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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시편: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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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3 조회수3,656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시편 :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성서를 읽다 보면, 하느님 말씀의 놀라운 일관성을 깨우쳐 주는 몇 가지 기본 개념들을 거듭 만나게 된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밝혀 주는 점진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공포를 몰아내기에, 성서의 길에서 만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가 기쁨이다. 바로 “주님을 우러러 보는 기쁨”(시편 26,4)이다. 시편을 노래한다는 것은 바로 이 기쁨의 길을 걷는 것이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기쁨의 낙원으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창세 2,5-17). 이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다. 창세기의 낙원은 동화 속에 나오는 “꿈동산”이 아니다. 에덴 동산은 바로 하느님께서 손수 일하시는 곳, 하느님 사랑이 현존하는 지성소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당신 사랑의 반영을 보시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기쁨”이다. 하느님의 지성소에서는 사람이 자기를 들어높이는 영광이란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섬기는 자리만이 있을 뿐이다. 기쁨은 하느님과 사랑을 일치시키는 끈이며, 이는 곧 관상과 찬미의 기쁨이다. “기쁨의 동산”은 사람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하여 자유롭게 쉬는 최초의 성전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게 하는 동기로서 기쁨을 주셨으나, 사탄은 사람을 창조주와 갈라서게 하는 유혹의 미끼로서 그 기쁨을 써먹었다. 타락의 범죄는 인간에게서 기쁨을 빼앗아 버렸다. 욕망이 기쁨의 자리를 차지하고, 이내 그 욕망은 잔인성으로 나타난다(창세 4,23-24 참조).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거두지 않으셨다. 새로운 “아담”,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창조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스런 아들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불러내시어(호세 11,1) 약속된 땅으로 데려가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 이 기쁨의 동산에서 이스라엘은 자유롭게 살았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섬기는 사람으로 세우신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안식을 얻었다. 인간의 타락으로 사탄이 세상의 군주가 된 이후였기에, 전쟁과 정복이 없이는 안식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감미로운 수금의 선율로 사울에게서 절망의 악령을 내쫓는 다윗, 그가 하프를 타며 역사의 장에 들어선 것은 무한한 뜻을 지니고 있다.

 

다윗은 분명 전쟁을 피하지 않았다. 진정한 군인으로서 골리앗을 쳐이긴 그는 가장 이상적인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써, 다윗은 자신의 승리에서 자기 민족과 온 인류 앞에 영광을 받으시는 하느님을 뵈었다. 그는 진정 하느님의 종이고 하느님의 군인이었으며, 하느님께 노래를 불러드리는 하느님의 가수였다. 그의 영혼은 신뢰로써 하느님 자비의 햇살을 받아 찬미로써 그 빛을 반사시키는 맑은 거울이었다. 전쟁과 비탄과 승리, 그 생애의 모든 사건들, 모든 눈물과 기쁨이 바로 시와 노래가 되었다. 그 노래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갈망하는 노래였다. 가장 이상적인 이스라엘 사람인 왕의 임무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맡기신 특별한 과업을 수행하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다. 하느님 백성의 임무란 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시키는 사제적 백성으로서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보편적인 다스림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시편은 바로 이러한 계획의 한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 다윗은 시편 통하여 자기 백성과 온 인류의 찬미로써 하느님을 왕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받아 하느님의 영광이 머물 성전을 지었다. 성전은 신랑이신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신부 이스라엘과 함께 머무시고자 한 “기쁨의 동산”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군주는 감각의 기쁨으로써 다시 한번 사람을 주님의 기쁨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또 다시 욕망은 잔인한 폭정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솔로몬은 수많은 외국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고 그 여인네의 신들을 섬기며 백성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워 주었다(1열왕 11,1-2; 12,4). 결국 그가 죽자마자 이스라엘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그의 성전은 한갓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다윗의 참 아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어 당선 몸의 성전을 다시 세우셨을 때에 그 실상이 드러났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해방시키시어 교회의 낙원에서 안식을 얻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시어,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들”(사도 2,11)을 찬미하게 하심으로써, 다윗의 시편들을 신자들의 입술에서 모두 되살아나게 하셨다. “성시와 찬미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에페 15,19).

