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묵시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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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6-07 | 조회수7,805 | 추천수1 | |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45. 요한 묵시록 (1)
종말(終末).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다. 나(인간)는 나(인간) 자신의 죽음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물며 개인적 차원의 죽음을 넘어선 세상의 종말을 매 순간 묵상하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종말은 어쩌면 먼 나라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말은 우리 삶에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가 직접 종말을 이야기했고 바오로 사도도 종말을 선포했다.(마태 13, 39~49; 1코린 15, 24; 2테살 2, 1)
우리는 종말로 향해 나아가고 있고, 그래서 종말을 묵상하고 준비해야 한다. 종말은 더 이상 구석에 던져 놓고 무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반짝반짝 윤기 나게 닦아가며 늘 옆에 두고 있어야 할 그 무엇이다.
요한 묵시록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바로 그 종말이다. 세상 심판 날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가 하는 것이 요한 묵시록이 다루고 있는 중요한 내용 중 하나다.
요한 묵시록은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읽기에 조금은 난해하다는 느낌이 들지만(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요한 묵시록을 가까이 하지 못하지만) 전체 맥락을 알게 되면 그렇게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아주 단순하게 인간을 두 종류로 분류해 보자. 우리 주위에는 의인이 있고, 악인도 있다. 요한 묵시록은 상징적 차원에서 의로운 사람을 당시 박해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인들로, 악한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하고 박해하던 로마로 상정한다.
물론 요한 묵시록에서는 ‘로마’대신에 ‘바빌론’이 등장한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로마를 욕할 수는 없지 않는가. 당시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로마 대신에 바빌론을 악한 세력의 표상으로 내세운 것이다.
요한 묵시록은 더 나아가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의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래서 만약 현재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신자라면 요한 묵시록을 정독해 볼 것을 권한다. 하느님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작성된 것은, 이레네오 성인에 의하면 로마 도미티아누스 황제 집정 말기인 약 96년 경으로 보인다.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뒤 약 63년 지난 시점이다. 이 때 이 책의 저자인 요한이라는 사람이 파트모스섬이라는 곳으로 유배를 가는데 거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이런 계시를 받으면서 묵시록을 적었다(묵시 1, 9).
이 책이 저자는 2세기까지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사도 요한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앞에서 본 대로 묵시록이 작성된 것은 사도 요한이 죽은 뒤인 1세기말 경의 일이다.
따라서 이 묵시록은 요한의 제자 그룹(요한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속하는 인물 중 그 누군가가 요한의 이름을 빌려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섬에 유배된 후 ‘엄청난’ 하느님의 계시를 접한 그리스도인.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또 누구를 위해 이 글을 썼을까.
저자는 자신이 본 묵시를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다고 적는다(묵시 1,4). 여기서 일곱 교회는 오늘날 터키지방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를 지칭한다(묵시 1, 11).
당시 일곱 교회 역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굉장히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묵시록은 이 교회들에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교회들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는 지금 여기서 고통을 받는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 희망의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악된다. 하나는 역사와 인간 운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냐를 알리기 위해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종말에 다시 재림하셔서 인간세상을 심판할 실 분이다. 두 번째는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는 이 위기상황을 인내로 극복하고 용기를 가지라는 희망과 권고가 이 책에 담겨 있다.
결국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바를 크게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 고통과 여러 가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의로운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에로 부활시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꿋꿋하게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
‘묵시’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언젠가는 휘장이 벗겨질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모든 것들이 환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제 그 휘장 속을 조심스레 들여다보자.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 아닌가. [가톨릭신문, 2007년 12월 2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46. 요한 묵시록 (2)
요한 묵시록을 읽기 전에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점 하나 짚고 넘어가자.
