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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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6-06 | 조회수3,805 | 추천수0 | |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24.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
성경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느꼈겠지만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은 지금까지 살펴본 다른 서간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은 테살로니카 교회가 종말론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어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쓴 것이다. 또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은 제사와 우상문제,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교회의 분열 문제 때문에 각각 쓴 글들이다.
당시 각 교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바오로 사도가 떠나고 나면 즉시 수많은 문제가 발생해 바오로 사도를 걱정하게 했다. 직접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서간들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좀 다르다. 문제가 발생한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바오로 사도가 가는 곳마다 계속해서 후원자를 보내 뒷바라지를 할 정도로 활성화된 교회였다. 4장을 읽어보자.
“여러분 외에는 나와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교회가 하나도 없었음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테살로니카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두어 번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받아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에파프로디토스 편에 보낸 것을 받아 풍족합니다. 그것은 향기로운 예물이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제물입니다.”(필리 4, 15~18)
바오로 사도는 다른 교회에서는 한 번도 예물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테살로니카 교회에 머물 때에도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의 예물이 아닌 필리피 신자들이 보내온 예물을 받아 생활한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교회 신자들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필리피 신자들의 삶이 모범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신자들로부터 후원을 받은 것이다.
물론 필리피 교회에도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하게도 볼 수 있는 그런 대목이 딱 한 군데 나온다.
“나는 에우오디아에게 권고하고 신티케에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뜻을 같이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나의 진실한 동지여, 이 여자들을 도와주도록 그대에게도 당부합니다. 이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나의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려고 나와 함께 싸운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이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적혀 있습니다. …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 4, 2~5)
두 여인이 있었는데 서로 반목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 두 여인에게 서로 싸우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신자들간의 싸움은 성체조배실 아니면 감실 앞에서 해야 한다.
이 대목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내용은 필리피 신자들에 대한 칭찬과 스스로의 묵상 내용을 담고 있다.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만큼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은 바오로 사도의 개인적 묵상과 성찰이 가장 잘 드러나는 서간이기도 하다.
그 내용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주교님들이 피정 지도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것이 바로 필리피 서간이다. 그 내용을 보자.
신학자들에 의하면 열심히 전도여행을 하던 바오로 사도도 종말 문제만큼은 이 필리피 서간을 쓰기 전까지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있는 중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원래 바오로 사도는 가까운 시일 내에 예수께서 재림을 하시고, 자신이 마중을 나가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죽기전에 예수의 재림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정작 자신이 먼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감옥 속에서 죽음의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된다. 예수의 재림과 종말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묵상하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해답을 찾아낸다. 바오로 사도는 은총에 의해 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 아마 무릎을 탁하고 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은 내용을 편지로 써서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 주에 살펴보기로 한다. [가톨릭신문, 2007년 6월 24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25.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첫 부분은 필리피 신자들을 위한 기도로 시작한다.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필리 1, 4~5)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교회 신자들 생각만 해도 기쁘다. 그만큼 필리피 신자들을 생각하는 바오로 사도의 마음이 각별한 것이다. 필리피 교회는 코린토, 테살로니카 등 다른 교회들 처럼 말썽이 일어나는 곳도 아니고 분열이 있는 교회도 아니다.
오직 바오로 사도와 함께 꾸준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인 그런 교회다. 그리고 늘 바오로 사도를 걱정해 주고, 하느님 사업이 잘 되도록 협조한다.
이런 아름다운 교회에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깨달은 죽음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다른 교회에 보낸 서간은 대부분 잘못을 꾸짖고, 행실을 바로잡기 위한 내용이었지만 필리피 서간은 성찰한 내용과 묵상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꾸짖을 내용이 없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현재 감옥에 갇혀 있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 그런데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필리 1, 20)
바오로 사도의 절대 목표는 ‘살더라도 혹은 죽더라도’ 오직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는 것도 바오로 사도에게는 이득이 된다.(필리 1, 21 참조) 죽음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깨달은 것이다.
