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신약성경의 사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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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6-06 | 조회수3,315 | 추천수0 | |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10. 신약성경의 사랑
신약 성경의 일관된 주제는 ‘사랑’이다. 이 사랑의 기준은 무엇일까. 또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 도대체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성경에 정확한 해답이 나와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그 기준을 ‘황금률’(黃金律, Golden Rule)이라고 부른다. 그 황금률은 이렇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 31)
또 사랑의 이중계명이라는 것이 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 29~31)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 볼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웃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이웃사랑을 하는 그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랑은 법이 규제할 수 없는 행동원리다. 사랑은 법이 규제할 수 없는 마음에서 싹 트기 때문이다.
법은 최소한의 것, 즉 하한선이다. 하지만 사랑은 상한선이다. 법은 지켜야하는 최소한의 것을 규정하지만, 사랑은 최대한 그렇게 해야 함을 의미한다.
사랑은 일차적으로 이성이 아닌 마음(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성은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이다. 따지는 사람 앞에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것이 마음(영)의 지혜다. 지혜는 지식이 아니다.
성경은 이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다. 갈멜이나 이냐시오 영신수련이나, 프란치스칸의 방법이나 모든 영신 수련의 첫 단계는 침묵이다. 침묵을 살아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상한선을 찾아 낼 수 있다.
사랑의 이중계명은 이처럼 예수의 사랑 지침을 해설하는 기본원리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의 다른 모든 가르침을 해석하는 중심원리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사랑의 이중계명을 이해해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이스라엘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창세 21, 23; 탈출 21, 24 참조)을 파괴하신 예수님의 이중계명(마르 12, 29~31)은 이웃사랑을 극도로 강조한 사례이다.
동태복수법은 어떤 사람이 내 눈을 찔렀다면 나도 똑같이 눈을 찌르고,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하면 나도 그 사람을 욕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예수는 다르게 말한다. 누가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밀어야 한다. 속옷을 가져가려 하면 겉옷까지 내어 주어야 한다.(마태 5, 39; 루카 6, 29 참조)
신약을 읽는다는 것은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고 속옷을 달라면 것옷을 주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사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다.
신앙은 사람을 점진적으로 영적이면서 초월적으로 바뀌게 한다. 바뀌지 않는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삶이 바뀌어야 한다. 성경말씀의 의미를 잘 깨닫고 지킬 때 신앙생활은 영성적이며 형성적으로 변형되고 삶의 기쁨과 자유 행복으로 충만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배타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자신을 아끼는 것 역시 인간애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만 강조했다고 해서 자기 사랑은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이미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를 잘 사랑하는 그만큼 남을 사랑할 수가 있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있다.
자기가 병이 들었는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치료를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느님 사랑은 자기 이해부터 시작된다. 자기를 알기 위해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
이웃이 잘못한 것을 용서하듯이 내가 잘못한 것도 용서해야 한다. 지나치게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는 버려야 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하느님 사랑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은 추상적 이웃이 아닌, 구체적 이웃이다. 예수가 가르친 이웃 사랑은 일차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을 말하는 것이다. 가까운 이웃에서 출발해 그 사랑의 씨앗을 넓혀 나아가 한다.
다시한번 묵상해 보자.“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29~31)
[가톨릭신문, 2007년 3월 18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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