묵시록은 논리로 읽는 책이 아니다. 논리적 차원의 글 읽기를 원한다면 철학 서적 등 학술서적을 보면 된다. 요한 묵시록은 학술서적이 아니다. 요한 묵시록은 오직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전달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글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을 파악하려해야지,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해서는 안된다. 열린 마음으로, 묵상하는 마음으로 요한 묵시록을 열어보자.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묵시 1, 1).
요한 묵시록은 인간 이성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은총이나 계시 없이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늘 나라의 천상왕국 신비에 대해 깨달을 순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직접 계시로 알려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 예언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묵시 1, 3).
‘행복’이라는 말만 들어도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돈을 벌고, 명예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정작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적다.
요한 묵시록이 그 진정한 행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을 읽고 또 들으면서, 실천하는 이들은 ‘행복’하게 된다. 희망의 메시지다. 아무리 심한 박해를 받더라도, 아무리 힘든 일을 겪고 있더라도 이 계시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바로 그리스도 때문이다.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묵시 1, 7).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희망에 찬 말씀인가. 그리스도는 승자의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첫 머리에서 우리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희망 가득 차게 만든 요한 묵시록은 이제 본격적으로 계시 내용을 전개한다.
그 계시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 책을 쓴 요한이라는 사람은 신앙을 증거 하다가 체포돼 파트모스라는 섬에 유배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성령께 사로잡혀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듣게 된다. 요한은 목소리 주인공이 누구인지 보려고 돌아선다.
그랬더니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시는 모습을 본다. 바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두르고 있다.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처럼 또 눈처럼 희고 그분의 눈은 불꽃같으며,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 같고 목소리는 큰 물소리 같다. 또 그분의 얼굴은 한낮의 태양처럼 빛난다. 요한은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린다. 그러자 그분이 다가와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그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묵시 1, 9~20 참조).
숨이 멈춰질 듯한, 참으로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인간은 구세주 앞에서 죽은 듯 엎드려 있고, 그 구세주가 오른손을 얹어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이어 요한에게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묵시 1, 11)고 말한다.
모두 아시아에 위치한 나라들이다. 당시 아시아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었는데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였고, 또 다른 하나는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이단 문제였다. 많은 거짓 예언자와 거짓 교사들이 등장해, 거짓된 가르침으로 신자들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이제 각 교회에 전할 내용을 말씀하신다. 때로는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때로는 호되게 꾸짖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호된 질책은 “나 이제 너희들과 단절이야, 절교야”라는 의미가 아니다. 빨리 회개하고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요청의 다른 표현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시작된다. [가톨릭신문, 2007년 12월 9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47. 요한 묵시록 (3)
그리스도는 에페소 교회 신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묵시 2, 2~5).
이어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 등 교회에도 말씀하신다.
“내가 갈 때까지 너희가 가진 것을 굳게 지켜라”(묵시 2, 25),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묵시 3, 2).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묵시 3, 19).
모두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하나 하나가 오늘날 우리 교회가 새겨 들어야 할 말씀들이다. 특히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대한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큰 만큼 읽고 넘어가자.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묵시 3, 15~17).
요한은 이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그리스도의 계시 내용을 편지로 써서 모두 보냈다. 요한은 이어 깊은 기도를 시작하는데 이때 또다시 성령에 사로잡혀(묵시 4, 2 참조) 신비의 세계를 보게 된다.
하느님 나라다. 많은 신자들이 이 부분을 난해하게 받아들이는데,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읽어 나가면 된다. 요한이 본 하느님 나라 환시는 4장과 5장에 걸쳐 장황하게 나타나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하늘에는 어좌가 놓여있고 한 분이 그 어좌에 앉아 계신다. 어좌 둘레에는 무지개가 있고 앞에는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다.
어좌 주위에는 또 다른 어좌 24개가 있는데,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24명의 원로가 각각 앉아 있다. 또 어좌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는데,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처럼 생겼다.
네 생물은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이라고 외치고 있다(묵시 4, 2~11 참조).
찬미와 경배가 울려 퍼지는 하느님 나라의 장엄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어 환시의 내용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계속되는 환시 내용을 살펴보자.
