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자료실

제목 [신약]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1)
이전글 [구약] 지혜문학: 지혜서 - 의인의 불사불멸과 지혜에 대한 가르침  
다음글 [신약]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2) |4|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1 조회수8,469 추천수1

[성서의 세계]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1)

 

 

복음성서는 그 산지인 신앙 공동체의 고유한 당대 여건과 필요에 따라 씌어졌다. 도밍고회 소속 저명한 성서학자인 W.J. 헤링턴 신부는 이런 바탕을 깔고 예수님 자신의 입을 빌어 직접 이야기를 하는 시도를 통하여 복음 이야기를 색다르게 펼쳐 보인다. 다행히 필자는 보스턴에서 한 학기 동안 그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먼저 마르코 복음에 이어 요한 복음을 다룰 예정이다. 이 글은 그의 저서 《예수 이야기》를 크게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첫째 마당 : 예수님의 사명

 

나는 고향 나자렛을 떠나 해방절과 무교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했다. 그곳으로 가는 지름길은 남쪽으로 곧 바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가려면 그 중간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야 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객들을 싫어하고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남쪽 유다의 예루살렘 성소에 필적하는 성소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가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르단 강을 건너서 데카폴리스나 페레아로 둘러 가는 길이 좋을 듯하다. 사막과도 같은 삭막하고도 건조한 불모지의 그 먼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멀리 풍부한 수원과 열대 식물들로 가득한 오아시스인 예리코를 내다보면서 요르단 강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갈릴래아에서 온 순례객들이 먼저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들이 강을 건너 계속 가질 않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들에게 가까이 갔을 때 놀랍고 기괴한 차림을 한 사람의 외침을 서서 듣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낙타 털옷에 가죽띠를 매고 있었다. 분명 이는 엘리야 예언자가 입었던 의복을 즉시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불같은 말씀들을 토해내면서 가르치고 있다.

 

이 거침없는 열변은 아모스 예언자를 또한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가르침을 마무리하면서 요르단 강으로 향하는 차비를 차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 갔다. 일부 사람들은 이미 요르단 강기슭에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이나 기타 지역에서 와서 그의 모습을 보고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요한 세례자 (마르1,1-13)

 

나는 그의 이름이 요한이라고 들었다.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터였다. 그런데 이제 여기 한 예언자가 나타난 것이다! 구름처럼 사람들은 요르단 강으로 몰려들었다. 요한은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쳤다. 사람들의 마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자신들의 죄스러움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강하게 권고하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과거를 깨끗이 없애버리기 위해 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 광경을 보면서 그 모습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의 쇄신, 다시 말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무관심과 불충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염원해 왔었다. 그런데 그것이 눈앞에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가 강으로 내려갔다. 요한을 홀로 마주 대하게 되고, 잠시 사람들이 조금 떨어져 둘러 선 그 때, 나는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하늘이 갈라지며 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 그것은 아빠(Abba)의 음성이었다! 내 가슴은 기쁨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분이 나의 아빠이시며, 나는 그분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 관계는 너무나도 명백하고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는 그 즉시 이 목소리는 바로 그분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가! 바로 지금 다가 온 것이다. 결국 나는 전적으로 아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만 일단 이 모든 것을 접어두어야 했다. 나는 당분간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페레아 광야로 가서 지내면서 나의 아빠와의 대화가 필요했다. 광야라는 곳, 나는 대낮의 따가운 햇볕과 별밤의 적막함 속에 홀로 있었다. 사막의 새들과 작은 동물만이 주변에 있을 뿐이었다. 나의 사명감이 주는 중압감에 비해 보면 이런 짐승들의 존재가 불안이나 위협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정겹다고 할 수 있어 나를 미소짓게 했다.

