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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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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3,261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아버지

 

 

대부분의 구약성서는 히브리 말로 쓰였는데, 이 말에서 ’아버지’는 ’아브’라고 한다. ’아브’는 어머니를 뜻하는 ’엠’과 함께, 우리말의 ’아버지-아빠’와 ’어머니-엄마’처럼, 아이들이 하는 유아어(幼兒語)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여느 언어에서나 마찬가지로 히브리 말에서도 ’아버지’는 일차적으로 ’우리 아버지’나 ’철수 아버지’처럼, 남자쪽 어버이나 자식을 가진 남자를 일컫는다.

 

그런데 히브리 말은 우리말과 조금 달리 ’아버지’가 동시에 ’가장’도 뜻한다. 또 한자의 증조부나 고조부, 우리말의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말이 따로 없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과 사고 방식이, 한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민족보다는 물과 풀을 찾아 옮겨다니며 사는 유목민에 더 가깝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야곱-이사악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유목민은 험한 자연 환경 속에서, 또 많은 경우에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씨족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유목민은 가장의 통솔 아래 모두 힘을 합치고 서로 도와야 한다. 또 가장을 중심으로 해서 혈연으로 결속된 대가족을 이루어야 여러 가지 어려움을 더 잘 헤쳐나갈 수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집안’ 또는 ’가정’을 히브리 말에서는 ’아버지 집’이라고 한다. 이는 본디 가장을 정점으로 하여 한집에서 사는 대가정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가장의 아내 또는 아내들, 혼인을 이미 하였거나 아직 하지 않은 아들들, 미혼의 딸들, 시집갔다가 과부가 되었거나 남편 집을 떠나온 딸들, 또 장가간 아들들의 아내들과 자녀들이 포함된다. 집안의 가장은 한 사람뿐이다. 한집안에서는 원의미의 아버지도 하나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되든지 증조부가 되든지, 히브리 말에서는 그냥 아버지로 불리는 것이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먹이며 보살핀다. 아들들에게는 따로 세상살이와 종교생활도 가르친다. 가족들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에게 순종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장’ 또는 ’집안 어른’과 함께 ’권위’의 뜻도 내포한다. 이러한 이중의 의미로 ’아버지’라는 말이 두 가지 방향으로 폭넓게 쓰인다.

 

첫째, ’아버지’는 살아있는 가장뿐 아니라 이미 죽은 가장들, 곧 조상들도 뜻한다. 히브리 말에도 ’조상’에 해당하는 낱말이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게 쓰이고, 대부분의 경우에 ’아버지’가 쓰인다(물론 우리말 성서에서는 그 의미에 따라 ’조상’으로 옮긴다). 이때 히브리 말은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여 쓴다. 복수 ’아버지들’은 그냥 불특정 조상들을 뜻하고, 단수는 특정한 씨족이나(예레 35,6) 지파나(판관 18,29) 민족의 시조(여호 24,3에서는 아브라함, 이사 58,14에서는 야곱)를 가리킨다.

 

한 개인은 아버지, 할아버지 등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 조상들과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그래서 성서)에서는 족보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 개인은 또한 자기가 받은 피의 원천인 조상들과 직접 결부된다. 그래서 먼 옛날의 선조까지도 시간을 뛰어넘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윗 왕가에서 이러한 사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윗이 계속해서 후손 임금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이다(1열왕 15,2; 2열왕 16,2 등). 이로써 후대의 임금들은 저마다 자기들의 왕조를 창설한 조상 다윗에게서 정통성을 받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버지’가 집안의 가장뿐 아니라 씨족이나 민족의 조상도 뜻하기 때문에, 혈연이 아닌 다른 매개를 통해서 특징지어지는 사람의 시조도 넓은 의미로 ’아버지’라고 불린다. 예컨대 야발이라는 이는 "집짐승을 치며 천막에 사는 이들" 곧 목축업자들의 아버지, 그의 아우 유발은 "비파와 피리를 다루는 모든 이들" 곧 악사들의 아버지(창세 4,21-22), 그리고 요압이라는 이는 장인(匠人)들의 아버지이다(1역대 4,14).

 

’아버지’라는 말이 쓰이는 용도의 두번째 확장은 이 말이 지닌 ’권위’의 의미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나이 많은 이가 아들같이 젊은 레위인을 아버지라고 부름은, 이 젊은이가 수행하는 사제직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에 합당한 존경심을 드러낸다는 뜻이다(판관 18,10-11). ’아버지’가 존칭으로 쓰이는 것이다.

