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에제키엘: 최초의 영성 지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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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3 | 조회수3,447 | 추천수1 | |
[성서의 세계 - 구약] 에제키엘 : 최초의 영성 지도자
심판, 참회, 회개, 희망의 모든 예언자들 가운데서 에제키엘은 분명히 가장 극적이고도 걸출한 인물이다. 그의 예언 전체는 말씀과 상징적인 행위가 어우러진 독특한 조화로 두드러져 보인다. 사실 이 두 가지 요소가 촘촘하게 짜여진 에제키엘 예언서를 읽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메시지로써만이 아니라 십자가 위의 구원 행위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시었다. 에제키엘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한 전형이라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힘을 주신다.” 또는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의 그 이름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멸시당하는 사람” 또는 “비천한 사람”이라는 부지였다. “하느님의 힘”이 된 “비천한 사람”의 아들은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그들의 완전한 정치적 패배, 성전과 도읍의 파괴, 귀양살이를 하는 현재의 비참한 처지가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시는 하느님의 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라는 하느님의 사명을 받았다. 에제키엘은 해골산 위에서 성전인 당신 몸의 파괴를 통하여 힘있는 분, 주님이 되시고 새로운 세대의 맏이가 되신 그리스도의 내림을 예언하도록 영감을 받았다. 따라서 에제키엘만이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사람의 아들” 또는 “아담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예언자라는 사실은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공동 번역에서는 “너 사람아”라고 부른다.) 그는 참으로 새로운 세대의 정신적인 아버지다. 그 새로운 세대는 하느님의 영이 정화수를 끼얹어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시고 새 마음과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신 세대다(36,25-27). 무덤을 열고 일어나(37장), 평화의 영원한 계약 안에서 목자 다윗의 주위에 모여드는(37,24) 새로운 이스라엘을 그는 본다. 그는 새로운 성전, 새로운 나라를 본다(40-48장). 거기에는 끝없이 깊어지는 하느님 영의 강물이 흐른다. 에제키엘은 무덤에서 일어나는 새 사람처럼 유배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대표한다. 그는 새로운 창조의 맏이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아담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에제키엘이 자기 민족과 전인류에게 설파한 예언의 메시지 전체는 예언서의 첫 장에 기록된 하느님 영광의 찬연한 현시 속에 담겨 있다. 에제키엘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그발강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거룩한 현존이 성전에만 있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흩어져 있는 “여러 나라에서 얼마 동안 그들의 성소가 되어”(11,16) 주실 것이다. 그 현시를 몰고 온 폭풍은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의 강도를 상징한다. 에제키엘은 자기 예언서의 첫째 부분(4-24장)과 둘째 부분(25-32장)에서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을 알려 준다. 불빛이 뻗는 구름은 계약의 백성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상징한다. 네 생물과 네 바퀴를 지닌 병거는 전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인 지배를 상징한다. 영이 움직이는 눈이 달린 바퀴는 어디에나 계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가리킨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류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끌어 가신다. 네 생물의 얼굴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왔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설명은 네 복음 사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들은 다 확실한 근거가 없다고 본다. 네 생물 또는 천사들(케루빔)은 하느님의 영광을 지키고 떠받든다. 가까이할 수 없는 빛 속에서 드러나는 사람의 모습은 육화의 신비에 대한 예언적인 암시로 해석되어 왔다. 옥좌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에워싸는 무지개는 하느님과 그 피조물들 사이에 있는 평화의 상징이다(창세 9,13 참조). 그리스도교 예술에 있어서 이 환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다스림을 표현하는 표본이 되어 왔다. 이 환시는 참으로 부지의 아들 에제키엘이 이교도들의 땅에서 보았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였다. 심판 속에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에제키엘의 주 야훼는 바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러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부활하신 구세주이시다.
한 사제의 아들이었던 에제키엘은 귀족 계급에 속했으므로,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 함락 후 유배지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다. 그는 “유배의 예언자”다. 에제키엘은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의 뜻을 밝혀 준다. 예레미야처럼 그는 권력 정치의 틀 속에서 그 의미를 찾지 말라고 타이르며, 물리적인 힘으로 민족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정치적인 혁명을 도모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한 시도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물질에만 연연하게 하여, 그들 실패의 정신적인 원인 곧 죄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그들의 중대한 죄상을 깨닫도록 히는 것이 예언자의 첫째 의무요 근본 책무다. 에제키엘은 그 예언서의 첫째 부분(4-24장)에서 이 임무를 수행한다. 하느님의 영광은 바빌로니아의 군대 때문에 성전을 떠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그 영광을 더럽힌 역겨운 짓 때문에 하느님께서 지성소를 떠난 것이다(8-11장). 에제키엘은 장마다 이스라엘의 암울한 죄상을 거울처럼 비쳐 주고 있다. 그는 “제 생각에 끌려 다니며” 멋대로 지껄이는 거짓 예언자들을 거침없이 고발한다(13장). 오직 사랑만이 일으킬 수 있는 분노로써 그는 하느님의 불충한 아내 예루살렘을 질타한다(16장). 그러나 이 모든 고발과 위협은 백성들을 참회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시고 죄인들이 회개하여 생명을 얻게 되기를 원하신다. 에제키엘은 백성을 그 전체로서만 말하지 않는다. 참회와 회개는 무엇보다도 그 개인의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영혼을 그 행실에 따라 심판하신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공동체의 껍질 아래 자신의 개인적인 책임을 감출 수는 없다. 심판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회개하라. 그러면 살리라. 살려느냐? 마음을 고쳐라”(18장).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최초의 영성 지도자였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에제키엘은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이스라엘 가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전한다. 예언서의 둘째 부분은 이교 백성들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25-32장). 이스라엘의 패배는 결코 이교 신들의 승리일 수 없다. 모든 민족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심판하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도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를 민족주의적인 “복수심”의 발로라고 보는 것은 완전한 오해다. 죄인들의 죽음을 언짢게 여기시는 주 야훼께서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패망한 민족들에 대한 예언자의 만가에서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찾을 수 있다(27, 32장).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부정한 모든 것을 불태워 그 도읍을 마침내 원초의 순수에로 되돌려 놓듯이(24장), 이방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또한 그들의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을 그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자기네 하느님으로 알게 하려는 것이다(28,26).
