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아브라함은 부족의 이름이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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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3 | 조회수2,695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구약] 아브라함은 부족의 이름이었을까
성조들에 대한 이야기
“성조”(聖祖)라는 명칭은 잘 알려진 이름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연결된다. 성서는 이스라엘 12부족에게 그 이름을 넘겨 준 야곱의 아들 12명도 성조들 가운데 열거하나, 주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모든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묘사된다.
성조들에 대한 풍부하고 상세한 이야기는 창세기의 두 번째 부분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미 되풀이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역사적이긴 하나 몹시 특별한 방식으로 서술된 역사서이기 때문에 지혜롭고도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후편은 창조, 낙원, 홍수, 바벨탑 등 원초적인 이야기(혹은 성서의 선사)가 짧게 다루어지고 있는 창세기 전편(1-11장)에 비해 의심의 여지없이 더 가치가 있다. 그러나 후편도 다소 특수한 역사이다.
처음부터 11장까지 읽고 난 우리는 분명히 전혀 다른 분위기에 와 있게 된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함께 약속의 땅을 통과하고, 목자들의 천막 사이를 거닐며, 메마른 지역에서 엄청난 가축떼를 보게 된다. 마침내 우리는, 처음에는 요셉과 함께 그리고 나중에는 그의 11명의 형제와 함께, 에집트로 가게 된다. 저자가 전세계와 거의 모든 인류를 묘사하는 광대한 장면에는 한 목자 가정의 소박하고 고요하고 가정적인 분위기가 그 뒤를 잇는다.
오로지 성서의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에서만 이 가정은 하나의 민족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특수성을 고려해 볼 때 성조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과 열두 부족의 예비 역사라고 불릴 수도 있겠다.
비록 이스라엘의 선사가, 인간의 창조 때부터 저자가 살았던 시대와 그렇게 아주 먼 시대의 역사는 아니라 해도,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그가 그처럼 정확하게 정보를 입수하였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모세가 - 종교적인 전승이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지해 온 것처럼 - 이 장들을 모두 썼다면 거의 600년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그가 모두 파악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 일이 참으로 문제가 된다. 모세가 그런 과거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던 어떤 기록 자료가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료의 대부분은 말할 나위도 없이 구두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같은 경우에 그러한 자료들이 여러 세기를 지나오면서 다른 여건들에 의해 풍부해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들이 보다 가까운 시대에 완성되고 새롭게 정리되었다면 최종적인 작품은 보다 실제적인 숙고, 다시 말해서 다음 세기의 영향을 받았으며 따라서 성조들에 대한 이야기는 보다 가까운 시대의 문화와 관습의 단편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가능성이 있고 현대의 많은 저자들로부터 지지받고 있다.
여기서 야곱과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다음 세기에 우연히 -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 모든 민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고, 이름이 열두 아들의 열두 부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미 모세 시대에 그렇게들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조 야곱에 관한 어떤 고려들이 모든 민족에게 가치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유다의 경우에서처럼 어떤 묘사에 있어서 유다가 단지 야곱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훨씬 뒤에 오는 부족의 성격과 역사를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주로 개인에 대해 말하는 역사적인 이야기들은 보다 풍부한 이해 관계를 갖고 있고, 언뜻 보기보다는 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결정적인 발견에서 동기가 되어 야곱의 아들들과 심지어는 보다 유명한 세 사람의 성조마저 개별적인 인간이 아니었다고 단언한 어떤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과장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상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들의 분위기는 단지 기원전 18세기와 17세기에만 들어맞고 (이것은 시리아에 있는 마리의 발굴처럼 몇몇 유명한 발굴에 의해 잘 드러나고 있다.) 판관기와 열왕기 시대의 팔레스티나 분위기와는 그만큼 차이가 나기 때문에 훨씬 후대에 살았던 한 저자가 그러한 분위기를 결코 모방하거나 지어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조들에 대한 이야기가 참된 역사의 풍부한 핵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히 특별하고도 개별적인 색채로 한 개인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요셉이라는 한 부족에 대한 문제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요셉은 에집트의 부왕(副王)으로서 개별적으로 지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묘사되어 있는 이 성조에 앞서 이제 온 이스라엘과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인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선택된 첫 번째 성조, 하느님의 친구인 아브라함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하느님의 친구