 

옛 예언자들도 그 사명수행이 결코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내 마음 속에 예언자 예레미야가 계속 맴돌았다. 나의 길은 그에 못지 않게 가시밭길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생각은 나를 전율시켰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을 들었다. 나는 아빠께로 돌아가 평정을 얻었다. 그분은 나와 함께 계셨으며, 앞으로도 언제나 그러실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 (1,14-15)

 

나는 세례를 받았지만 요한의 제자들처럼 그의 제자가 되어 함께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한에게 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나는 유다 지방으로 갔으며, 요한은 대담하게도 사마리아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갔다. 나는 그의 두려움없는 용기와 소신있는 처신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래아 지역으로 가자마자 즉시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분명 일찍이 헤로데 왕의 잘못된 결혼에 직언을 서슴지 않고 바로 꼬집어 지적했기 때문에 헤로디아의 앙심을 사고 있던 터여서 아마 그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요한의 목숨이 어떻게 될까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처지가 나 자신과 별로 다를 바 없을 것 같은 조짐에 전율을 느꼈다. 요한의 사명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분명 그 때부터 나의 사명은 시작되었다. 나는 갈릴래아로 갔다.

 

나는 요한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 큰 호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는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가 입은 의복은 엘리야 예언자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의복보다도 그는 엘리야가 보여준 엄격함을 지녔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그는 엘리야가 가르멜 산정에서 바알 신의 예언자들을 처단한 사건과 야훼 신앙과는 동떨어진 아합왕과 이사벨 왕비를 저주한 말씀들을 연상시켜주는 것이었다.

 

그의 메시지는 아모스 예언자의 준엄한 메시지와 비슷하였다. 그랬다. 그는 하느님의 사람이며, 하느님께 변함없이 충실했다. 하지만 그는 나만큼 아빠(Abba)에 대해 제대로 다 알지는 못하였다. 나의 메시지는 요한의 메시지처럼 심판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나는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자 요한의 유형에 한정될 수 없으며, 앞으로 그럴 리도 없을 것이었다.

 

나의 메시지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로운 복음의 선포인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로운 시간과 순간들이 다가왔다. 아득한 옛날부터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당신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 : “너를 사제들과 거룩한 민족의 왕국이 되게 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옛날부터 그 조짐과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느님은 그 나라를 백성들 안에서, 곧 다양한 단체들을 통하여 구상하시고 준비하셨다. 백성들에게 율법(Torah)과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생활을 바쳐주는 두 기둥과도 같았다. 바리사이들은 민초들 가운데 살면서 또 성전 예식을 중시하면서 율법을 너무 세심하다 할 정도로 엄격히 준수하려 했다.

 

쿰란 지역에 사는 수도승들인 에세느 사람들은 공적 사제직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동떨어져 살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들이야말로 민족들 가운데 사제로 선별된 이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극단적인 성격의 단체로써 자유를 쟁취하려는 열혈당원(熱血黨員)들은 율법과 전통을 준수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입어 무력으로 저항하여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열혈당원의 경우, 이 단체가 나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사실 과거에는 아빠가 전사(戰士)의 모습으로 비춰지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했던 경향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하느님 당신은 인간적인 적의의 얼굴을 드러내실 때도 있었으나 한번도 전쟁과 폭력의 신이셨던 적이 없으셨다.

 

그렇다. 당신은 권능의 하느님이셨지만 결코 무력적인 분은 아니셨다. 당신은 파괴와 폭력과 죽음을 결코 바라지 아니할 것이다. 열혈당원들은 인내심이 없었다. 이들은 누구에게도 자신들의 의견을 설득시키려 하지 않았으며 오직 과격한 냉철함으로 관철하려는 태도만을 지녔다. 바리사이들은 그렇게 야단스럽게 눈에 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배타적인 성향을 지녔다. 특히 죄인들에게 조금의 관용도 베풀지 않았다.

 

쿰란의 수도승들은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는 빛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자녀들을 미워하라.” 여기에는 항상 죄인들을 무시하고 소외시키는 울타리가 있었다. 그러나 아빠에게는 누구든 무시와 소외란 있을 수 없다. 당신은 모든 이의 아빠이시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 다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이다.

 

‘하느님의 나라’의 참된 의미가 밝혀졌다. 그것은 실로 단순하다. 곧 하느님 자신이 구원이시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를 나의 인격, 삶의 방식과 말씀들을 통해서 드러내셨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라고 말씀하셨다. 이 하느님을 선포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한다는 것과 같았다. 나의 선포는 참으로 모든 이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되었다.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복음’, 이것이 나의 메시지였다.

 

[월간 빛, 2003년 11월호, 이재수 시몬 신부(큰고개성당 주임)]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