옥좌에 앉아 계시는 성부 아버지께선 오른 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계신다. 두루마리에는 일곱 봉인이 되어 있다. 그 일곱 봉인을 모두 뜯어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요한은 속상하다. 두루마리는 분명히 세상을 위해서 큰 의미가 담겨 있는 내용인데 일곱 봉인을 뜯고 읽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요한이 기도를 하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 한 원로가 나타나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유다지파에서 난 사자 다윗의 뿌리가 누구인가. 바로 그리스도다. 실제로 이때 어린양이 나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는다(묵시 5, 1~7 참조).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이 두루마리를 뜯기에 합당한 분이다. 바로 당신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뜯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구세주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가장 큰 영예와 찬양을 받으실 분은 바로 그리스도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두루마리의 봉인 하나하나를 떼신다. [가톨릭신문, 2007년 12월 16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48. 요한 묵시록 (4)
그리스도께서 일곱 봉인 중 첫 봉인을 떼신다. 그러자 흰색 말 위에 활을 든 사람이 화관을 받고 승리를 위해 나아갔다(묵시 6, 2 참조). 기품이 늠름한 승리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는 이제 둘째 봉인을 떼신다. 그러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는데, 그 위에 탄 이는 사람들이 서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도록 땅에서 평화를 거두어 가는 권한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큰 칼을 받았다”(묵시 6, 4).
예수께서 이어 셋째 봉인을 떼시자, 손에 저울을 든 이가 검은 말을 타고 나타나고, 넷째 봉인을 떼시자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푸르스름한 말을 타고 나타난다. 악한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묵시다(묵시 6, 5~8 참조).
이어 다섯 번째 봉인과 여섯 번째 봉인을 뗀 후에는 지금까지 와는 달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나타난다. 예수께서 다섯 번째 봉인을 떼자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한 증언 때문에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라고 부르짖는다. 이 부분을 자칫 “원수를 갚아 달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안된다.
묵시록 전체 차원에서 보면 이 부르짖음은 바로 하느님의 정의가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신의 권세와 나라가 서기를 바라는 그런 울부짖음인 것이다. 실제로 울부짖는 이들에게 희고 긴 겉옷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찰 때까지 조금 더 쉬고 있으라는 분부를 받는다(묵시 6, 9~11 참조).
예수께서 이제 여섯번째 봉인을 떼신다. 그러자 큰 지진이 일어나고, 태양은 검게 되고 달은 온통 피처럼 된다. 또 하늘의 별들은 땅으로 떨어지고,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 사라져 버리고, 산과 섬은 제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땅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장수들과 부자들과 권력가들, 또 종과 자유인도 모두 동굴과 산 바위 틈에 몸을 숨긴다(묵시 6, 12~15 참조).
이 부분은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때 맞게 되는 종말론적인 대 파국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예수께서 여섯 봉인을 떼시는 이 내용은 당시 교회를 박해하고 있었던 권력자와 죄 지은 이들에게 내려질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점이 생긴다. 분명 두루마리는 일곱 봉인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여섯 번째 봉인까지 떼신다. 아직 하나가 남았다. 일곱 번째 봉인 이야기는 뒷부분에 나온다. 그 일곱 번째 봉인을 떼는 날, 바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지금 여기서’볼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그 하느님 나라를 두 가지 차원에서 묘사하며, 맛보기로 살짝 보여준다. 하느님의 옥좌 앞에서 영광을 받는 의인의 모습과, 하느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이 그것이다.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온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친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묵시 7, 3) 의인은 이마에 인장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14만4000명이다(묵시 7, 4 참조).
일부 개신교에서 이 14만 4000명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곤 한다.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종말에 14만 4000명만 구원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14만 4000명 안에 들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가진 것 모두 내놓아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극기와 희생, 기도의 삶을 살아도 14만 4000명 안에 들까말까 할 것이다.
