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자료실

제목 [신약]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4)
이전글 [신약]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3) |2|  
다음글 [신약]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5) |1|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1 조회수6,142 추천수2

[성서의 서계]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4)

 

 

이방인들에게로 가다 (마르5,1-20)

 

파도를 잠재운 뒤 즉시 우리는 게라사 지방에 다다랐다. 몰골이 무섭게 미친 남자가 우리를 만나려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았고 절망적으로 치유 받기를 바랐다. 병은 악의 결과라는 관점에서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너무 무섭게 미쳐서 수많은 악마의 무리에 사로잡힌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나는 그를 치유했다. 그는 나의 제자로 따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에게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에게 데카폴리스로 가서 하느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말하라고 했다. 나는 뒤에 그가 자신에게 그렇게 한 이는 예수라고 말한 것으로 들었다. 이때부터 내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고 사람들이 말할지도 모른다.

 

나와 미친 사람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그런데 뒤에 여기 첨부되었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거기엔 내가 악마의 무리에 대해 무언가를 대처한 것으로 나온다. 어떤 전승에 따르면 악마는 어떤 한 장소에 집착하여 살기를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있던 곳에서 제거되기를 무척 싫어한다고 되어 있다. 나의 권능을 두려워하면서 악마는 있던 자리에서 축출될까봐 머물게 해달라고 청했을 성싶다.

 

그런데 악마들은 이천 마리의 돼지 떼 안에서 머물 수 있는 새로운 자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것은 악마에게 걸맞지 않는 짓거리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돼지 떼들이 호수에 빠져 몰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미소를 지었다. 하기야 그 얘길 듣는 유대인이라면 물론 누구라도 악마들의 은신처로는 참으로 걸맞은 돼지 떼들이 몽땅 죽었다는 이야기에 조금도 어색치 않고 안타깝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무섭다기보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당신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하였습니다 (마르5,21-43)

 

갈릴래아로 다시 돌아가 호숫가와 사람들에게로 갔을 때 괴로운 표정의 회당장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체면도 잊은 채 땅바닥에 엎드려 내 발 밑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심하게 앓고 있는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애걸하였다. 가서 내 손을 그녀의 머리에 얹기만 해도 그녀는 나아서 이전의 건강한 삶으로 회복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그를 따라갔다. 가는 도중에 어떤 이가 내 겉옷을 만져 내 치유의 힘이 뻗어 나가는 것을 감지했다. 어떤 이가 내 옷을 만졌다고 말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제자들은 군중에 떠밀려 그냥 밀쳐진 것인데, 누가 만졌다니 참으로 딱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고질적인 하혈병으로 고생하던, 그래서 종교적으로 불결한 여인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이 나를 만졌다면 나 역시 종교적으로 불결하게 되었다고 간주했을 것이다. 그녀는 나병환자들처럼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칠 리가 없었지만 본인의 뜻과는 달리 아주 소외되어 살았다. 나는 엄격한 세정법 의무가 너무 싫었다. 나는 육체적이고 사회적인 고통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비난받을 일을 저지른 이 여인을 질책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녀의 믿음을 참으로 칭찬했다. 그리고 부드럽고 갸륵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의미로 “딸이여!”라고 그녀를 불렀다.

 

회당장의 하인들이 급히 달려왔다. 소녀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믿음을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의 집에서는 벌써 곡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숙연하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긴장감이 흘렀다. 열두 살 난 소녀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명령하자 소녀는 살아났다. 병중에 먹지를 못하던 소녀가 식욕을 되찾자, 부모에게 먹을 것을 딸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넋 나간 모습으로 그 모든 것을 지켜봤다.

 

치유된 그 여인의 믿음은 단지 육체적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구원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나는 소녀를 살려내어 더 깊은 차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 구원받고 준비하게 했다. 또는 내가 바라는 믿음은 소녀의 아버지의 믿음이나 지붕까지 뜯으며 들여보내는 이들의 굳건한 믿음과 같은 전형적인 믿음이었다. 죽음으로부터 살아나는 것이 비단 육체적 소생에 한정되겠는가! 믿음은 그 이상의 것으로 우리를 이끄는 힘이요, 생명이요, 구원이다.

