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서의 세계: 이방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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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7 | 조회수3,992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이방인
"제 기도를 들으소서, 주님. 제 울음에 잠자코 계시지 마소서. 저는 제 조상들처럼 당신의 집에 사는 이방인, 외지인일 따름이옵니다"(시편 39,13).
시편 저자는 죄 많고 "그림자"처럼 덧없는 자신을 반성하면서, 자기가 "이방인"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애초부터 나그네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 가운데 하나인 신명 26,5-10의 첫마디가, "저의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이다. 여기에서 "조상"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 야곱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방인으로 나그네살이를 하는 것은 이미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라는(창세 12,1)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집을 떠난 아브라함은 평생토록 나그네로 살았다. 그의 아들 이사악이나 손자 야곱도 마찬가지이다(창세 12,10; 20,1; 21,23; 23,4; 26,3; 32,5. 그리고 창세 17,8; 28,4; 출애 6,4 참조).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자기들의 나그네살이를, 약속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순명의 표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신약성서의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아브라함)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도 같은 약속을 물려받은 이사악과 함께 천막을 치고 나그네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머물러 살았습니다"(히브 11,9).
이방인 또는 나그네와 관련된 이스라엘인의 결정적 체험은 이집트 체류이다. 이집트에서 그들은 이방인으로서 서러움과 고통을 당하였다(창세 15,13; 출애 3,7; 신명 26,6; 시편 105,25; 사도 7,6).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고난을 당하는 이 ’이방인들을’ 구원해 주셨다.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가난한 이들과 억압받는 약자들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러한 체험이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세를 결정짓는다. 신명기에 따르면 모세는 동포들에게 이렇게 타이른다. "그분께서는 과부와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빵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신명 10,18-19. 그리고 탈출 23,9; 신명 24,22 참조). 레위기는 더 나아가서 이방인을 바로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너희 땅에서 이방인이 너희와 함께 머무를 경우,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레위 19,33-34).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람이 ’이방인’인가? 외국인이라고 다 지금까지 말한 이방인의 범주에 들지는 않는다. 이방인은 제 고장을 떠나 타향에서 그곳의 본토인 곁에 단기간이나 장기간 머무르는 이를 일컫는다. 그래서 반드시 외국인일 필요는 없다. 이러한 이방인은 원칙적으로 본토인이 갖는 권리와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이방인에게는 그 고장 사람들이 혈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받는 보호나 은전 등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방인은 곁에 있는 본토인 또는 그곳 지방민들의 호의와 배려에 맡겨진다. 그 대신 그는 자기를 맞아들인 사람들에게 신의를 지키고(창세 21,23) 그곳의 법을 지킬 의무를 진다(민수 15,15-16).
여행하는 이방인을 본토인이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판관 19,15),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고대 근동인은 이방인을 손님으로 맞이하여 접대하는 것을 성스러운 의무로, 영광으로 여겼다(창세 18,2-8; 욥 31,32 참조). 집주인에게는 손님에게 양식을 베풀 의무만이 아니라, 공권력이나 사법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특히 손님을 보호할 의무도 있었다. 손님은 한마디로 불가침적인 존재였다(판관 19,23-24 참조). 이러한 관습의 연장선상에서 이방인 역시 타향에서 손님에게 부여되는 일종의 권리를 누리면서 나름대로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
지금에야 관광객이나 노동자 등 이방인들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지정학적으로 특수한 위치에 자리잡은 우리 땅의 국경은 옛부터 자연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상당히 폐쇄적이었다. 그래서 그 옛날 이스라엘 땅에도 이방인이라고 해보아야 극히 소수만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옛날의 근동 역시 곳곳에 나라가 서있었지만, 국경선을 넘나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또 그곳에는 유목민이 많이 살았다. 가축을 먹일 풀과 물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그들에게 국경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여건과 이런저런 이유로 외국에, 그리고 같은 나라 안에서도 타지에 가서 나그네살이를 하는 이방인들이 늘 적지 않았다.
이방인이 생겨나는 까닭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흔한 이유는 가뭄이다(창세 12,10; 26,1-3; 47,4; 2열왕 8,1; 룻 1,1). 사람들은 또 전쟁이라든가(2사무 4,3; 이사 16,4) 개인적인 곤경이나 살인죄 등으로 타향살이를 하게 된다(출애 2,11-22. 그리고 출애 21,13; 민수 35,9-34; 신명 4,41-43 등의 "도피 성읍" 참조).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레갑인은 유목민의 이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유다 땅에 천막을 치고 나그네로 살았다(예레 35,7). 종교적인 이유로 타향살이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2역대 15,8). 또 예루살렘 성전이 유일한 성소로 자리잡기 전에는, 레위인이 나라 안이긴 하지만, 어디든지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는 곳에 가서 나그네로 머물렀다(판관 17,7-9; 19,1.16. 그리고 신명 12,12; 16,11.14도 참조). 끝으로 특수한 경우가 하나 있다. 곧 이스라엘인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다음에는, 그곳의 원주민도 이방인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방인’의 수가 상당하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에는 자연히 이방인과 관련된 법 규정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법의 근본 정신은 이집트 탈출이라는 하느님의 구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신명기(10,18-19)와 레위기(19,33-34)가 밝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인은 이방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본보기를 따라 자기들도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이방인도 본토인과 똑같이 대우해야 한다. "너희 동족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잘 듣고 의롭게 재판하여라. 동족뿐 아니라 동족과 이방인 사이도 그렇게 하여라"(신명 1,16). "이방인이든 본토인이든 너희에게는 법이 하나일 뿐이다"(레위 24,22).