성서신학은 이 수를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예수의 12사도 등 온 인류를 뜻하는 충만의 숫자다. 이 충만의 숫자에 12를 더 곱하면 144가 된다. 충만에 충만을 곱한 것이다. 이 144에 또다시 1000배 한 것이 바로 14만4000이다.
14만4000명이 인장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의미다. 전 인류가 회개하고 참다운 삶을 살아간다면, 진정으로 하느님 창조의 의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간다면 종말의 그 날, 모든 이들에게 인장이 찍힐 것이다.
요한은 이어 이마에 인장이 있는 백성들이 하느님 나라에 모여 있는 장엄한 모습을 보게된다. [가톨릭신문, 2007년 12월 23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49. 요한 묵시록 (5)
요한의 환시 속으로의 여행을 계속해 보자. 요한은 지금 선택된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 앞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셀 수조차 없다. 이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왔다. 이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다(묵시 7, 9 참조).
그런데 원로 한명이 다가와 요한에게 묻는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요한이 “원로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하자, 원로는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대답한다(묵시 7, 13~17 참조).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약 25%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옷을 십자가상 예수님의 피로 빨고 있다. 우리들이 성당에 나와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생활을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옷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 위한 것이다.
순교자라고 하면 꼭 칼날이나 작두에 목이 잘린, 피를 흘린 이들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인생살이 자체가 순교다.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가. 이 어려움과 고통을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뜻을 묵상하면서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럴 때 순교자가 된다. 삶의 순교자들은 훗날 하느님 대전에 설 것이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 17).
하느님 앞에 수많은 의인들이 서 있는 장엄한 환시 뒤에 곧이어 그리스도가 일곱 번째 봉인을 떼는 장면이 나온다. 두루마리의 마지막 봉인을 드디어 뗀 것이다.
그 때 하늘에는 30분 가량 침묵이 흐른다. 요한은 이때 하느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나팔을 하나씩 들고 있다. 나팔이 곧 불려질 것 같은 분위기다. 실제로 천사들은 나팔은 하나씩 불기 시작한다(묵시 8, 1~6 참조).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피가 섞인 우박과 불이 생겨나더니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땅의 삼분의 일이 타고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고 푸른 풀이 다 타 버렸습니다”(묵시 8, 7).
무시무시한 징벌이 내려지고 있다. 이어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불타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졌고, 그리하여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된다. 또한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횃불처럼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샘들을 덮친다. 많은 사람이 그 물을 마시고 죽는다.
또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해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졌다(묵시 8, 8~12). 첫 번째 나팔부터 네 번째 나팔까지는 자연적인 재해와 재앙이 일어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독수리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 하늘을 날며 이렇게 외친다.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땅의 주민들! 아직도 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남아 있다”(묵시 8, 13).
아뿔사. 아직도 불려질 나팔이 세 개나 남았다. 지금까지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까지가 자연 재앙이었다면 이젠 인간에게 직접 재앙이 나타난다.
메뚜기들이 나와 땅에 퍼진다. 그 메뚜기들에게 권한이 주어졌는데, 땅의 전갈들이 가진 권한과 같았다. 그것들은 땅의 풀과 푸성귀나 나무는 하나도 해치지 말고, 이마에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만 해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죽이지는 말고 다섯 달 동안 괴롭히기만 하도록 허락되었다. 그 기간에 사람들은 죽음을 찾지만 찾아내지 못하고, 죽기를 바라지만 죽음이 그들을 피해 달아날 것이다(묵시 9, 1~12 참조).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고통. 묵시록은 여기에서 가장 극심한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고통의 극한은 어디일까. 어쩌면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면서도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고통이 바로 그렇지 않을까.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직도 두 가지 불행이 더 남았다. [가톨릭신문, 2008년 1월 1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50. 요한 묵시록 (6)
고통의 끝은 어디일까. 여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분다. 그러자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이려고 준비를 갖추고 있던(유프라테스강에 묶여 있던) 네 천사가 풀려난다. 실제로 이들에 의해 세상 사람들의 삼분의 일이 죽는다(묵시 9, 13~19 참조).
