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성서의 세계: 십일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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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8 | 조회수4,680 | 추천수1 | |
성서의 세계 : 십일조
바리사이들의 십일조(十一條)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하였다”(마태 23,23 = 루가 11,42). 시라는 1미터 정도 곧추 자라는 다년초로, 유다인들은 향기가 나는 그 씨를 양념으로 썼다. 소회향은 30센티미터 정도 자라는 1년생 풀로, 그 씨를 빵이나 다른 음식의 맛과 향을 돋우는 데에 썼다. 박하는 매우 흔하였고, 시라와 소회향은 들에서 그냥 자라기도 하지만 경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매우 하찮은 것까지 꼬박꼬박 십일조를 내면서 정작 더 중요한 실천 사항들은 간과하고 무시해 버리는 바리사이들의 행태를 예수님은 꾸짖으신다.
십일조는 일반적으로 주요 농산물, 그리고 나중에는 축산물에 국한하여 그것을 생산한 사람이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양념이나 향료로 쓰는 소소한 것까지, 또 자기들이 직접 경작하지 않고 사들인 것까지 정확하게 십분의 일을 달아 바쳤다. 농부가 십일조를 내지 않고 상인에게 판 물건을 샀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아예 가능하면 다른 바리사이에게서 농산물이나 다른 물건을 사들이려고 하였다. 그래야 율법에 따라 정확히 십일조를 낸 물건임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세세한 것까지 엄격히 지키려고 갖은 정성을 기울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그렇지 않았다. 십일조와 관련해서도 그들은 내야 하는 것만 내고, 내야 하는 것도 어떻게 해서 내지 않게 되면 벌이를 하였다고 기뻐하였다.
여기에서 십일조를 한자로 어떻게 써야 옳으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십일조의 근본 이해와도 관련된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조’를 두 가지로 적는다. 하나는 ‘구실 조(租)’이고(‘구실’은 옛날 나라에 바치던 세금을 이르던 말이다), 다른 하나는 ‘가지 조(條)’이다. 十一租라고 하면 십분의 일을 내는 세금이 된다. 그리고 十一條라고 하면 (이 한자를 처음 채택한 이들이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하였는지 알 길이 없지만) 나뭇가지 열 개 가운데에서 하나 곧 십분의 일을 뜻하게 된다. 사실 구약성서의 히브리 말과 신약성서의 그리스 말에서도 그냥 한 낱말로 ‘십분의 일’을 뜻하는 용어가 쓰인다. 그리고 성서에 나오는 십일조는 전체적으로 바리사이들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종의 세금만이 아니라 자원 예물의 성격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十一租보다는 十一條가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십일조의 기원
고대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십일조가 실행되었는데, 이스라엘에서는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형태로 시작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우선 창세기 14장을 보면, 승전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이 예루살렘의 임금이며 “지존하신 하느님의 사제”인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내준다(14,21). 그런데 전쟁 노획물에 대한 십일조는 그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베델에서 꿈을 꾼다. 자기가 있는 곳에 하늘까지 닿는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위를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본다. 또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땅과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집”이며 “하늘의 문”이라고 하면서, 그곳을 성소로 지정하고 또 하느님에게 십일조를 바치겠다는 약속을 한다(창세 28,10-22). 그리고 사무엘 예언자는 다른 민족들처럼 자기들에게도 임금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왕정제도의 여러 가지 폐해를 열거하는데, 그 가운데에 십일조도 들어있다(1사무 8,15.17).