에제키엘은 예언서의 가장 중대한 대목인 마지막 부분(33-48장)에서 이러한 긍정적인 메시지로 돌아간다. 33장이 그 전환을 이루고 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온 사람이 “수도가 함락되었다.”(33,21)는 소식을 전해 준다. 실질적이고도 철저한 회개로써 “새 마음”을 갖기 전에는 물리적인 힘으로 정치 권력의 회복을 도모하지 말라는 에제키엘의 경고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왕으로 세워 놓은 시드키야가 반기를 들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과 그 도읍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파멸에 대한 에제키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왕국은 멸망해 버렸다. 백성들은 어떠한 힘도 없었다. 이제 영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어야 한다. 에제키엘은 희망의 예언자가 되었다. 33장은 모든 영적 쇄신의 근본 조건으로서 회개를 거듭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 장들에서는 이스라엘의 재생의 모습을 그려 나가고 있다. “이스라엘 산들의 기름진 목장에서” 당신의 양떼를 기를 메시아적 목자를 하느님께서 세워 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재생이 시작된다(34장). 시온산의 영광은 세일산과 에돔, 이 세상의 나라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영의 세례로써 이스라엘 가문의 마음을 바꾸어 주겠다고 장엄한 서약을 하신다(36,25-27). 마른 뼈들의 환시는 이스라엘의 재생이 하느님 영의 역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37장). 이 아름다운 장들은 각기 보편적인 전망, 즉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영적 쇄신에 참여하리라는 전망으로 끝을 맺고 있다(36. 37. 38장; 37,28). 구원 역사의 이러한 보편적인 전망은 마곡의 왕 곡(두꺼운 지붕 또는 박공이라는 뜻의 이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38-39장).
이스라엘에 재생을 가져다 주시는 하느님의 권능과 거기에 따르는 투쟁을 보여 준 다음, 예언자는 새로운 공동체를 묘사한다(40-48장). 이 난해한 대목을 예로니모 성인은 “신비의 미로”라고 부른다. 성전의 기본 구조와 치수, 국토의 경계선 등 여러 가지 세부 묘사는 영신적 완덕의 규범 내지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가문이 “제 스스로 얼마나 부끄러운 죄를 지었는지 알게 되도록”(43,10) 성전의 참 모양을 밝혀 주신다. 이러한 간단한 설명으로 그 세부 묘사의 미로를 파고들 수는 없는 일이지만, 43장 12절에 나오는 기본적인 “건축법”에 대한 이해로 만족하여야 할 것이다. “성전은 이렇게 짓는 법이다. 산꼭대기를 돌아가며 울타리를 친 경내가 모두 거룩한 곳이다.” 이전의 성전 건축법은 성(聖)과 속(俗)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었다(43,8). 그러나 새로운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성속의 구별은 폐기될 것이다. 거기서 인간의 삶 전체가 거룩한 산으로 들어 높여져 전우주를 성화하는 까닭에 그곳을 참으로 거룩하고 거룩한 곳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거룩하고 거룩한 곳”이라는 이름은 절대 신성 불가침의 좁은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천지 사방에 거룩함을 비쳐 주는 중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지성소와 세상을 갈라놓는 장막은 영원히 찢어지고 말았다. 성전과 도읍과 나라를 갈라놓는 경계선은 이제 없어지고 말았다. 성전의 연장이 도읍이고 도읍의 연장이 나라다. 성전 동쪽 문턱에서 솟아 나오는 물(47,1)이 도읍과 나라로 흘러 들어간다. 그 강물에서 헤엄치는 것이 곧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며 사는 신앙이다. 참 신앙이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는 자리다. 그 신앙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도읍지의 이름은 “야훼 삼마”(주님 여기 계시다)이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대인 편역)
[경향잡지, 1989년 7월호, 다마수스 빈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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