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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사무엘 하권: 영원한 왕국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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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3 조회수2,802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사무엘 하권 : 영원한 왕국을 향하여

 

 

길보아산 전투에서 사울의 이스라엘군은 대부분 전멸하였고 불레셋군도 큰 손실을 입었다. 다윗의 막강한 군대는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1사무 29) 까닭에 결과적으로 길보아 전투 이후 팔레스티나의 정치적 실권이 다윗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다윗은 전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5,1-5). 통합 왕국 통치 30여 년 동안(기원전 1005-972년) 다윗은 불레셋족의 지배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주변 이민족들을 정복함으로써 북쪽의 단에서부터 남쪽의 브엘세바에 이르는 이상적인 국경선을 형성하였다. 또한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일치를 강화시켰다(5,6-12).

 

다윗이 정치적으로 성공하게 된 비결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적대하는 두 세력에 대해 취한 독특한 태도에 있었다. 다윗은 배타적인 국수주의자가 아니었다. 다윗의 힘의 핵심은 그가 사울로부터 피신했을 때 이방인들로 조직한 매우 헌신적인 그렛 외인부대와 벨렛 외인부대(15,8)였다. 다윗은 팔레스티나에 사는 가나안 공동체에 자유와 보호를 허용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었지만 자신들과 계약을 맺었고, 사울이 “백성을 사랑한 나머지 전멸시키려 했던”(21,2) 기브온족에 대한 다윗의 태도는 매우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한 대가로 다윗 시대에 흉년이 들었다. ‘그대들의 억울함을 어떻게든 풀어주겠다’는 다윗의 말에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후손 일곱을 넘겨달라고 하였다. 기브온 사람들은 야훼 앞에서 일곱 명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막 보리를 거두기 시작한 추수철(즉 부활시기)이었다. 그런 다음에야 하느님의 자비가 내렸다. 천 년 후 보리 추수철에 다윗의 후손이 야훼 앞에서 나무 기둥에 매달렸고 자신의 몸을 바쳐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헐어버리고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에페 2,14.16). 선택된 백성이라는 원 올리브 나무에 이방인이라는 가지를 접목시킴으로써 “전이스라엘”을 통치한 다윗의 강화 정책은 명백하게 또 하나의 “이스라엘의 착한 목자”를 주목케 한다. 사도 바오로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방인 모두가 좋은 올리브나무에 접목되었을 때 전이스라엘이 구원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신비를 설명하였다(로마 11,17-24 참조).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은총의 자식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하느님의 집을 짓고자 결정했을 때처럼 인상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다윗에게 깨닫게 한 적은 결코 없었다. 나단이 전한다 :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7,5-11). 다윗은 하느님께서 살 집을 만들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살 집 즉 영원한 왕조를 세워주실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로서 돌로 세운 집이 아니라 또 하나의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다윗의 후손”이 될 것이다. “네 몸에서 난 자식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터이니 그가 나에게 집을 바쳐 나의 이름을 빛낼 것이며 …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7,12-16). 이 말씀은 천사가 다윗 가문의 마리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때 실현되었다. “…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루가 1,28-33).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로마 I,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집 즉 “성전”이시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21). 스스로를 봉헌한 다윗의 후손은 이제 하느님께서 영원히 거주하시는 집이 된 것이다. 세례를 통해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들도 그분이 세우시는 집의 살아 있는 돌이 된다. “여러분도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에페 2,22)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와 함께 죄를 지었다(11장). 그러나 그의 참된 회개가 그를 살렸다. 바쎄바가 두번째 아들을 낳으니 솔로몬이었다. 히브리어 샬롬은 평화를 뜻하고, 유다 사상에 따라 평화는 먼저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 그 결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기는 완전한 친교를 의미한다. 솔로몬의 탄생은 파괴되었던 하느님과 다윗 사이의 친교의 회복을 드러낸다. 바로 다윗의 상처 자국에 하느님의 사랑이 내려왔고, 그곳으로부터 새 가지가 싹터 하느님의 영이 자리잡게 되었다. 하느님은 솔로몬을 사랑하시어 “여디디야” -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아가 - 라는 이름을 주었다.

