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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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8-01-11 | 조회수4,645 | 추천수1 | |
[성서의 세계]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5)
이방 여인 (마르 7,24-30)
내 활동의 중심 무대를 주로 갈릴래아 지역으로 삼았지만, 이스라엘 이외의 띠르라는 이방 지역으로 간 적도 있었다. 거기서 크게 기억나는 일은 자기 딸을 낫게 해달라고 애걸하였던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여인과의 만남이었다. 내가 이방인의 치유는 규정상 허용될 수 없다고 말하며 거절한 이유는 나의 사명이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내 빵은 개와 같이 업신여김을 받던 이방인에게 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개라 할지라도 빵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웃음이 나오면서도 흡족했다. 제대로 호적수를 만난 것이다. 그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사실 그녀의 딸은 말끔히 나았는데, 아마 여기서 최초로 역설적 처신을 보였던 것 같았다. 그 같은 신선한 믿음에 나는 응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믿음이 그 곳과 이스라엘 안에서 발견되면 좋으련만!
우리는 오른쪽으로 둘러 데카폴리스 지역으로 왔다. 사람들은 귀먹은 반벙어리를 나에게 데리고 왔다. 그의 귀와 혀를 만졌더니, 그는 들을 뿐만 아니라 말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당부했지만 그럴수록 더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다! 그는 “그분이 좋은 일을 다 하셨다.”고 외쳤다. 사람들이 내가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했다고 말할 때 이사야 예언서의 대목을 염두에 두면서 메시아의 구원이라는 입장에서 나의 처신을 보았던가?
나는 이방인 지역인 이곳 데카폴리스에서도 역시 사람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기적적 치유가 일어나자 갈릴래아 못지 않게 사람들이 몰려와 들끓었다. 사람들은 나흘이나 나와 함께 있었고 부족한 음식은 동이 났다. 그 점이 걱정이 되어 제자들에게 말했다. 정말 사람들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사람들을 굶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어떤 이는 집을 떠나 멀리 왔기 때문에 돌아가는 도중에 허기로 쓰러질지도 몰랐다. 제자들의 생각은 짧았다. 그들은 사막에서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다 먹일 수는 없지 않느냐고 불쑥 되받았다. 그들이 가진 빵이 모두 일곱 개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그 빵을 들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빵을 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생선도 몇 마리가 있어 그렇게 했다. 남은 음식을 모으니 일곱 광주리가 가득 찼다. 광야에서의 빵의 기적은 이곳 이방인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며, 이는 첫 번째 기적을 비슷하게 이어 받은 것이었다. 첫 번째 기적 때는 유다인들의 지역에서 남은 음식을 모았을 때 열두 광주리나 되었었다. 유다인들을 위한 빵과 이방인들을 위한 빵이었다.
귀먹은 반벙어리 (마르 7,31-37)
갈릴래아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즉시 바리사이들의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정면 도전을 불사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들은 하늘의 징표를 요구했다. 그들은 내가 예언자라고 주장했다고 전제하고, 내가 정말 예언자로서 적합한가를 빗대어 물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를 무너뜨릴 무언가를 찾아내기에 골몰했던 것이다. 그들을 상대로 시비를 벌일 마음이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표징을 주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다른 표징을 줄 것이다. 나는 그들과 호수를 떠났다. 나는 그들을 하느님의 현존에서 동떨어지고 눈먼 상태로 두었다.