여기서 심판받는 이들의 수가 세상 사람의 1/3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앞의 글에서 ‘14만 4000명이 구원받는다’는 말이 숫자적 의미에서 ‘14만 4000명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었듯이, ‘세상 사람의 1/3이 죽는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 악인들의 수가 많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특히 이 여섯 번째 재앙은 당시 유프라테스강 연안에 있는 파르티아인들의 침입으로 인해 닥칠 재난을 하느님의 징벌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여섯 번째 재앙이 있은 후 아주 묘한 일이 벌어진다.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저지른 살인과 마술과 불륜과 도둑질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묵시 9, 20~21).
첫 번째 나팔부터 여섯 번째 나팔이 불려 졌는데도 사람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이 대목은 십분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우리는 고통을 받을 때는 기도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성당에도 열심히 나온다.
자녀가 고 3인 부모들의 신앙이 얼마나 열심한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 고통이 지나가고, 큰 은혜를 받고 나면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인간적인 것만 추구하며 살아간다.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아직 일곱 번째 나팔이 남았다.
그런데 하느님은 여기서 살짝 뜸을 들인다. 일곱 번째 나팔이 불려지기 전에 요한에게 두 가지 환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환시는 하느님의 뜻대로 의롭게 사는 사람들에게 굳은 믿음과 희망을 주는 환시다. 이제 구원의 완성 즉 종말이 촉박했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이다.
요한은 환시를 통해 두루마리를 펴든 천사 하나가 구름에 휩싸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그 천사는 하느님을 두고 이렇게 맹세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울릴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대로 그분의 신비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묵시 10, 1~7 참조).
이어 요한은 아주 이상한 일을 당한다. 두루마리를 먹어 삼키라는 것이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그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묵시 10, 10~11).
두루마리를 먹고 처음에는 꿀 같이 달다가 나중에는 배가 쓰렸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고통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인류를 위해서 희생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제 드디어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분다. 마지막 나팔이다. 그 때 하늘에서 큰 소리가 들려온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님과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 주님께서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이다”(묵시 11, 15).
환시는 계속된다. 일곱 번째 나팔이 불려지자 하느님 앞에서 앉아 있던 스물네 원로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느님께 경배하며 말한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 전능하신 주 하느님 큰 권능을 쥐시고 친히 다스리기 시작하셨으니 저희가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죽은 이들이 심판받을 때가 왔습니다. 하느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고 낮은 사람이든 높은 사람이든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모든 이에게 상을 주시고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파멸시키실 때가 왔습니다.”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난다(묵시 11, 16~19 참조).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다는 장엄한 메시지가 일곱 번째 나팔에서 선포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의 권세와 영광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여섯 번째 나팔 소리가 울릴 때 까지도 정신 못 차리는 우리들. 과연 우리는 장엄한 일곱 번째 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가톨릭신문, 2008년 1월 6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51. 요한 묵시록 (7)
이제 일곱 봉인도 모두 떼어졌고, 일곱 개의 나팔도 모두 불려졌다. 이제 남은 것은 인간의 노력, 교회의 노력이다.
일곱 번째 나팔에 대한 환시 후 요한에게는 또 다시 두 가지 표징이 나타난다. 하나는 ‘여인’(성모 마리아)이다.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묵시 12, 1).
또 다른 표징은 ‘용’이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묵시 12, 4).
심형래 감독의 영화 ‘D-War’(용들의 전쟁)에 나오는 그런 용을 생각하면 묵상이 쉬울 듯하다. 그런 무시무시한 용이 해산을 앞둔 가녀린 여인 앞에 서 있다. 아이를 낳기만 하면 집어 삼킬 듯 살벌한 분위기다.