 

바로 이때부터 시편은 “새로운 아담”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되어 왔다. 현재의 시편집은 150편을 담고 있는데 그 중 73개의 시편이 “다윗의 노래”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다. 물론 시편들을 모두 다윗이 지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윗과 관련되어 있거나 “다윗식의” 시편이라 할 것이다. 제목만을 보자면, 또 모세의 기도 한 편(89), 솔로몬의 노래 두 편(71; 126), 아삽의 노래 열두 편(49; 72-82), 코라 후손의 노래 열한 편(41; 43-48; 83; 84; 86; 87)등이 있다. 그리고 성전으로 올라가는 순례자 등의 집단이 부르는 노래 열다섯 편(119-133)과 할렐루야 시편들(105; 110-116; 134; 135; 145; 148-150)이 있다. 이 시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것은 분명하며, 기원전 1세기 중반에 현재의 시편집 형태를 갖추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약 성서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저작자의 표기는 그 원저자를 밝힌다는 뜻보다는 하나의 분류 방법으로 쓰여지고 있다. 시편의 여러 유형을 알아보는 것은 그 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시편들이 만들어진 삶의 자리를 찾다 보면, 대단히 많은 시편들이 선택받은 백성의 경신례(예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과월절(빠스카)을 비롯 이스라엘의 모든 축제는 온통 음악과 노래, 춤으로 어우러졌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축제의 모임에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며 하나의 율법과 하나의 성전을 가진 모든 백성은 주님 안에서 기쁨과 형제애를 느끼고 일깨우며, 민족의 기원과 조상들의 역사를 마음속에 새롭게 다져 간직하였다.

 

시편은 이제 교회의 기도서가 되었다. 이는 그 아름다움이나 교리적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시편의 전례적 성격 때문이다. 공적인 경신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상 생활의 차원을 들어 높여 하느님께로 향하는 삶의 운명을 깨닫게 되었다. 삶의 모든 의미가 전례로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과거와 미래, 시작과 끝이 바로 축제의 “오늘”에서 만났다. 전례 안에서는 역사적 사건들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통이 이루어진다. 개인은 백성 전체의 공통된 정신속에 빠져드는 것이다. 과거의 “조상들”과 현재의 지도자들이 미래의 구세주께 대한 전망 속에서 함께 성장하였다. 사건과 사람 사이의 이러한 이중 관통은 시편들 속에서 가장 완벽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 그리고 온 인류가 서로 만나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 그 분의 죽음과 부활이 선택받은 백성의 역사를 이루는 모든 사건의 정점에 서 있다. 이는 일부 메시아 시편만이 아니라 시편 전체를 그리스도의 빠스카 사건에 향하게 함으로써 시편에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편은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하는 그리스도의 목소리로 들리게 되고, 그리스도를 향해 부르는 교회의 노래 소리로,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교회의 찬미로 들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과 사건의 상호관통을 표현하고 있는 시편은 생활의 모든 영역, 그 슬픔과 기쁨, 즉 하느님의 피조물 전체를 하느님의 현존 앞에 데려다 주는 하나의 수단이 되고 있다. 대단히 많은 시편들이 바로 찬양의 노래이다. 우리는 입술만으로 하느님을 찬양할 수는 없다.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정신으로 영혼의 내밀한 밑바닥으로부터, 우리는 하느님을 찬미하여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의 전존재는 하느님의 영광이 좌정하시는 옥좌가 되고, 찬미 그 자체가 하느님의 일이 된다. 시편이 말하는 “영광”이란 하느님과 사람이 극히 내밀하게 만나는 인간의 드높은 영혼이다. 신약 성서에 비추어 말하자면, 그것은 세례받은 사람의 영혼 안에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숨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미하라.”는 시편의 마지막 구절은 오직 “심령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1고린 14,15)교회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영광이 사람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 때, 그 영광은 또한 시간의 끝까지 가닿고 온 우주로 퍼져 나간다.

 

시편의 찬미는 따라서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이다. 시편에 자주 나오는 표현과 같이, 시편은 “새로운 노래”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노래이다. 많은 시편의 종말론적인 성격은 바로 그리스도의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노래가 되도록 미리 운명지어졌던 것이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대인 편역)

 

[경향잡지, 1989년 3월호, 다마수스 빈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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