설립되어, 예닐곱 살 이상의 어린이들을 일정한 과정에 따라 교육하게 된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교육에서"스승" 그 자체는 하느님 자신이시다(이사 30,20; 욥 36,22).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모든 구성원이, 당신에게서, 그리고 당신의 권위를 나누어 받은 여러 교사에게서 합당한 교육을 계속 받아, 당신의 뜻에 맞갖은 인간이 되기를 바라신다(레위 19,2 참조).
[경향잡지, 1998년 9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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