 

상속법에 따라 솔로몬은 왕좌를 기대할 수 없었다. 위로 형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윗이 사랑하던 맏아들 암논이 있었다. 철없는 연정으로 배다른 누이를 범하고는 그 누이의 오빠 압살롬에게 살해당했다. 압살롬은 망명 후에 돌아와 아버지의 사랑에도 불구 헤브론에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

 

압살롬이 반역했다는 소식은 다윗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이 최악의 곤경에서처럼 다윗이 과연 그가 하느님의 은총의 자식이었다는 것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키드론을 지나면서 자신과 왕국을 완전히 하느님 손에 맡긴다. “…만일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으신다면 어떤 처분을 내리시든지 받아야지요”(13,25-26). 그 다음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올리브산으로 올라갔고 백성들이 뒤따랐다(15,30). 여기서, 그의 조상처럼 키드론을 지나 제자들에 둘러싸여 올리브 산에 오르고 깊은 비탄 속에서 “아버지…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라고 기도하시던 또 하나의 유다인의 왕, 참된 “다윗의 후손”을 누가 상기하지 아니하겠는가?

 

하느님의 은총의 자식이 되면서 다윗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자애롭게 어루만지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다. 그래서 아들로부터 피하여 가는 도중 그의 고통을 배가시키던 시므이의 욕지거리를 들으면서도 희망을 느꼈다. “야훼께서 내가 당하는 이 비참한 꼴을 보시고 복을 내려줄지 알겠소?”(16,12). 결국 압살롬이 죽고 그는 승리하지만, 아들의 죽음은 그에게 비통함을 안긴다.

 

패배와 승리, 배신과 충성, 실망과 환희 같은 인간적 모든 북새통 속에서도 우리는 -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 하느님의 사랑의 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큰 실수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고, 왕위를 이어받도록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여기서 죽은 다음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게 된 ‘다윗의 후손’을 주목케 한다. 다윗도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준 ‘그리스도’였다(시편 132,17). 다윗의 이름, 고향, 용기, 매력 등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메시아를 예시한다. 그의 승리는 ‘다윗의 후손’의 위대한 승리를 예견케 한다. 이사야가 말하는 “다윗에게 약속한 호의”(53,3)가 썩지 않은(사도 13,34-37) 다윗의 후손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 다윗의 “마지막 말”(23,1-7)은 이 후손에 대한 것이다. 이 말들은 성령께서 다윗의 혀를 통해 시편에서 그 메시지를 다시 계속한다. 그것은 새 날 정의의 태양으로 떠오를 메시아의 궁극적인 승리를 말하고, 봄날의 새싹처럼 자라날 교회와,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날뛰다가 말라죽게 될 “악마의 도시”를 지적한다. 시편은 그의 후손의 기도가 되었고, 하늘을 향해 순례하는 교회의 기도가 되어왔다.

 

다윗이 하느님의 은총의 자식이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이었다. 야훼의 궤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윗이 춤추자 아내 미갈은 여편네들 보는 앞에서 건달처럼 온통 몸을 드러냈다고 경멸했다. “나는 앞으로도 야훼 앞에서 춤출 것이며 이번보다도 더 경망히 굴 것이요. 그대는 지금 천하게 보겠지만 지금 말한 그 여편네들은 나를 더욱 우러를 것이오”(6,21-22). 다윗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이 들어높여지고, 지배하는 사람은 베풀어야 한다는 메시아의 통치의 비밀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다윗의 예언은 참으로 실천되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갈과 같은 사람들은 다윗과 그의 자손을 경멸하고 있지만 여편네(=여종)들은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동성 편역)

 

[경향잡지, 1988년 10월호, 다마수스 빈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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