창세기 14장과 28장의 십일조가 성조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서술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서의 다른 많은 구절처럼 이것들 역시 이야기가 쓰여지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정시대에, 사무엘서가 예고하는 것처럼 임금에게 십일조를 낸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십일조가 예루살렘과 특히 베델이라는 성소 그리고 임금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사실 베델은 통일 왕국이 솔로몬 이후에 갈라진 뒤 북부 왕국의 왕실 성소였는데, 아모스서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곳에 십일조를 바쳤다(아모 7,13과 4,4).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에서 실행된 십일조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짐작하기도 한다. 곧 이스라엘인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팔레스티나 땅에 살던 가나안인들은 십일조를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바치고, 다른 곳에서는 임금에게 바치기도 하였지만, 이스라엘에서는 백성도 이용하는 왕실 성소의 유지비로 임금에게 내다가 나중에는 성소의 관리자에게 직접 갖다바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
십일조의 규정
이러한 십일조는 모세 오경의 법전 세 군데 곧 신명기, 그리고 레위기와 민수기에서 상세히 규정된다. 가장 먼저 저술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신명기에는 두 가지 십일조가 나온다. 먼저 해마다 밭에서 나는 모든 소출 곧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의 십분의 일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간다(신명 12,6-19; 14,22-27). 그곳에서, 곧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온 가족과 함께 그것을 먹는다. 성전에서 너무 멀리 살아 물건을 직접 가져가기 어려우면 돈으로 바꾸어 가서 그곳 성전에서 음식을 장만할 수도 있다. 이렇게 잔치를 벌일 때에 자기 동네에 사는 레위인도 청해야 한다. 성소 또는 성전에서 봉직하는 레위 지파 사람들은 사제들과 함께 다른 지파와 달리 땅을 따로 받지 못하고 백성이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민수 18,20). 그런데 세번째 해마다 십일조를 자기가 사는 곳에서 소비한다(신명 14,28-29; 26,12-15). 곧 제도적 무산층인 레위인, 그리고 사회적 무산층인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신명기의 저자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구절들이 여러 시대, 여러 곳에서 유래하는 관습이나 규정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일조의 의미는 명백하다. 국토 전체가 임금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다른 나라와 달리, 이스라엘에서는 땅을 비롯한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소유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은 자기들이 임시로 하느님께 받은 그 땅에서 난 것들의 십분의 일을 성전에 바침으로써, 그리고 가난한 동포들과 땅의 소출을 나눔으로써 그러한 믿음을 실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레위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이른바 ‘사제계 법전’에 따르면, 십일조가 해마다 레위인들에게만 돌아간다(레위 27,30-33; 민수 18,20-32). 레위인들은 또 그들대로 자기들이 받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 사제들에게 준다. 이렇게 이 법전의 관심은 신명기와 달리 레위인과 사제에게만 집중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는 따로 하는 것으로 전제된다.
이러한 십일조는 일차적으로 밭과 과일나무에서 나는 농산물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레위기 27,32-33의 규정에서는 가축의 십일조도 언급된다(2역대 31,6도 참조).
십일조의 실천
규정이 곧바로 실천에 옮겨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말라기 예언자는 백성이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약탈”하는 것이라고 꾸짖는다(말라 3,8). 삯을 내지 않고 남의 땅을 경작하여 밭 주인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의 생활을 서술하는 느헤미야서에 따르면, 아예 책임자들이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십일조를 거둔다. 그리고 그렇게 모아들인 물건들은 성전 창고에 저장하고서는 필요에 따라 사용한다(느헤 10,32-39). 그런데 여기에서 사제계 법전과 다른 점이 또 드러난다. 곧 레위인들이 먼저 백성에게서 십일조를 받고 거기에서 다시 십일조를 사제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레위인과 사제의 구분 없이 성전에서 봉직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일조를 바친다는 사실이다(느헤 12,44-45).
모세 오경에 들어있는 율법의 규정들은 본디 여러 시대와 장소와 관습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신약성서 시대가 다가오면서 율법은 그렇게 다양한 유래와 관계없이 전체적으로 또 조목 하나하나를 충실히 준수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독실한 신도들은 세 가지 십일조를 내기도 한다. 예컨대, 기원전 200년경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비트서에 따르면, 경건한 유다인의 본보기인 토비트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영원한 규정에 쓰인 대로”, 곧 “모세의 법에 쓰인 규정에 따라” 해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간다(토비 1,6`-`8). 먼저 여러 가지 제물을 사제들에게 주어 하느님께 바치게 하고 나서, 밀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과 석류와 무화과와 다른 과일들의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낸다. 이것이 첫째 십일조이다. 둘째 십일조는 돈으로 환산하여 가지고 가서는, 신명기 14,24-27의 규정에 따라 성전에서 잔치를 베푼다. 셋째 십일조는 고아들과 과부들과 이방인들과 함께 먹기도 하고 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이 토비트의 이야기에도 나오듯이 후대에는 십일조의 대상이 더욱 넓어진다. 애초에는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처럼 팔레스티나 땅의 세 가지 주요 농산물만 그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서두에서 본 것처럼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 같은 소소한 농작물까지 포함되고, 결국에는 모든 수입이 십일조에 포함되기에 이른다. 성서시대의 십일조에 관해서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 면들이 있다. 아무튼 십일조는 유다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도 오랫동안 지켜졌다. 그리고 우리 나라 개신교에서는 지금도 폭넓게 실행하고 있다. 십일조를 내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고 또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한 표현으로서, 그러한 사랑 위에서만 의미가 있다.
[경향잡지, 2001년 10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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