여기에서 우리에게 놀라움을 자아내는 두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으로서, 이방인이 고아와 과부와 함께 열거될 뿐 아니라, 때로는 그 명단의 첫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이다(신명 24,17; 27,19; 시편 146,9 등). 불행한 처지에 있는 자국민 또는 본토인을 우선 돌보고 나서 외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처음부터 동등하게 배려한다(레위 19,9-10; 신명 14,28-29; 24,19-22 등도 참조). 둘째는, 이방인을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레위 19,34), 곧 하느님의 백성이 서로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이웃 사랑’의 계명과(레위 19,18), "그(= 이방인)를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이방인 사랑’의 계명이(레위 19,34) 똑같은 형식으로 표현된다. 이는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에서 이방인으로 산 체험과, 그곳에서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느님께서 약자들의 보호자시라는 깨달음, 이 두 가지 사실을 얼마나 마음 깊이 간직하고 그것들을 실생활에 구현시키려고 노력하였는지 잘 보여주는 표지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이상향’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땅은 원칙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만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원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지파와 집안에 따라 나누어주셨다(여호수아서 참조). 물론 이방인 가운데에는 제 집을 가진 이도 있었고(2사무 11,2-9 참조), 더러는 이스라엘 사람을 종으로 사들일 만큼 부유한 이들도 없지 않았다(레위 25,47). 그러나 대체로 가난한 부류에 속하였다.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기에 농사를 짓지 못하고 날품을 팔거나 기능공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예컨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자신을 종으로 팔 경우에 이스라엘인과 외국인 사이에 차이를 두는 규정(레위 25,39.44-46) 등에서 엿볼 수 있듯이(신명 15,3; 23,21 등도 참조), 현실적으로는 삶의 여러 분야에서 이러저러한 차별이 있었을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개종자들을 염두에 둔 규정들이 주를 이루게 된다. 곧 단순한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의 믿음을 받아들여 그들의 신앙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인이 사는 땅은, 그들의 하느님이신 야훼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에 머무르시는 거룩한 땅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인은 자기들의 땅을 더럽혀서는 안된다(민수 35,34). 그리고 이스라엘인은 "거룩한 민족"이(출애 19,6) 되어야 한다. "나 주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나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20,26). 구체적으로는 율법, 곧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규정들을 잘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땅, 이스라엘인이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 가운데에 사는 이방인도 단순히 본토인의 법을 지켜야 하는 관습상의 의무 이상으로, 계약의 법규들을 함께 지켜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인은 자기들의 종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들에 둘러싸여 삶으로써,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야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 사는 이방인들이 바로 그들을 다른 종교로, 우상 숭배로 유인하는 매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예컨대 솔로몬 임금의 "마음을 다른 신들에게 돌려놓은" 그의 외국인 왕비들과 후궁들의 이야기 참조: 1열왕 11,1-13). 이러한 연유로 이스라엘인은 곁에 사는 이방인을 가능한 한 자기들의 종교로 끌어들여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은 첫머리에서 인용한 시편 39,13의 말처럼, 약속의 땅에 대대로 살아가는 자기들도 결국은 하느님 앞에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히브 11,13도 참조). 자기들이 사는 땅의 원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땅은 나(= 주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요 외지인일 따름이다"(레위 25,23). 제 땅이라 생각하고 제 집이라 여기며 산다 하여도, 인간은 본디 하느님의 ’땅’ 또는 그분의 ’집’ 한 모퉁이에서 더부살이하는 이방인이며 외지인이다. 이방인이나 외지인은 남의 땅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주인의 선의에만 의지해야 한다. 땅과 관련해서든, 집과 관련해서든 하느님 앞에서 주인 행세를 할 수 없음은, 이스라엘인이 단순히 개인적으로만 깨친 진리가 아니다(시편 119,19도 참조). 특히 기원전 587년, 나라가 망하고 하나뿐인 하느님의 성전이 파괴된 뒤, 하느님의 백성은 자기들이 모두 그러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역대기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임금 그 자체, 장차 올 메시아의 전형인 다윗 임금이 백성의 이름으로 이렇게 고백하였다고 말한다. "당신 앞에서 저희는 저희의 모든 조상처럼 이방인이고 외지인입니다"(1역대 29,15).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을 주시고 후손을 많게 해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으며 나그네살이를 한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시겠다는 주님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약속과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혜에만 온전히 의지해야 하는 이방인이었다. 하느님의 백성은 본질적으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인 역시 이 지상에서 나그네살이하는 외지인이다. "이 땅 위에는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앞으로 올 도성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히브 13,14. 그리고 1베드 1,1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단순한 이방인이 아니다.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9). 그리스도인은 아직도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다. 그러나 이미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되어 영원한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경향잡지, 1999년 2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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