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서의 세계: 죽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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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7 | 조회수3,409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죽음
죽어야 하는 덧없는 인간
인생의 무상을 절감하는 것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공통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나그네 세상’, ‘일장춘몽’, 또는 흰 망아지가 빨리 내닫는 것을 문틈으로 본다는 뜻의 ‘백구지과극(白駒之過隙)’ 등의 격언으로 인생과 세월이 덧없고 짧음을 표현한다. 좀더 사실적인 한자성어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칠십 년 세월도 결국은 지내고 나면 너무나 짧게 느껴지는 것이다. 성서의 사람들도 비슷한 말로써 인생 무상을 노래한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 어느새 지나가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지나이다”(시편 90,10). 칠십이나 팔십 년이 객관적으로는 짧지 않은 세월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그 시간이 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편의 저자는 인생을 옅은 잠 속에 꾼 듯 만 듯하는 “아침잠”에, 그리고 ‘하루살이 풀’에 비유하기도 한다(5-6절).
성서의 사람들이 지닌 이러한 인생관의 근본적인 특징은, 인간의 삶이 철저히 하느님께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편의 저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 말씀하시나이다. ‘사람들아, 돌아가라’”(3절). 시편 39편의 저자는 인생과 그것의 무상을 더욱 직접적인 말로 이야기한다.
“보소서, 당신께서는 제가 살 날들을 몇 뼘 길이로 정하시어 / 제 수명 당신 앞에서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 사람은 모두 한낱 입김으로 서있을 뿐. / 인간은 한낱 그림자로 지나가는데 / 부질없이 소란만 피우며 쌓아놓습니다. / 누가 그것들을 거두어갈지 알지도 못하는 채”(6-7절).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성서의 사람들은 그 해답을 창조에서 찾는다. 인간은 유한한 세상 속에 한시적 곧 죽어야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의 이러한 유한성을 성서는 ‘흙먼지’로써 표현해 낸다. 인간은 흙의 먼지로 빚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본디 다른 모든 피조물과 함께 똑같은 운명을 지닌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그 질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생명의 숨”이다(창세 2,7). 그리고 인간에게는 하느님께 충실함으로써 피조물의 공통 운명인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는 죄를 저지름으로써, 생명의 주님이신 그분과의 관계를 훼손시킴으로써, 그 가능성을 스스로 없애버린다. 그래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 된다. 인간은 하느님께 받은 “생명의 숨”이라는 존재의 바탕을 언젠가는 그분에게 되돌려드리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2,17).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죽음 - 하느님 찬양의 끝
“죽은 이들에게 당신께서 기적을 이루시리이까? / 그림자들이 당신을 찬송하러 일어서리이까? / 무덤에서 당신의 자애가, / 멸망의 나라에서 당신의 성실이 일컬어지리이까? / 어둠에서 당신의 기적이, / 망각의 나라에서 당신의 정의가 알려지리이까?”(시편 88,11-13) 때 이른 죽음의 위협에,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에 시달리는 시편의 저자는 하느님께 대들 듯이 이러한 질문을 퍼붓는다. 여기에서 성서의 사람들이 죽음, 그리고 죽음의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잘 드러난다. 죽음은 한마디로 하느님 찬양의 끝이라는 것이다. 죽으면 더 이상 하느님을 찬미하지 못한다는 것이 성서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지니는 가장 근본적이고 특징적인 생각이다. 죽음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을 더 이상 찬미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생명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찬미로 표출된다. 생명 자체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생명이 다하는 죽음과 그 너머의 세계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도 끝난다. 그래서 성서의 시인은 또 이렇게 노래한다. “저승은 당신을 찬양할 수 없고 / 죽음은 당신을 찬미할 수 없으며 / 구렁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 당신 성실에 희망을 두지 못합니다. / 오늘 제가 하듯이/산 사람, 살아있는 사람만이 당신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이사 38,18-19).
죽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의 바탕을 거두어 가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생명이 소진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이는 속이 빈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 된다. 이러한 죽은 이들이 모이는 곳을 히브리 말로 “셔올” 곧 저승이라고 한다. 성서의 사람들은 이곳을 “어둡고 깊숙한 곳”(시편 88,7), “어둠” 그 자체(13절), 그리고 “멸망의 나라”와 “망각의 나라”라고 부른다(12절과 13절).
이러한 죽음의 세계 자체가 인간에게 무슨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나 죽음의 세계는 어떠한 식으로든 하느님의 경쟁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산 사람들의 세상처럼 하느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곳도 아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물론 저승까지 미친다. 그러나 성서의 사람들은 저승을 일차적으로 하느님께, 그리고 인간에게서 ‘잊혀지고 버려진’ 세계로 여긴다.
죽음의 상대성
내세와 부활이 계시되기 전에는 구약성서의 사람들에게 죽음이 절대적인 것,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었다(여호 23,14; 1열왕 2,2). 그리고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죽음은 일회적이지도 않고 절대적이지도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신명기에 따르면, 모세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법규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반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네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신명 30,15). 계약의 법규를 충실히 지키면, 곧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하면 생명과 그것이 내포하는 행복이 주어진다(레위 18,5; 에제 18,21.28; 33,14-15도 참조). 같은 내용을 아모스 예언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살리라”(아모 5,4). 그러나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곧 하느님과의 관계에 불충하면 죽음과 그것이 내포하는 불행이 주어진다.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주시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기면, 인간은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 된다. “주님이 너의 생명이시기 때문이다”(신명 30,20).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살아있을’ 경우에는, 인간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 죽음이 완전한 끝이 아니라 ‘열린’ 가능성이 된다. 죽음은 유한한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이다. 그러나 이 죽음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현실이다. 무한하신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다. 죽을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안경’을 통하여 “어둠” 그 자체인 죽음을 달리 보게 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절대적 죽음의 상대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죽음이 그 “독침”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1고린 15,55와 호세 13,14).
그리하여 시편 63편의 저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의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4절). “생명”은 이 세상에 사는 인간에게 지고의 선이었다. 생명이 끝나면 모든 것도 끝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생명이 아니라, 그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자애”가 더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이러한 사실을 시편 73편은 더욱 뚜렷이 말한다. “저를 위하여 누가 하늘에 계시나이까! / 당신과 함께라면 / 이 세상에서 제가 바랄 것이 없나이다. /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 제 마음의 반석, /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시옵니다”(25-26절). 하느님과 “함께라면” 생명도, 그리고 몸과 마음이 스러지는 죽음까지도 부차적인 것이 된다. “몫”은 본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 받은 땅, 곧 삶의 바탕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 자신이 당신에게 충실한 이들에게 생명의 바탕이 되신다. 이 생명의 바탕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견고한 것으로 간주되는 “반석”처럼 죽음까지도 넘어서게 된다.
부활의 계시는 구약성서에서 획기적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이사 26,19; 에제 37,1-14; 다니 12,1-3; 2마카 7,9.11.14.23.29 등 참조). 이러한 점진적 계시의 바탕은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으시는”(에제 18,32) 하느님과의 관계이다(지혜 1,13도 참조).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도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하느님, 그리고 그분과의 관계일 따름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필립 2,6-9). 예수님은 이렇게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 속에, 참 사람으로 사시고 단말마의 고통까지 겪으시면서 진정한 인간으로 돌아가신다. 그리하여 죽음 너머의 어둠이 아니라 광명의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다. 인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6) 예수님처럼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 살아갈 때, 그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은 이제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순간일 따름이다.
[경향잡지, 2000년 11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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