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서의 세계: 고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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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7 | 조회수3,275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고아
기원전 160년대에 유다 땅은 시리아 왕국의 혹독한 식민 통치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나뿐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가 금지되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번제 제단은 제우스 신의 제단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유다인들이 중히 여기는 할례와 안식일도 폐지된다. 정치적 억압에 이어 종교말살 정책도 극에 달한 것이다. 드디어 마따디아라는 이와 유다 마카베오를 비롯한 그의 다섯 아들이 식민 통치자들에게 대항한다.
이들의 독립운동 이야기 가운데 한 대목이, 구약성서의 고아 문제를 살펴보려는 우리의 눈길을 끈다. 마카베오 하권 8장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된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 아래, 유다의 독립군은 시리아 군대에 큰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많은 무기와 노획물을 차지하고, 또 자기들을 종으로 사려고 왔던 노예 상인들의 돈도 몰수한다. 이 유다인들은 때마침 돌아온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고 나서, "박해를 받은 희생자들과 과부들과 고아들에게 전리품의 일부를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자기들과 자기 자녀들의 몫으로 나누어 가졌다"(2마카 8,28). 가혹한 식민 통치로 그들은 모두 궁핍한 상태에 있었다. 또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돈과 물자가 지속적으로 필요했다.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식민 통치의 직접적인 희생자, 그리고 과부들과 고아들에게 먼저 전리품을 나누어준다. 바로 이 구절에서부터 우리는 구약성서의 사람들이 고아들을 어떻게 대하였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고아는 구약성서에서 과부와 이방인과 함께 사회의 저변층, 빈곤층을 이룬다. 우리는 ’부모를 여의어 몸붙일 곳이 없는 외로운 아이’를 고아라고 한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아버지와 사별한 아이를 고아라고 일컫는다. 사실, 엄청난 재앙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 이렇게 한탄한다. "저희는 아비 없는 고아들이 되고 저희의 어미는 과부처럼 되었나이다"(애가 5,3). 엄격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편 잃은 젊은 부인 혼자서는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메꾸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아의 범위가 현대보다 더 넓었던 것이다. 고아는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성장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도움을 베풀고 의지가 되어주는 이가 없는 아이이다(욥 29,12 참조).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러한 도움과 의지가 되어주어야 한다.
여기에서 첫째로 떠오르는 이가, 하느님을 대신하여 온 백성을 책임진 임금이다. 구약성서에서는(우연히도) 고아가 임금과 관련해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상적인 임금을 노래하는 시편 72편을 보면, 고아를 보살피는 일이 통치자의 본분이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 임금)가 백성 가운데 가련한 이들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4절),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그가 구원하기 때문이옵니다.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를 가엾이 여기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주나이다"(12-13절).
고아들을 보살피는 일은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에서 통치자들의 근본 직무 가운데 하나였다. 예컨대 이집트에서는 고아처럼 의지할 데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임금과 지방 장관들의 의무였다. 그리고 기원전 1700년대에 법전을 편찬하여 세계의 법 사상과 제정에 큰 영향을 끼친 함무라비는 법전의 맺음말에서,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지 않고, 고아와 과부가 권리를 누리게 하는 것"을 자기 통치의 목적으로 내세운다.
고아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에서 특별한 점은 하느님께서 직접 고아들을 위해 나서신다는 사실이다. 바룩서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바빌론으로 유배간 동포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는 이 편지에서 그곳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은 "고아를 잘 돌보아주지도 못하는" 거짓 신이라고 말한다(바룩 6,37).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친히 고아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시고, 또 "아버지"가 되어주신다(시편 10,14.18; 68,6; 146,9; 호세 14,4). 하느님의 백성은 그분의 이러한 특성, 고아들에 대한 이 대원칙을 자기들의 실생활에서도 구현시켜야 한다. 이러한 연유로 구약성서에서는 토라(율법)와 예언서들과 지혜문학서들을 통틀어 줄곧 고아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강조된다.
