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서는 이렇게 읽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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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3 | 조회수3,383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구약] 성서는 이렇게 읽어야 한다
* 본지는 구약성서의 이해를 돕기 위해 1970년 이탈리아 바오로 출판사에서 펴낸 베난티우스 더 레이유의 “성서 앞에 선 현대인” 중 구약 부분을 매달 조금씩 옮겨 싣는다. 저자 베난티우스 더 레이유 신부는 카푸친 프란치스꼬회 소속으로 1917년 네덜란드 라렌에서 태어나 1943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성서’(Bible)란 이름이 생기기까지
지중해 동쪽 해안, 레바논의 최고 봉우리를 등지고 베이루트에서 북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Jebeil이라 불리는, 주민 2천 명 남짓의 작은 소읍이 있다. 바다쪽에서 보면 마을은 마치 높이 솟은 암벽 위에 있는 새 둥지처럼 자태를 드러낸다. 마을의 이름은 바로 이러한 위치를 암시한다. Jebeil은 언덕 혹은 산을 뜻하는 아랍어 jebel에서 나온 말이다.
이 갑(岬)의 꼭대기에는 십자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사 양식의 중세기 성이 웅대한 유적으로 남아 있다. 말하자면 언덕 전체가 폐허투성이다. 십자군 시대의 성 곁에는 그 원형 기둥이 부분적으로 손상되지 않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극장이 있다. 그리고 그 가까이에 기원전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이집트의 영향을 반영하는 피라미드 형태의 신전이 세워져 있다. 아래층에서는 고대 신전의 폐허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존경받던 셈족 신 엘(El)을 가려 기원전 3000년경에 건축된 것이다. 좀더 깊이 발굴해 들어가면 마침내 도시의 원시 성벽과 둥근 천막 형태로 건축한 아주 오래된 집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집들은 기원전 4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대에 언덕 꼭대기에 하나의 웅장한 도시가 세워져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반쯤 바다에 면해 있고, 북쪽에 강어귀가 있는 덕분에 이 도시는 애초부터 천연의 항구를 지녔다. 어쩌면 이 항구는 엄청난 양의 산업 생산물을 마치 자석처럼 끌어 모으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항구인지도 모른다.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근동 전체의 상품들은 낙타 등에 실려 이 항구로 집결된 후 다시 배에 실려 지중해의 해안으로 운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배들은 그 곳의 풍요를 싣고 이 고대 해양 도시로 돌아왔을 것이다. 고대에 이 페니키아의 요지는 Gebal - 가장 오래된 바빌론 문헌에는 Gablu로 되어 있다 - 이라 불리었다. 고대 그리스가 통치하던 때에는 그 이름이 그리스화되어 Byblos가 되었다. 한편 실제 아랍식 명명(Jebeil)은 분명히 고대 셈족 명칭과 관련된다.
그리스 시대의 이름은 우리에게 흥미롭다. 종종 우리는 한 도시 - 산업 도시든 농업 도시든 혹은 해양 도시든 - 의 이름이 그 도시 특산물의 상표가 되는 것을 본다. 진가 있는 시칠리아 포도주의 생산지dls 마르살라(Marsala)의 경우가 그렇다. 아스트라칸(Astrakan)은 카스피 해에 있는 소련의 항구다. 그 이름은 그 곳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무두질하는 모피를 일컫게 되었다. 소아시아에 있는 고대 페르가모(Pergamo)는, 그 곳에서 특별한 기술로 종이가 제조되는데 자신의 이름을 “pergamena”에 넘겨주었다. 마찬가지로 그발(Gebal)이란 페니키아의 도시는 그리스 시대에 이집트에서 수입되는 상품 파피루스에 자신의 이름 비블로스를 넘겨주었다. 파피루스는 비블로스에서 엄청난 양이 거래되었고, 거기에서 레바논 주변의 셈족 나라들과 팔레스티나로 운송되었다. “비블로스의” 혹은 “비블로스”는 파피루스, 즉 필기 재료와 동의어가 되었다.
고대에 파피루스는 다양한 형태로 제조되었다. 흔히 그것은 하나의 막대에 둘둘 말아서 두루마리 형태를 이루는 긴 줄무늬 형태로 만들어졌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책들(정확히는 “volume”)은 폈다 말았다 하면서 읽었다. 그런데 파피루스는 분리된 낱장의 형태로도 제조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접고 묶을 수 있었으므로 책 - 비블로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그리스어로 비블리온, 즉 “비블로스산(産)”이라 불리었다 - 의 형태로 철하게 되었다.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특별한 책들이었던 성경들의 모음은 “성서”(l마카 12,9) 혹은 아무런 수식어 없이 “책들”이라 표기되었다. 이러한 책들에 대한 그리스식 명명(ta byblia)은 라틴어에서 “biblia”로 다시 취해졌고, 라틴어를 거쳐 현대 서구 언어에서 거의 예외 없이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침묵의 유적지 이름 그발 - 비블로스는 오늘날에도 성경(bible)이란 말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성경 해석의 쇄신
국민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젊은 엄마는 아이가 학교에서 배운 성경 이야기를 듣고 당황할 때가 있다. 엄마에게는 불과 몇 해 전에 자신이 배운 내용이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늙은 본당 신부는 젊은 보좌 신부가 신학교에서 배운 성서의 많은 문제에 대해 듣고, 혼란에 빠지고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탄식하며 자문한다. “옛날의 신앙 가운데 아직 남아 있는 게 무엇인가?” 비슷한 경우를 수없이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은 성경을 대할 때 서로 충돌하고 일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적어도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을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한다.