물론 바오로 사도도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필리 1, 22)라고 말한다. 약간의 갈등도 보인다.
하지만 이내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이러한 확신이 있기에, 여러분의 믿음이 깊어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남아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하여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 가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할 거리가 나 때문에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필리 1, 23~26)라고 말한다.
바오로 사도에게 예수의 재림은 그 때가 언제든 상관이 없다. 죽음 이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죽는 것도 좋고, 살아서 신자들의 믿음을 더 강하게 하는 것도 좋다.
바오로 사도는 죽음도 담대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지만 많은 이들이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는 그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도 죽음 못지 않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바오로 사도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어떤 신자들은 빨리 죽어서 하느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조금 덜’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죽는 그 날까지, 하느님을 만나는 그 날까지 진정으로 하느님과 일치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보든지 이렇게 떨어져 있든지 간에, 여러분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한뜻으로 굳건히 서서 한마음으로 복음에 대한 믿음을 위하여 함께 싸우고, 어떠한 경우에도 적대자들을 겁내지 않는다는 소식 말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표이며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표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전에 나에게서 보았고 지금도 나에 대하여 듣는 것과 똑같은 투쟁을 여러분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필리 1, 27~28)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믿음은 투쟁이다. 필리피 교회라고 해서 분열의 위기가 없었겠는가. 반대자가 없었겠는가. 그러나 필리피 교회는 영적인 것이 아니면 미동도 하지 않는다. 흔들림이 없다.
세속적인 권력과도 타협하지 않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설쳐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필리피 교회는 이처럼 차분하고 평화스럽고, 영적 기운이 가득했던 교회다.
필리피 교회는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톨릭신문, 2007년 7월 1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26.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3)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 2, 1~4)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이다. 이 성구를 분석해 보면 이렇다.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신자들에게(오늘날 우리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과연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의 위안을 받고 있는가? 그리고 성령의 감화 속에서 서로 친교를 나누고 있는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신자라면)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 것만 챙기지 말고 남의 것을 챙겨야 한다. 이 말은 스무 살이면 깨달아야 하는 평범한 진리다. 20대가 되면 상대방이 나보다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대가 된 후에도 상대방이 낫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 인생은 불행하다.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우리는 왜 겸손해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리스도를 그 기준으로 제시한다. 유명한 구절인 만큼 암기해 두는 것도 좋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 6~8)
숨소리도 안 나게 일 하셨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론이다. 예수의 사목방법론은 숨소리조차 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예수는 중요한 일 대부분을 산 속이나 외진 곳에 가서 했다. 열두 제자를 뽑을 때도 산 속에 가서 기도하면서 뽑는다. 마지막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혼자 깊은 기도를 했다. 공생활 직전에도 광야로 가서 40일 동안 기도한다.
하지만 우리의 방법론은 다르다. 작은 일 하나 하면서도 앞서기를 좋아한다. 이런 행동은 예수의 방법론, 행동과 거리가 멀다. 큰 소리 내며 하는 행동 중 대부분은 하느님의 뜻과 거리가 멀다. 하느님의 일은 조용히 진행된다. 중요한 일은 소리를 낮춰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일은 성체조배실에 가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더 나아가 바오로 사도는 이어지는 3장에서 신자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공동체를 이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진정한 구원의 길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사뭇 험악하게 들린다.
“개들을 조심하십시오.”(필리 3, 2)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며 거짓 주장을 하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내가 잘낫다고 하면서 잘난 척 하는데, 사실 바오로 사도도 세속적으로 볼 때 잘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였다.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한다면 사실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필리 3, 5~6 참조)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필리 3, 7)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긴다”(필리 3, 8)고도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새로운 길을 알게 됐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명백해 졌다.
바오로 사도가 거듭 강조해 말한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 같은 길로 나아갑시다.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필리 3, 12~21 참조)
다시 읽어보면서 느끼지만,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은 그 분량은 짧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서간이다. [가톨릭신문, 2007년 7월 8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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