하느님 백성의 삶에 가장 크고 중요한 구실을 하는 토라(율법)의 규정들 역시 하느님께서는 약자들의 보호자,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빵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라는(신명 10,18) 원칙에서 출발한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 직후,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신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된다. 네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출애 22,21-22. 그리고 신명 24,17 참조). 특히 신명기는 고아들과 같이 가난한 이들의 생계를 도와주고, 또 그들이 소외되지 않게 배려하는 몇 가지 구체적인 규정을 마련해 놓고 있다. 추수할 때에 곡식단을 밭에 놓아두고 잊어버렸을 경우에 그것을 가지러 돌아가서도 안되고, 올리브나 포도를 딸 때에 "지나온 가지에 다시 손을 대어서도 안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신명 24,19-22).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소출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그런데 매삼년 째에는 이 십일조가 성소나 성전이 아니라 각 고장에 모아져서, 고아와 같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이들의 차지가 된다(신명 14,28-29; 26,12-13).
이스라엘인들은 또한 축제 때에 고아와 과부 등 저변층의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특별히 마음을 써야 한다(신명 16,11.14). 끝으로, 신명기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왜곡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고 경고함으로써, 이러한 약자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려고 애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 솔선 수범하여 고아들을 보살피지 않는다고 꾸짖는다. 고아들의 권리를 되찾아주지 않으며, 소송이 일어났을 때에 그들을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학대하고 강탈하는 지도층과 일반 사람들의 직무 유기와 범법 행위를 고발한다(이사 1,23; 10,2; 예레 5,28; 에제 22,7). 이사야는 이렇게 "탈선한 민족, 죄로 가득 찬 백성"인(1,4) 동족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며, "선을 행하기를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하고 촉구한다(이사 1,17. 그리고 예레 22,3; 즈가 7,10 참조). 그러면 하느님께서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계속 잘살 수 있으리라고,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약속한다(예레 7,6-7).
고아들은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을 만들어낸 현인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지혜문학의 대표격인 잠언에는 "고아"가 한 번밖에 언급되지 않는다(23,10). 그러나 현인들은 이들도 "가난한 이", "빈곤한 이"들 가운데 하나로서(22,9.22), 하느님께서 그들의 후견인이심을 분명히 한다. "약한 이를 억누름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고 불쌍한 이를 동정함은 그분을 공경하는 것이다."(14,31), "가난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주신다"(19,17).
같은 지혜문학에 속하는 욥기에는 예상 밖으로 "고아"가 자주 언급된다. 고통받는 욥을 본 친구들은, 욥이 그러한 고통을 자초한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죄 가운데에는 고아들을 억압한 행동도 들어있다고 말한다(22,9).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비난과 고발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역설한다. 힘없는 고아들이 억압과 강탈을 당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지만(24,3.9), 자기는 그들에게 못할 짓을 한 적도 없고(31,21), 배고픈 그들을 옆에 놓아두고 혼자서 배불리 먹는 파렴치한 행동도 한 적이 없을뿐더러(31,17), 도리어 의지할 데 없는 그들을 구해주었노라고 당당히 말한다(29,12). 이로써 우리는 고아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사회와 개인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인들의 가르침을 집회서의 저자는 이렇게 종합한다. "고아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주고 그들의 어머니(또는, 과부들)에게 남편이 되어주어라. 그러면 너는 지존하신 분의 아들이 되고 그분께서는 너를 네 어머니보다 더 사랑해 주시리라"(4,10).
유다인들이 고아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였는지는 그들이 구약성서에 이어 두번째로 중요시하는 ’삶의 책’, 탈무드에서도 잘 드러난다. 탈무드는 고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여서 키우는 것을 가장 훌륭한 행동으로 칭송한다. 그리고 탈무드에 따르면, 공동체는 남자와 여자, 적자와 서자의 구분 없이 모든 고아를 혼인할 때까지 돌보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 공동 기금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보호자를 지정하지 않은 채 죽었을 경우에는, 공동체를 대표하여 법정이 그 고아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이렇듯 유다인들의 공동체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공동으로 고아들을 돌보고 있다.
신약성서에는 "고아"가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요한 14,18; 야고 1,27). 그러나 횟수가 곧 중요성을 말하지는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이 고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8년 12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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