사실 지난 몇 십년 간 성서에 대한 설명을 하는 데 있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가장 오래된 이 “책”은 내용과 글자에 관한 한 그대로이나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된다. 젊은이들과 노인들은 실제로 같은 말을 읽지만 각기 거기서 발견하는 의미는 때때로 전혀 딴판이다.
이러한 변화에 있어서 중요한 해는 제2차 세계 대전 증인 1943년이다. 왜냐하면 이 해에 성서 연구의 쇄신에 관한 회칙인 “성령의 감도”(Divino afflante Spiritu, 9월 30일)가 반포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19세기초에 많은 학자들은 과학의 새로운 발견을 고려하면서 성서를 설명해야만 할 때 확실히 당혹감을 느꼈다. 사실 이 회칙은 새로운 지평을 열면서, 새로운 가능성뿐만 아니라 성경의 옛 말씀을 달리 해석할 필요성도 제공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거의 배타적으로 하느님의 영원하고 변할 수 없는 특성에 관해 강조했고, 전통적인 해석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이단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다른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확신하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가치 자체와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존재마저 의심했다! 사실 과학의 확실한 결과에 모순되는 책을 하느님께 영감을 받은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이렇듯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같은 19세기의 어떤 해석학자들은 성경에 대한 설명을 과학의 관점에 적응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쇄신에는 자유로운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이 선두를 달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다 폭넓은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많은 이틀은 성서의 영감성과 신적 기원을 거의 혹은 전혀 보호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유 비판의 결과, 교회 분위기 속에는 어떤 두려움이 일었고 따라서 성서 연구의 숙영지 같은 것이 생겨났다. 이러한 방식으로 가톨릭적인 해석과 과학 사이의 골은 더욱더 엄청나게 깊어만 갔다.
레오 13세의 회칙 “섭리하시는 하느님”(Providentissimus Deus, 1893년)은 성경에 대한 가톨릭 학문에 충격을 다시 주기에 참으로 필요했다. 사실 성서학자들은 두려움과 불확실함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새로운 설명의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쇄신을 이끌기 위한 확실한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교회 당국은 때때로 그들이 새로운 연구를 어느 지점까지 이끌어 갈수 있을지 알지 못해 경악했다. 결과적으로 성실한 지향을 갖고 착수된 많은 시도들이 교회 당국에 의해 잘리게 되었다. 이는 우리 세기의 초기 몇 십년 간에 특히 입증되었다. 그때 설립된 지 얼마 안된 성서위원회는 새로운 설명에 대해 보통 전통적인 관점을 방어하면서 답변을 제시했다.
그리고 위의 위원회가 제시한 전통적인 규범이 해석의 거의 전영역에 관여했기 때문에 진정한 쇄신을 위한 공간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따라서 1920년과 1930년 사이에는 전통적인 관점이 거의 배타적으로 지배했다. 그 시대에는 어떤 새로운 것이 드물게 제시되었거나 일반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만 주의를 기울였다. 한마디로 근원적인 변화를 위해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 비록 전쟁의 폭력이 중대한 이니셔티브를 불가능하게 할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근원적인 쇄신이 예고되었다. 한편 1943년에는 뜻밖에도 성서 연구에 관한 새로운 회칙이 반포된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크나큰 호기심을 가지고 그 내용을 기다렸다. 1900~1920년의 규범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쇄신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이 제공될 것인가?
이 회칙의 반포는 모두에게 기쁨과 위안의 동기가 되었다. 그것은 해방을 주는 말씀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밀한 규범에 따라 성경에 대해 새롭게 설명할 과제를 해석학자들에게 제시하면서, 건강하고 근원적인 쇄신의 가능성을 거의 제한 없이 허용했기 때문이다. 기초가 마련되었던 때로부터 50년이 지나서 마침내 착수된 건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 것이다.
성서 연구의 쇄신에 관한 긴 회칙에서 비오 12세는 우선 지난 50년간의 가톨릭적 해석을 종합했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사상은 미래에로 향해진다. 즉 참된 쇄신을 위한 계획을 제안하고, 매우 구체적인 규범을 수립한 일이다.
구체적인 규범은 몇 마디로 요약된다. 즉 문학유형(문체의 종류)에 대한 관심이다. 이러한 말 속에 “활동 계획(plan de campagne)”이 제안되고 모든 새로운 가능성이 요약된다. 성경을 해설하는 사람은 누구나, 올바르고 새로운 방식으로 본문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바로 거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비록 이 짤막한 지침이 어떤 설명을 필요로 한다 하더라도, 성서의 문학적인 특성과 성서 각권의 인간적인 부분을 정밀 조사하는 기준선에 대해 다룬다는 것은 누구나 이미 알고 있다.