 

 

고향 나자렛 출신의 예언자 (마르6,1-6a)

 

나는 나자렛을 공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 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달리 기대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이 때문에 결국 나의 가족이 나를 붙들려고 가파르나움까지 가지 않았는가! 어린 시절부터 늘 들르던 회당에서 내가 처음으로 가르쳤을 때, 나의 이웃들은 이에 놀라고 분개했다. 그들은 시골 소년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나를 믿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기적도 행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떤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격언을 머리에 떠올렸다. 마음속에 괴로운 물음들이 맴돌았다. 이스라엘도 나자렛과 같은 길을 갈 것인가?

 

 

제자들의 파견 (마르6,6b-13)

 

열두 제자들은 이제까지 내가 일하는 것을 보면서 나의 가르침에 익숙해졌다. 나는 제자들을 시켜 모험을 시도해 볼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제자들이 서로를 돌보면서 다니도록 둘씩 짝지어 파견했다. 순회 설교자처럼 그들은 수월하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필요하면 즉시 서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도록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처럼 처신할 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제자들이 아직은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여 다른 이들을 설득하며 함께 나눌 수 있는 수준까지는 되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내가 하느님의 통치를 선포한 것과 같은 정도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며칠  후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기쁨으로 크게 고조되어 있었다. 그들도 치유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그 사명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지 그들도 알게 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마르6,17-29)

 

그동안 그들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세례자 요한이 기막힌 상황 속에서 살해되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의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경건히 장례를 치렀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나와 나의 제자들에게 조용히 모든 것을 돌이켜 보는 기회가 되었다.

 

 

빵의 기적 (마르6,30-44)

 

우리는 쉬려고 배를 타고 서쪽 호숫가로 갔다. 아주 조용한 곳을 찾아서! 사람들은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했다. 너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나는 그들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생각했다. 이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은 처지가 아닌가! 내가 이들에게 목자가 되어야겠다. 나는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나의 말에 굶주려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늦어지면서 제자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헤쳐 보내 마을로 가서 각자 음식을 사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하자고 건의했다. 사람들은 급히 서둘러 이곳에 왔기 때문에 그야말로 대책없이 온종일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우리가 지금 광야에 와 있다고 강조했다. 그들이 광야의 의미를 알고 착한 목자라는 의미를 알아들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짐짓 제자들의 처신을 떠보았다. :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사정도 모른다는 투로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만, 어디 돈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대꾸했다. 나는 그들에게 배에 가서 먹을 것이라도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결국 제자들이 가져온 것은 빵 다섯 개와 마른 생선 두 마리가 전부였다.

 

나는 오천 명이 남짓한 사람들을 오십 명 내지 백 명씩 떼지어 자리에 앉게 했다. 그리고 빵을 들고 하늘을 보며 아빠께 축복을 빈 후 떼어 제자들에게 준 후, 사람들에게 그 빵을 떼어 나누어주게 하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게 했다. 사람들이 다 먹은 후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열둘이라는 것은 상징적인 숫자이다. 나는 엘리야가 보리 빵 이십 개로 백 명을 먹인 사건을 떠올렸다. 그리고 물론 만나 사건도 기억했다. 여기 이 빵도 하늘로부터 내려 온 것이었다. 나는 그 엄청난 노천 식사의 주방장이었다.

 

 

물위를 걸으시다 (마르6,45-56)

 

나는 배로 제자들을 보내어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했다. 그동안 기도하러 그곳을 빠져나가 언덕배기로 갔다. 참으로 드물게 갖는 기회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새벽 세 시까지 기도하다가 제자들에게 갔다. 강한 바람 때문에 제자들이 탄 배는 멀리 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물위를 걸어오는 나를 보고 제자들은 혼비백산하듯 무서움에 떨었다. 제자들은 귀신이나 헛것을 보는 듯 질겁했다. 나는 말을 걸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배 안에 들어가 즉시 바람을 그치게 했다. 그들은 할 말을 잊은 듯 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내가 제자들을 지나치게 기대했는가? 그러나 나는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었고, 특별히 따로 시간과 공간을 내어 특별히 그들을 가르쳤다. 우리는 겐네사렛 호수 서쪽으로 돌아가 다시 사람들 가운데 들어갔다.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하시다 (마르7,1-23)