하지만 하느님의 권능은 이를 뛰어넘는다. 여인은 무사히 민족들을 다스릴 아들을 낳았으며, 그 아들은 하느님 어좌로 올려지고, 여인은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다(묵시 12, 5~6 참조).
이어 천사와 악마의 전쟁이 벌어진다. 누가 이길까. 당연히 천사가 이긴다. “하늘에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싸운 것입니다. 용과 그의 부하들도 맞서 싸웠지만 당해 내지 못하여, 하늘에는 더 이상 그들을 위한 자리가 없었습니다”(묵시 12, 7~8).
용은 화가 날 대로 났다. 여인의 아기를 죽이지도 못했고, 천사들과의 전쟁에서도 패했다. 결국 용은 싸움의 상대를 바꾼다. “이번에는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 만만한 그 상대는 바로 ‘교회와 그 백성들’이다.
“용은 여인 때문에 분개하여, 여인의 나머지 후손들, 곧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과 싸우려고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용은 바닷가 모래 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묵시 12, 17~18).
용은 이제 우리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용은 이번에는 자신의 힘으로 인간에게 직접 접근하지 않는다. 용은 자신의 힘을 받은 사악한 두 마리의 짐승을 부린다.
첫 번째 짐승은 하느님을 모독한다. “용이 그 짐승에게 권한을 주었으므로 사람들은 용에게 경배하였습니다. 또 짐승에게도 경배하며, ‘누가 이 짐승과 같으랴? 누가 이 짐승과 싸울 수 있으랴?’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짐승에게는 또 큰소리를 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짐승은 입을 열어 하느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거처와 하늘에 거처하는 이들을 모독하였습니다”(묵시 13, 4~6).
또 둘째 짐승에게는 첫째 짐승의 상(像)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리하여 그 짐승의 상이 말을 하기도 하고, 자기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죽임을 당하게 할 수도 있었다(묵시 13, 15 참조).
몇몇 성서 학자들은 첫째 짐승은 하느님 백성을 박해한 로마제국을 상징하고, 둘째 짐승은 로마를 우상화 하면서 모든 이들이 로마에 굴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거짓 예언자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요한은 이 환시를 통해 교회가 받게 될 박해와 우상 숭배의 유혹에 굴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두 짐승이 아주 심한 횡포를 부리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온 교회는 더 크고 확실한 위로와 확신을 받게 된다. 교회의 사람들은 박해와 우상숭배 유혹을 이겨낸 하느님의 충실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제 하느님께 선택되어서 찬미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여기에 하느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의 인내가 필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나는 또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하고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묵시 14, 12~13).
알렐루야. 이제 수확의 시기가 온다.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자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셨습니다“(묵시 14, 15~16). [가톨릭신문, 2008년 1월 13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52. 요한 묵시록 (8)
아뿔사. 재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앞에서 살펴본 일곱 천사의 나팔소리에 의해 나타난 재앙으로 모두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아직 일곱 재앙이 더 남았다. 요한은 이 마지막 일곱 재앙으로 모든 재앙이 끝난다고 적고 있다.
“나는 또 크고 놀라운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하느님의 분노가 끝나게 될 것입니다”(묵시 15, 1).
하느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일곱 나팔을 불며 그렇게 인간들을 깨우치려 했는데…. 아직도 인간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주님의 심판을 인간적 판단으로 가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심판하신다(묵시 16, 5 참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에서 나왔습니다.… 그러자 성전이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에서 나오는 연기로 가득 차,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묵시 15, 6~8).
이 천사들은 큰 대접을 하나씩 들고 있다. 그리고 첫째 천사부터 하나씩 대접을 쏟기 시작한다. 그러자 짐승의 표를 지닌 사람들과 그 상(像)에 경배한 사람들에게 고약하고 지독한 종기가 생기고,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이 죽고, 물이 피가 되고, 불로 태우는 권한이 해에게 주어져 사람들은 뜨거운 열에 타 버린다(묵시 16, 2~9 참조).