19세기가 다 끝나도록 신자들은 성경을 거룩한 책으로, 하늘에서 직접 떨어진 하느님의 책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를 강조했다. 왜냐하면 그 권위는 오류가 없고, 이 말씀으로 신앙의 진리를 입증했고 반대자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성경의 어떠한 본문 안에서도, 무조건적이고 차별 없이, 하느님의 절대적인 말씀이 담겨 있는 것을 보았다. 반면에 새로운 회칙은 인간적인 요소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요구했다. 성서는 단순히 하느님의 말씀일 뿐 아니라 또한 인간의 말이며, 나아가 많은 사람들의 말이다. 그들은 각기 저자로서 성서 본문의 창조에 관계했다. 모든 저자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 각자는 사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 혹은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목표를 제시했다. 그리고 그들의 작업 방식과 특히 그들의 의향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달랐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책이 생겨났다. 성서가 “천상적인 단일체”가 아니라 몹시 다양한 작품의 모음이고, 거기에 인간적인 모든 감정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은 이렇게 설명된다.
성경에는 시의 형태로 가르치고 삶의 지혜를 전하고자 하는 책들이 있다. 어떤 책들은 강렬하게 훈계하는 경향과 함께 예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른 많은 책들은 가깝거나 먼 과거의 놀라운 사건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제공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서, 예언서, 그리고 교훈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도 가르칠 수 있고 예언적 메시지도 역사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숙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께서 감도하시는 효력이 단지 쓰여 진 글자에뿐만 아니라, 인간인 저자의 정신과 의향에 더욱더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단지 글자만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의향을 연구할 수 없다. 오히려 책의 총체, 작품의 특별한 성격, 문학 유형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오로지 책의 성질에 의해서만 하느님의 의향을 알 수 있고, 오로지 하느님의 의향만이 그르칠 수 없이 참되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복음서의 비유를 조사해 봄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의 목적은 교리를 가르치고, 교훈적인 문학 작품의 지혜를 주는 데 있다. 예컨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역사적 의향으로 고려하는 것은, 즉 그것을 역사적 지리학적 논리와 관련 지으려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비유의 유일한 의향은 도덕적 가르침을 주는 데 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7). 이렇게 분명하고 중요한 의향을 간과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나의 예언서를 마치 역사적 이야기인 양 읽는 것은 잘못이리라. 이 책은 역사에 대한 의향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예언적 메시지, 하느님 사랑의 보편적 성격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욥기의 시적 가르침을 역사적 정보로 보아서도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신학적 문제에로 이끄는 서문이다. 역사서에는 자연히 역사에 대한 것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같은 방식 혹은 같은 모양으로 첫 독회에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도 저자 - 즉 하느님 - 가 어떤 척도로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어떤 것이 그 책의 문학 유형인지 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역사서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은 새로운 회칙에 완전히 부합한다.
그러나 이것이 다양한 문제들의 해결에 길을 제시했다 하더라도 회칙에서 다루거나 논의하지 못한 다른 것들이 있었다. 게다가 교회의 영적 사목적 삶뿐만 아니라 계시된 교의 자체에 실질적으로 끼어들었던 - 그리고 끼어드는 - 다른 것들이 있었다.
논리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자격을 갖춘 순회 재판이었다. 실제로 닥쳐왔듯이, 맹렬하고 격렬한 논쟁을 예상하게 한 엄청난 양의 오래 되고 새로운 문제들이 여기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번갈은 토론을 거친 뒤, “계시 헌장”(Dei Verbum)이 완성되었다. 비록 냄비에 담긴 성서적인 문제들을 모두 대하지 못했고 하물며 다 논의하지 못했지만, “계시 현장”은 가장 현대화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이 문헌은 계시의 개념(1장), 따라서 계시의 전달 그리고 성전(聖傳)과 성서간의 해묵은 문제(2장)를 다루고 탐구한다. 3장은 성경의 “무류성보다는 가르쳐 주신 진리”의 개념에 좀더 머물면서, 영감과 해석에 관해 말한다. 이 장 전체는 비상한 중요성과 가장 새로운 방향에 관한 것이며, 특히 11~12항의 경우 비오 12세의 교의가 다시 새로운 강조와 지평을 띠고 나타난다. 복음서의 진리와 역사성에 관한 중대한 문제는 5장에서 - 보다 상세 하게는 18, 19항에서 - 다루어진다. 아주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개념을 분명히 하고 결정할 여백은 학자들에게 남겨 두고 있다. 종합적으로 보아, “계시 현장”은 “영감을 받아” 재선포되고, “참되고, 신앙과 영적 삶과 설교의 최상 규범이며, 신학의 영혼”인 성서에 대하여 파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점들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해석학자들의 탐구의 자유를 고스란히 남겨 두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격려하고 그들의 학문적 방법의 합법성을 인정한다(23-25항). 그러므로 레오 13세와 더 나아가 비오 12세에 의해 완성되고 성별된, 개방과 쇄신의 교의는 그만큼 지적인 것이었고 적시에 착수된 것이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0년 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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