 

또다시 예루살렘의 율사들이 왔다. 그들은 그 지방에 사는 바리사이들과 함께 씻는 예식에 대한 문제를 두고 나를 걸고 나섰다. 그들은 일부 나를 따르는 이들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예식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지나친 관심으로 율법의 세부 규정들을 만들어 준수함으로써 율법의 보호막을 형성했기 때문에 그런 손 씻는 예식 같은 것에 아주 민감했다. 나는 그들의 열성은 인정하지만 다만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나는 그들의 표적이라는 걸 알았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습니까?”라는 그들의 도전적인 물음이 그 점을 입증했다. 사실 그들은 그 즉시에 나를 고발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조상들의 전통이며 구전 전승이라고 할 수 있는 할라카(Halalkah)를 지키지 않았다. 이 전승은 여러 세대에 걸쳐 랍비들이 모세의 율법에 많은 규정과 실천 사항들을 첨부한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법에 인간적인 요소들을 첨가한 것으로 서로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이는 동정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결의론의 맛이 났다.

 

나는 결의론의 폐해에 대한 극명한 예를 들었다. 봉헌하겠다는 구체적인 서원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코르반(Korban)을 선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모에게 그 당장에 봉양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재산이나 부동산이라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뜻에서 ‘코르반’하고 서원하면 부모에게 봉양할 수 없었다. 일단 서원한 재화는 거룩한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그는 그 재화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그러한 서원은 실은 법적으로 근거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효도의 책무를 법적으로 회피하는 간사한 방법으로 이를 악용했다. 그러나 율사의 시각으로 보면 그것은 법적인 구속력이 있었고 관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율법이 명하는 부모 효도라는 큰 의무를 회피했다. 나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예들을 많이 들어 설명했다.

 

나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나는 결의론에 마음을 몰두하여 합당한 균형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웠다. 하찮은 세부 규정이 점차 중요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런 법과 실천은 사람에게 강박관념을 주었다. 사람은 그 법을 지키든지 아니면 법을 떠나 죄를 짓든지 둘 중에 한쪽에 서야 했다. 그것은 탐욕보다 더 나쁜 하나의 병이었다. 결의론자들은 꼭 권위있는 직분을 통하여 상처받기 쉬운 이들의 삶을 더욱 어렵고 불쌍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를 참지 못하겠다.

 

사람들은 이 긴장된 상황을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지켜보며 모여들었다. 나는 말없이 나에게 동조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사상을 크게 칭송하고 존경하였으나, 그들에게 오히려 푸대접을 받는 처지에 있었다. 사람들은 나의 색다른 처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수수께끼와 같은 다음 말로 사람들을 계속 이끌어 갔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곱씹도록 내버려뒀다.

 

내가 혼자 있을 때 제자들이 와서 그 수수께끼와 같은 나의 가르침이 무슨 뜻이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제 힘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다소 실망감을 느꼈다. 나는 그 의미는 간단한 것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소화과정을 잘 생각해 보라. 나는 음식이 씻는 예식에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기에 음식을 예로 들었다. 음식은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가 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음식은 종교 행위의 중심이요 원천인 마음에 크게 관련되어 있지 않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히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악과 죄이다.

 

한 번에 나는 기존의 씻는 예식의 개념을 파기했다. 거룩함이란 ‘불결’에 반대되는 ‘청결’이라는 차원으로 볼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영역이 아니라 ‘행위’의 영역에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며 인격적 책임에 관계되는 것이다. 아마 율사들은 내 가르침을 사람들에게서 이미 듣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 그들은 내가 그들자신이나 그들의 조직체에 하나의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고 보았을 것이다. 나는 처음에 한 말을 여전히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위축시키지 않고 살며 선포할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식탁에서 죄인들과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 폭압에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낼 것이다.

 

[월간 빛, 2003년 2월호, 이재수 시몬 신부(큰고개성당 주임)]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