성지 중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 가운데 하나인 고대 헤브론은 팔레스티나의 그 어떤 도시보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사실 헤브론에는 고대 회교 사원 안에 있는 사라의 무덤 곁에 성조의 무덤이 보존돼 있다. 게다가 이 도시는 아랍어로 성서가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의 친구를 가리키기 위해 부여하는 이름인 “엘칼릴”(el-Khalil), 즉 “친구”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성서를 읽어 보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친구임을 인식하게 된다. 창세기의 첫 열한 장은 어떻게 악이 점차 뻗어나가 인류의 일부가 하느님과 멀어졌으며 그 때문에 하느님께 버림받았는지를 암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곧 아브라함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새로운 상황이 대두된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로부터 한 인간을 선택하시고 이 사람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청하신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선택된 민족이 형성된다.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은총의 전달과 명료한 계시로 드러나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심려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낙원의 이야기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가 가리워진 것으로 보였던 하늘을 이어주는 끈이 이제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구원과 계시에 대한 역사의 기원이다.
성서로부터 그리고 성서를 가지고, 인간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알아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함께하는 인류의 시작 가까이에서 홍수 후 노아와 함께하는 또 다른 시작이 발견된다. 더 정확하게는 성 바오로가 지적하듯이 아담의 실패에 맞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한 복구가 자리잡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제2의 아담이라 일컬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아담, 노아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의 온전한 세대의 “으뜸”을 상징한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한 세대의 “으뜸”으로 선택되었으나 성서는 그를 결코 아담, 노아, 그리스도 곁에 두지 않는다.
특히 창세기에 대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연구를 해낸 바 있는 현대의 성서 비평은 성조들에 대한 이야기가 수많은 아들들을 거느린 한가정의 변천이 아니라, 예컨대 이스라엘, 에브라임, 므나쎄, 유다와 같은 부족으로 구성된 한 민족의 역사를 뜻한다고 단정한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이라는 이름도 한 부족의 고유한 이름일지도 모른다. 성서의 자료와 특히 마리 및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문헌은 하란, 나홀 그리고 어쩌면 데라, 스룩, 벨렉 등의 이름도 아브라함의 친족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도시와 민족들의 그룹까지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제, 아브라함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의 이름이 하나의 부족이나 민족을 가리킨다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도 한층 풍부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의 부족이었다면 선택된 민족의 기원은 하나의 개별 인간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그리스도 곁에 놓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아브라함에 대해서 선택된 민족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성서가 아브라함 주변에 언급하는 바로 그 이름들 때문에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무엇보다도 한 개인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 보다 확실해진다. 성서의 안팎 어느 부분에서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한 민족 혹은 한 부족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항상 단 하나의 인물만을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성서 안의 이 유일한 이름은 거의 끊임없이 선택된 민족의 아버지 혹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 불린다.
창세기 17장 5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많은 민족들의 조상”을 뜻하는데 그러한 설명은 아랍어에서 불가능하지 않다. 성서가 이스라엘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각기 그 부족을 이루는 열두(풍부함을 뜻한다.) 시조의 아버지라고 상기시키는 것은 동기가 없지 않다. 크투라(창세 25,1-6)나 손자 에사오를 통해서도 많은 민족이 아브라함과 연결된다.
신약 성서에는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란 표현이 아주 빈번히 나온다. 혈족으로서 또는 할례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모든 히브리인들의 영광이었다. 예수는 이러한 국민적 감정에 동의하나 그 의미를 약간은 바꾸어 이렇게 표현한다. “만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대로 할 것이다”(요한 8,39). 성 바오로는 이 새로운 의미를 더욱더 분명히 설명한다. 사실 아브라함은 할례나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할례를 앞서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음으로써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로마 4,11).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가 시작되었다.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도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히브리인들과 이교도로서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다. 하느님의 친구로서 그는 우리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0년 7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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