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서의 세계: 십자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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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8 | 조회수3,702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십자가
“사람의 아들은 …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마태 20,19).
“빌라도가 ‘도대체 그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으나 사람들은 더 악을 써가며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는 그 이상 더 말해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가 보였으므로 …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다. 총독의 병사들이 … 예수의 옷을 벗기고 대신 주홍색 옷을 입힌 뒤 가시로 왕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린 다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의 왕 만세!’ 하고 떠들며 조롱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렸다. 이렇게 희롱하고 나서 … 십자가에 못박으러 끌고 나갔다. 그들이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만나자 그를 붙들어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그리고 골고타 곧 해골산이라는 데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은 예수께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마시라고 주었으나 예수께서는 맛만 보시고 마시려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 … 거기 앉아 예수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의 머리 위에 죄목을 적어 붙였는데 거기에는 ‘유다인의 왕 예수’라고 적혀있었다. 그때에 강도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는데 … 지나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하며 모욕하였다. 같은 모양으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도 …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예수를 모욕하였다. … 그 중의 한 사람은 곧 달려가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 끝에 꽂아 예수께 목을 축이라고 주었다. 그러나 …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큰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마태 27,23-50).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십자가형 - 최악의 처형 방식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훨씬 전부터 여러 대륙, 많은 민족 사이에서 종교적 징표나 상징, 또는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현재 이란의 페르시아인들이 처형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 처형 방식을 좋아하여, 기원전 330년대에 이스라엘 땅 북쪽의 띠로를 포위 공격할 때 살아남은 그곳 사람 2천 명을 십자가에 매달기도 하였다. 이 띠로를 포함한 페니키아 지방 사람들이 북아프리카에 건설한 카르타고에서도 십자가형을 애용하였다.
서쪽 지중해를 놓고 카르타고인들과 한동안 싸움을 벌였던 로마인들도 바로 이 카르타고 사람들에게서 십자가형을 배운 것 같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이 지중해 전체를 제패함으로써, 기원후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폐지할 때까지, 십자가형이 서양과 근동에서 극형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된다.
로마인들이 이 형벌을 많이 이용하기는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끔찍한 것으로 여겨 자기들과 관련해서는 말하기조차 꺼려하였다. 로마의 유명한 저술가 키케로는 십자가형을 ‘가장 잔혹하고 메스꺼운 형벌’, ‘최악의 처형 방식’이라고 일컬었다. 그래서 대역죄라든가 전쟁 중의 탈영 같은 중죄와 관련해서는 로마 시민에게도 이 형벌을 가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매우 드문 예외였다. 로마인들은 로마 시민권이 없는 자유인, 특히 노예들이 살인이나 강도, 반역이나 반란 같은 것을 저질렀을 때에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그것을 아예 ‘노예 처형 방식’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스파르타쿠스가 노예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죽은 기원전 71년에는,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대로를 따라 6천 명에 달하는 노예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신구약을 통틀어 성서에는 예수님과 두 도둑의 십자가형만 나온다. 신명 21,21-23과 1사무 21,6.9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 구절에서는 처형된 사람의 시체를 나무에 매다는 것이다.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던 효수(梟首)와 비슷한 방식이다. 아무튼 유다인들도 십자가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빌라도에게 외쳐댔던 것이다. 사실 기원전 267년, 시리아 임금 안티오쿠스 4세는 유다교를 박해하면서 많은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사두가이파 출신으로 유다 임금이며 대사제가 된(기원전 103-73년) 알렉산드로스 얀내오스라는 자는 자기의 정적 바리사이들을 8백 명이나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일도 있다.
십자가와 예수님
십자가는 규격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십자가형의 방식도 일정하지 않아, 형 집행자들의 가학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정확히 어떤 모양의 십자가에 매달리셨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가로나무와 세로나무의 길이가 같은 일명 ‘그리스식 십자가’이다. 그러니까 열 십 자(┼) 모양의 것이다. 둘째는, 가로나무가 짧고 세로나무의 아래쪽이 긴 일명 ‘라틴식 십자가’이다(` ). 셋째는, 세로나무가 가로나무 위로 튀어나오지 않는 일명 ‘안토니우스 십자가’이다. 그러니까 영어의 대문자 T와 비슷한 모양의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윗쪽에는 “유다인의 왕 예수”라는 죄명패(罪名牌)가 달려있었다. 그래서 ‘라틴식’이나 ‘그리스식 십자가’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십자가는 일반적으로 높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갈대에 꽂아 그분께 권하였다는 말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발이 지상에서 1m 정도 높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또 몇몇 교부의 증언에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 세로나무에 약간 걸터앉을 수 있는 받침대가 달렸으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장치로 사형수가 편하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의 시간이 더 오래 지속되었다. 십자가 모형에는 더러 발판도 볼 수 있는데, 옛날에는 그러한 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로마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기 전에 먼저 그분께 채찍질을 한다. 채찍은 동물의 뼈나 납덩이가 달린 가죽 끈이었다. 이러한 매질의 본의도는 사형수를 쇠약하게 만들어 십자가의 고통을 줄인다는 것이다. 사형수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 했다. 그러나 십자가 전체를 혼자 나르기에는 너무 무겁기 때문에 가로나무만 날랐다. 이것을 키레네 사람 시몬이 건네받아서 짊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골고타가 어디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왕래가 잦고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었던 곳임에는 틀림없다. 처형장으로 가는 길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을 택함으로써, 사형수의 치욕을 더하게 만들었다. 골고타에 다다른 다음 군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긴 뒤 그분을 드러눕게 하여 가로나무에 손을 못박고 이어서 세로나무에 발을 못박아 세웠을 것이다. 때로는 어깨나 몸통을 밧줄로 묶기도 했다.
이러한 십자가형은 인간이 발명해 낸 가장 악독하고 치욕스러운 처형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서도 심장이나 뇌나 내장 같은 주요 기관(器官)에는 직접 해를 끼치지 않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을 때까지 며칠씩 매달려 있기도 하였다. 죽은 다음에는 동물의 먹이가 되게 방치하기도 하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숨을 거두신다. 특히 채찍질로 기운이 쇠진하셔서 그리 되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시신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그 날로 매장된다(신명 21,21-23 참조).
십자가와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22-24).
하느님께서 구세주로 파견하신 그리스도께서 치욕의 극치인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 유다인들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노예나 대역죄인처럼 십자가형을 당하셨다는 것은 철학적인 그리스인들에게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걸림돌”이다(에페 5,11).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야말로 하느님의 가없는 사랑, 굽힐 줄 모르는 그분의 구원 의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분의 구원 능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명백한 징표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필립 2,8),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느님을 화해시키시고 사람들에게 구원을 마련해 주셨다(에페 2,13-16).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부활과 구원의 영광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경향잡지, 2001년 3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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