참으로 무서운 장면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재앙들에 대한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할 뿐, 회개하여 그분께 영광을 드리지 않았습니다”(묵시 16, 9).
그래서 재앙은 계속된다. 짐승의 나라가 어둠으로 변하고, 사람들은 괴로움을 못 이겨 자기 혀를 깨물고, 강물이 말라 해 돋는 쪽의 임금들을 위한 길이 마련되었다(묵시 16, 10~12 참조).
하지만 거짓 예언자와 악한 이들은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하느님에 대항한다. 이때 마지막 일곱 번째 천사에 의해 마지막 재앙이 내린다.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 울리고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지진은 땅 위에 사람이 생겨난 이래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큰 도성이 세 조각 나고 모든 민족들의 고을이 무너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대 바빌론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의 격렬한 진노의 술잔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든 섬들이 달아나고 산들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묵시 16, 18~20).
여기서 바빌론은 당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로마를 상징한다. 로마는 탕녀다(묵시 17, 1). 한 천사가 이 탕녀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요한은 크게 놀라고 만다.
“나는 진홍색 짐승을 탄 여자를 보았습니다. 그 짐승의 몸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한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였습니다. 손에는 자기가 저지른 불륜의 그 역겹고 더러운 것이 가득 담긴 금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여자를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묵시 17, 3~6).
일곱 머리는 로마의 아주 지독하게 악했던 일곱 황제를 뜻한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짐승이 여자를 죽인다는 것이다. “(짐승은) 그 여자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알몸이 되게 하고 나서, 그 여자의 살을 먹고 나머지는 불에 태워 버릴 것이다”(묵시 17, 16).
로마의 권력자들이 로마제국의 살을 뜯고, 스스로 로마제국을 멸망시킨다는 메시지다. 자신 잇속만 챙기는 권력자들에 의해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과거 일제시대 경험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어쨌든 로마는 망한다. 그 후에는 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축제가 벌어지는 것이다. 바로 어린양의 잔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양의 혼인날이 되어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다. 그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는 특권을 받았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묵시 19, 7~9).
혼인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선택받은 교회와 메시아와의 일치를 상징한다. 이 잔치에는 흠 없이 깨끗하게,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았던 이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 그 날이 기다려 진다. [가톨릭신문, 2008년 1월 20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53. 요한 묵시록 (9)
요한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대한 예언을 들을 후 그리스도에 대한 환시를 본다. 요한이 본 그리스도는 흰 말을 타고 계신다.
“그곳에 흰말이 있었는데, 그 말을 타신 분은 ‘성실하시고 참되신 분’이라고 불리십니다. 그분은 정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고 머리에는 작은 왕관을 많이 쓰고 계셨는데, 그분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분 몸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또 피에 젖은 옷을 입고 계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서 흰말을 타고 그분을 따르고 있었습니다”(묵시 19, 11~14).
악마와 막 싸움을 끝낸 그리스도의 결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의 옷이 피가 흥건한 것과 달리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의 옷은 깨끗하다. 당연하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은 악마와의 싸움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가 직접 사탄의 군대를 무찌르고 있기 때문에 하늘의 군대들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으면 된다. 직접 나서 싸울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가 어떤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인가. 그런 그리스도께서 직접 싸움을 하고 계신다. 완벽한 승리자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은 이제 적을 차례로 없애시고 적들은 한갓 새들의 먹이가 된다(묵시 9, 21 참조).
이어지는 내용이 유명한 천년 왕국, 혹은 천년 통치에 대한 이야기다. 천년 동안 메시아가 통치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일부 개신교에서 이를 두고 의견과 해석이 분분한 내용인 만큼 천주교 신자들은 이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
중요한 내용인 만큼 내용을 꼼꼼히 읽어 보자.