 

요셉은 ’파라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아마도 뛰어난 현인으로서 파라오의 자문역을 수행하였기 때문일 것이다(창세 45,8. 이와 비슷한 경우를 에스 3,13; 1마카 11,32에서도 볼 수 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 예언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는데(2열왕 2,12), 이 경우에는 ’영적 아버지’라는 뜻도 담겨있다. 엘리사 자신도 임금에게서 아버지라고 불린다(2열왕 13,14). 임금 역시 이 예언자의 권위에 존경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혜를 가르치는 스승은 어린 제자들을 ’아들’로 부르는데(잠언 4,1; 6,20), 이는 제자들이 스승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반증이다. 다윗이 사울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1사무 24,12) 사위가 장인을 부르는 호칭 또는 신하가 임금을 부르는 존칭이다. 그리고 시리아의 장수 나아만을 그의 병사들이 여럿이면서도 함께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2열왕 5,13), 이 경우는 말하는 사람의 수와 관계없이 고정되어 쓰이는 호칭 또는 존칭인 것으로 여겨진다.

 

식구들을 먹이고 보살피는 아버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자녀들을 가엾이 여기고 위로하며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시편 103,13). 혈족이 아닌 다른 이들을 그렇게 돌보는 이 역시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래서 욥은 자기가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였다고 말한다. 같은 의미로 하느님 역시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신다(시편 68,6).

 

이렇게 하느님도 아버지라고 불리신다. 사실 동양에서 생긴 종교들에서는 다르지만, 많은 종교에서는 신의 부성이 근원적인 현상에 속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이스라엘은 주변의 종교들과는 다른 자세를 보인다. 주변 종교들은 신이 하급 신들이나 사람들을 낳고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를 육체적 또는 자연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처럼 출산하는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사람들 곁에 살던 가나안인들의 종교에서는, 신전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성행위가 신들의 곧 자연의 생식력 또는 풍요 다산을 촉진시킨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능적 의식과 기계적이고 손쉬운 신학의 유혹을 줄곧 받으며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과 자기들의 관계를 부자관계로 표현하는 데에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예레 2,27 참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심은 출산이 아니라 그분의 자유로운 선택과 입양의 결과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을 양자로 받아들이셨다. 이로써 둘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된다. 백성의 맨 앞에서 그들을 대표하는 임금도 마찬가지이다.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를 신의 친아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임금도 특별히 선택된 양자에 불과하였다(2사무 7,14-15; 시편 2,7).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음은 이 백성을 창조하신 것과 같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신 것이다(이사 43,5). 이러한 창조적 선택으로도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가 되신다(이사 43,21; 44,2.21; 63,7).

 

이 아버지께서는 사랑과 정성을 기울여 당신의 자녀들을 먹이고 키우고 돌보시며, 위로하고 이끌어주시며, 상속 재산을 주시고 구원을 베푸신다(출애 4,22-23; 이사 1,2; 30,9; 63,16; 예레 3,19; 31,9; 호세 11,1-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그들의 친부모보다도 더 밀접하고 친밀하신 분이심이 드러난다(이사 63,16; 시편 27,10). 이 부자관계에서는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든 사랑이 그 본바탕을 이룬다(시편 103,13; 잠언 3,12). 이러한 부자관계에서 자녀들에게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형제들과 생활에서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이사 1,2; 말라 2,10 참조).

 

구약성서 시대 말기로 오면서 하느님의 부성과 관련된 다른 종교들의 위험이 사그라지자, 유다교에서는 점점 더 자주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동안 집단적으로만 ’아버지’로 불러온 하느님을, 집회서에서 처음으로 한 개인이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이른다(23,1-4).

 

이러한 구약성서와 유다교의 전통이 신약성서에서도 계속된다. 신약성서가 쓰인 그리스 말에는 히브리 말과는 달리 ’조상, 선조’에 해당하는 낱말들이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도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이 ’아버지’로(루가 3,8; 마르 11,10), 또 조상들이 ’아버지들’로 불린다(1고린 10,1).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자기가 그들의 아버지가 된다고 강조한다(1고린 4,15).

 

신약성서의 새로운 점은 ’압바’라는 말로 축약할 수 있다. 이 아람 말은 우리말의 ’아빠’와 비슷하다. ’압바’ 역시 본디는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었다가, 신약성서 시대에는 장성한 자녀들도 사용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호칭으로 하느님을 부르신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그리스 말로는 ’우리 아버지’로 되어있지만(마태 6,9), 예수님께서 하신 아람 말에서는 ’압바’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가지신 그 친밀성과 사랑, 그리고 순종과 신뢰의 강도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마르 14,36). 우리 또한 예수님의 모범에 따라, 그분께서 보내주신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압바’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로마 8,15; 갈라 4,6).

 

[경향잡지, 1999년 4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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