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아담과 하와의 죄는 무엇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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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3 | 조회수3,722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구약] 아담과 하와의 죄는 무엇인가
첫 사람의 죄
지상 낙원에 관한 이야기의 문자적인 설명에서 우리는 에덴에서의 사람의 삶을 상세하게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식으로 그가 죄를 짓게 되었고 어떠한 잘못으로 그가 죄인이 되었는가 하는 사실을 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추적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형식적인 종교 서적 안에 표현되어 있는 그림을 눈앞에 갖고 있다. 그 그림에는 이 드라마에 대한 모든 상세한 것이 선과 색깔로 구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뱀이 칭칭 감고 있는 나무, 손에 과일을 든 여인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아담. 그 열매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딴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 같은 환상 속에서 볼 때 그 열매는 사과였다.
성서에서 단지 총칭적으로만 말하고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사과나무와 동일시되고 그 열매가 구미를 돋구는 사과 - 이른바 아담의 사과에 대해 생각해 보자! - 가 된다는 사실은 아이 같은 환상이 아주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려 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세밀하게 정할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다름 아니라 에덴 이야기의 저자는 아주 자세한 묘사로 몇 가지 위대한 종교적 진리를 선포하였다. 사실 그는 여전히 원시적이고 거의 아이 같은 방식으로 생각했던 한 백성을 위해 기록하였다. 창조와 지상 낙원에서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에서, 많은 세부 사항들이 그 조형성으로 깊은 교의적 의미를 총체적으로 줄 수 있도록 적절히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뱀에 대한 묘사는 독자에게 유혹자, 악마의 이미지를 주고 있음이 틀림없다. 만일 모든 것을 문자대로 본다면 어떻게 뱀이 여인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뱀의 내부에서 악마가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설명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합리화를 계속하면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을 다룰 때 풀리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남자가 자기의 탓을 여자에게 뒤집어씌우고 여자가 이번에는 뱀에게 핑계를 대자 하느님은 뱀에게 돈호법(頓呼法)을 쓰신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너는 저주를 받아, 죽기까지 배로 기어다니며 흙을 먹어야 하리라”(창세 3,14).
만일 악마가 뱀의 형태를 빌어 행동했다면 처벌은 진짜 악마에게 일격이 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뱀이 기어다니는 것을 하나의 벌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전에도 뱀은 기어다니지 않았는가?!
이야기 전체를 협의의 문자로만 이해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은 갑자기 분명해진다.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는 것은 마치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듯 패배와 비천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된 단죄는 직접적으로 사탄에게 향해진 것으로 이해된다. 말하자면 교활한 뱀은 악마를 의인화한다. 악마가 감각적인 형태를 빌려 사람에게 나타남으로써 그를 유혹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적인 암시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에덴이라는 틀이 행복의 변화를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의 나무 -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 를 필요로 했으므로, 나무 역시 유혹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열매를 따먹게 되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래서 다음의 요인으로 뱀은 나무에 칭칭 감겨 있는 것으로 소개된다.
현대의 해석에서 그러한 부언(附言)이 그 참된 의미로 이해될 때, 우리의 유년 시대의 많은 이야기 요소들은 퇴색하게 된다. 그러나 죄에 떨어짐은 남는다. 어떠한 일로 죄가 이루어지는지 정확하게 정할 순 없으나, “사과를 따먹음.” 즉 국민 학교 시절에 아이 같은 환상을 심어 줄 수 있고 또한 이미 성숙한 어른에게도 문제를 야기하는 죄와는 다르다.
현대 해석에 의존하더라도 죄에 떨어짐이 불순종의 행위로 일어났다고 분명히 밝힐 수는 없다. 불순종은 어떤 명령 혹은 특별한 금지를 가정한다. 성서는 하나의 금지령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나무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것 역시 문학적 고심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
어찌 되었든 사람이 독립된 방식으로 처신하도록 의도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자신의 계산대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자 했다. 그는 어떤 일이 자신에게 좋고 어떤 일이 나쁜지 스스로 결정하고자 했다. 성서의 말씀에 따르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느님처럼 되려고 갈망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해석학자들은 원죄가 교만과 불순종 혹은 반역으로 이루어졌다고 단언한다.