“천사가 용을, 곧 악마이며 사탄인 그 옛날의 뱀을 붙잡아 천 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하였습니다. … 그 (천년) 뒤에 사탄은 잠시 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 나는 또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상에 경배하지도 않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 이것이 첫 번째 부활입니다.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이는 행복하고 또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이들에 대해서는 두 번째 죽음이 아무런 권한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제가 되어, 그분과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0, 1~6).
100년 경, 유다인들의 종말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한 가지는 “종말이 다가오면 지금까지의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은 없어지고 완전히 다른 새로운 왕국 하느님의 왕국이 생길 것”이라는 사상이다. 두 번째는 “영원한 하느님 나라가 오기 전에 일정기간 메시아의 통치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사상에서 바로 천년 왕국설이 나온다. 종말이 오기전 악마의 세력, 용의 세력을 천년 동안 가두고 그리스도가 통치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요한이 천년을 강조한 것은 당시의 박해 받는 순교자들을 위로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성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즉 앞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실 천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박해를 이겨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개신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년 왕국설을 숫자적 연도로 계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작 우리는 이 부분에서 사탄의 궁극적 패망에 대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드넓은 땅을 건너 올라와서는 성도들의 진영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도성을 에워쌌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들을 속이던 악마는 불과 유황 못에 던져졌는데,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이미 들어가 있는 그곳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묵시 20, 9~10).
악이 멸망하고 선이 승리할,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 12~14). [가톨릭신문, 2008년 1월 27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54(끝). 요한 묵시록 (10)
이제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 신약성경의 마지막 부분으로 접어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묵시록의 주제이자 신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접할 수 있다.
묵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야기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모습일까.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묵시 21, 1~8).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다. 목 마름도 없다. 그곳에는 생명수가 흘러 넘친다. 요한은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묘사한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밤이 없으므로 종일토록 성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민족들의 보화와 보배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1, 9~27).
하느님 나라를 그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문구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요한에게 보여준 하느님은 곧 이어“내가 곧 가겠다”고 선언한다. 그것도 세 번이나 말한다.
▲ “보라, 내가 곧 간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묵시 22, 7).
▲ “보라, 내가 곧 간다. …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묵시 22, 14).
▲ “이 일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묵시 22, 20).
“내가 곧 가겠다.”
이 말이야 말로 요한 묵시록의 주제이면서 동시에 신약과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대 주제다. “coming soon”이다. 말 그대로 ‘개봉박두’다. 영어에서 ‘the Coming’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내가 가겠다”고 하면 의인들은 이렇게 응답한다. ”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 20).
그리스도가 내가 있는 이곳으로 “곧 가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모두 목청껏 소리쳐 보자.
“오소서 주 예수여.”
연재를 마치며
그동안 1년 넘게 신약성경을 독자들과 함께 읽었다. 매주 성경을 묵상하고 그 묵상을 나누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많은 독자들의 격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글은 성경을 분석한 전문 학술적 시각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다. 영성 신학을 전공한 내가 성서 신학자들의 영역을 넘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이 글은 처음부터, ‘영성적 차원의 성경읽기’라는 차원에서 접근했다.
누구나 쉽게 성경을 접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였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도 천천히 읽어 나가면 저절로 성경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성경 묵상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몸과 정신과 마음(영)으로 깨닫고, 삶 속에서 진리를 실천토록 하기 위해 진력했다.
물론 영성적 성경 읽기와 성경 문구에 대한 교의적(교회의 가르침) 이해 및 주석학적 지식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혹은 읽기 전에 성경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말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정작 되돌아 보니, 부족한 점이 군데군데 눈에 보인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나 미처 따라가지 못한 묵상이 있다면 형성적 조언과 질책을 바란다. 그동안 부족한 묵상에 함께해 준 많은 독자들께 진정으로 감사 드린다. 끝 인사를 요한 묵시록 마지막 장, 마지막 절로 대신한다.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묵시 22, 21).
[가톨릭신문, 2008년 2월 3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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