빵 한 덩어리 (마르 8,1-21)
나와 제자들과의 관계는 베싸이다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정점에 달했다. 우리가 서둘러 그곳을 떠났기 때문에 미리 빵을 준비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배 안에 빵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좋지 못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라는 말을 하여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는 기회로 삼았다. 하지만 제자들은 내가 빵이 부족한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답답한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까? 당신들도 바리사이들처럼 그렇게 완고합니까? 눈멀고 귀가 먹었습니까? 당신들을 오천 명이나 사천 명을 빵 몇 개로 떼어 나누어 먹인 후 남은 조각을 얼마나 거두어 들인지를 벌써 잊었습니까?”하고 꼬집는 투로 말했다.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제자들이었다. 내가 말한 단 한 마디라도 명심했으면 좋았으련만! 제자들은 내가 하나의 빵이라는 말을 알아들어야 했다. 나는 호숫가 이리 저리로 다니면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상징적으로 함께 엮어내려 노력했었다.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함께 먹임으로써 그들 모두를 하나로 나에게 거두어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사명 수행은 이스라엘이라는 한정된 테두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베싸이다의 소경 치유 (마르 8,22-26)
베싸이다에서 소경을 치유한 사건은 제자들을 교육시키기에 딱 좋은 예가 되었다. 제자들은 그 소경처럼 눈이 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소경의 눈을 열어 준 것처럼 제자들의 눈도 열어줄 것이다. 단계적으로 치유했다. 내가 그의 눈에 손을 갖다 대면서 보라고 하자, 그는 사람들이 지나는 것을 아련히 보게 되었다. 다시 한번 더 눈에 손을 갖다 대자 그는 명백히 보게 되었다. 그에게 그 마을로 들어가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물론 소용없는 것이었지만. 나는 두 단계로 시력을 복구시킴으로써 신앙을 갖게 되는 두 단계를 비유로 가르치면서 제자들의 시력을 치유할 것이다. 내가 제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낌새라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마르 8,27-33)
갈릴래아에서의 나의 사명은 끝났다. 무엇이 나를 기다리든 나는 유다 지역의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이곳 갈릴래아에 온 율사들이 계속 면밀히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켕겼다. 우선 그들의 소굴로 들어가려 했다. 이런 와중에 나의 제자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하여 헤르몬 산자락에 있는 필립보 가이사리아의 조용한 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나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를 물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이라고 했다. 혹 어떤 이들은 내가 엘리야나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고도 했다. 사람들은 메시아 시대의 징조로 엘리야나 예언자들 중의 한 예언자가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제자들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성급한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대신해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했다. 여기까지는 아직 좋았다. 문제는 그 메시아의 역할이 무엇이냐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베드로가 뭇 나라들을 다스리고 유다 제국의 정복자로서 대중적 기대를 한 몸에 안고 개선하는 메시아를 심중에 두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선택받고 도유된 하느님의 은혜로운 통치의 구체화된 인물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를 통해 아빠는 당신의 원의를 드러내셨다. 물론세상이 말하는 그런 류의 통치자가 아니었다. 누구는 다스리고, 누구는 봉사하는 그런 제국도 아닌 것이었다. 나의 길은 개선가도 없는 실패의 길이었다. 고통과 끔찍한 죽음이 내 눈앞에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다 하더라도 아빠의 말씀은 끝까지 남아 있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전적으로 당신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머잖아 고통과 죽음을 받을 것이라는 나의 경고는 베드로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다. 베드로는 발끈하며 “당신이 그리스도이신데 고통과 죽음을 당하실 것이라니 말이 됩니까? 그리스도가 죽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라고 반발했다. 이는 일찍이 이곳저곳에서 별 반발이 없이 불리던 메시아적 지도자라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보다 더 심각했다. 이런 위험한 단계에서 나의 일을 시작하려 했다. 그리고 내가 정말 필요한 일은 일부 지지자들의 무리한 희망 사항을 애초부터 뿌리뽑는 것이었다.
나는 베드로를 될 수 있는 한 엄하게 꾸짖으며 말했다. “내 뒤로 물러서라. 사탄아! 하느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만 말하는구나.” 베드로는 물론 상처받았다. 그는 가장 헌신적으로 나를 따른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나의 목표에 어긋나는 처신을 한 그를 내가 반대자로 낙인찍었던 것이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그의 원의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이런 충격에서 빨리 벗어날 것이고, 결국 나를 전적으로 따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열정적인 자신을 회복할 것이다. 역시 그는 내가 그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곧바로 깨달았으며, 자신의 헛된 꿈을 잊을 것이다.
[월간 빛, 2004년 3월호, 이재수 시몬 신부(큰고개성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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