성서와 진화론
다윈이 “종의 기원”을 펴낸 1859년은 자연 과학에 있어서 유명한 해로 기록된다. 이로 인해 다윈은 현대 진화론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에 의하면 생명은 도태라는 방법에 의해 원시적인 형태에서 완성된 형태 - 사람 - 로 진보되어 왔다. 이 학설은 종종 다음과 같은 슬로건으로 요약된다. “사람은 원숭이로부터 유래한다.” 다소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진화의 마지막 고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단언과 함께 다음과 갈은 단언도 드물지 않게 듣게 된다. “한때 그러한 학설은 교회로부터 배척되었으나 지금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이는 진리에 부합하는 말인가? 성서로부터는 어떠한 것을 추론할 수 있는가? 현대 해석학은 무어라고 말하는가?
마지막 진술은 분명히 과장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문제에 있어서 사람의 직접적인 기원에 대한 교회의 그르칠 수 없는 천명은 결코 없었고,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톨릭 학설에 대해서 아직은 말할 수 없다. 한 세기를 지나오면서 이 문제에 대한 신앙의 관점이 바뀌고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진화론이 과학적인 사실과 실재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가설 혹은 직관에 의지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러한 이론을 지지하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거기서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하는 증명을 추론함으로써 끊임없이 그것을 무신론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뒤, 진화에 찬성하는 이론들이 증가하고 보다 많은 수의 지지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새로운 비전으로 창조주의 업적을 바라보아야 하고 사실 그 업적은 훨씬 더 놀랍고도 위대하게 드러나고 있음이 전에 없이 납득되고 있다.
다윈 이후 1세기가 지난 오늘날, 진화론이 훨씬 더 광범하게 인식되고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태도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유보적이다. 비오 12세는 1950년에 의도적으로 이렇게 천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는 살아 있는 어떤 물질로부터 인간의 육체가 기원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입증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물질을 매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계시의 원천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고 단정한다.” 왜 교황은 이러한 권고를 하였는가?
사실 계시의 첫 번째 원천인 성서는 근 20세기에 이르는 지금까지 진화론에 대해서 특히 진화론의 최종 결과인 인간의 기원에 대해 반대로 인용되어 왔다. 창세기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있어서, 모든 것은 엄밀히 역사적인 것으로 이해되었고 또한 사람이 흙으로 빚어진 것과 여자가 사람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역사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문자적인 설명과 함께 사람이 하나의 동물적인 생명으로부터 유래하였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해석은 이러한 관점에 대해 덜 엄격하고 보다 자유롭다. 창세기의 이야기에서 역사적인 핵심을 긍정적으로 찾고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묘사의 어떤 요소들을 인간적인 작업으로 그리고 문학 유형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구성의 유형에 있어서 인간의 기원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가 바로 그 분명한 예이며 증거이다. 두 이야기의 비교는 인간의 작업과 역사적인 핵심을 구별해내기에 가장 적합하다. 사실 첫 번째 이야기는 인간의 기원을 몇 줄로 말한다. 숫자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오로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라고만 말한다. 이것은 관사 때문에 “사람들을 만들자.”로 옮겨질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창세 1,27). 보다시피 하느님께서 행하신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고 그분의 뜻만으로 충분했다.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는 많은 세부 사항으로 나뉜다. 저자는 하느님을 흙으로부터 사람을 빚으시는 분으로 표현한다. 그 밖의 묘사는 이 사람이 고유한 이름으로 아담(사람)이라는 명사를 갖는 남자이고 자신과 동일한 존재를 찾지 못하는 고독한 사람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후에 이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짝을 갖고 싶어하였고 하느님께서는 여자를 창조하심으로써 이 원의를 들어주셨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중의 창조(남자와 여자)를 언급할 뿐만 아니라 독특하고도 새롭게도 아담의 갈빗대로부터 여자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두 이야기의 차이점은 옆으로 밀어 놓고, 단지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만을 교의적인 핵심으로 간직하자. 그분이 어떻게 행하셨는지에 관해서 성서는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며 또한 성서를 빌어 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거부할 수 없다. 게다가 그러한 학설과 성서의 창조 이야기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 몇몇 편협한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조주의 어떠한 개입도 배제하는 것만은 성서와 교도권이 단죄하는 분명한 잘못이다. 비오 12세가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계시의 원천에 호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창세기가 아닌 다른 텍스트와 교리, 즉 로마서와 그 안에 제시된 원죄의 교리를 목표로 삼았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0년 4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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