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십계명은 언제 이루어졌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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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3 | 조회수4,006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구약] 십계명은 언제 이루어졌는가
십계명의 연대
몇 해 전부터 내 방 창턱 위에는 “십계명”이라 불리는 작은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것은 잎이 얼마 안 달린 신품종이다. 각각의 잎에는 작은 녹색 점들이 두 개씩 짝지어 발견되는데, 잎의 크기에 따라 여섯 개인 것도 있고 여덟 개인 것도 있다. 잎이 충분히 커지면 줄기 근처에 아주 잘 보이는 열 개의 녹색 점이 짝지어 나타난다. “십계명 나무”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십계명 나무 잎의 무늬가 성숙, 성장기를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에 나오는 십계명의 정착 및 공식화 역시 이스라엘 민족의 발전, 즉 성장기가 지난 후에만 가능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어느 시대에 이루어졌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질문은 이렇게 된다. 십계명의 성서적인 공식화가 이루어진 것은 모세 시대부터라고 말할 수 있는가? 종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모든 세기의 사건 속에서 동반하시기로 결정하신 순간에 십계명을 공표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십계명의 기원은 이스라엘이 선택된 시점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자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종교에 있어서도 하나의 발전을 인정하는 현대의 학자나 비평가는, 십계명이 그 깊은 윤리신학과 고귀한 이상을 지닌 점으로 보아 수세기에 걸친 성숙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수세기에 걸친 변천에 길들여진 선택된 민족은 십계명을 자신의 법으로 받아들였다.
현대의 학자는 십계명의 공포 시기를 그처럼 늦게 잡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지침들을 발견했다고 받는다. 가장 확신을 주는 증거는 예언자들에게서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기원전 8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불충을 끊임없이 고발했던 예언자들은 소예언자든 대예언자든 십계명을 결코 인용한 적이 없다. 이는 그 당시에 십계명이 보편적으로 알려졌고 받아들여졌다면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반대로 십계명이 예언자들 시대 이후에 편집되어 받아들여졌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상 숭배 금지에 대한 특별한 언급에 비추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600년까지 유다 백성은 우상 숭배 죄를 반복해서 범하였다. 500년경 유배에서 돌아올 때에야 이 백성은 결정적으로 정화된 것으로 드러나고 참되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섬긴다. 이렇게 말하면, 이미 600년 이전에 우상 숭배를 비난하였던 예언자들이 시나이의 계획과 전혀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하다! 수백 년간 십계명이 전혀 없었던 듯이 살아왔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러나 만약 십계명이 예언자들이 사라진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면 모든 것은 자명해지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비평가는 보다 후기라는 다른 증거로서 십계명의 공식화에 담긴 어떤 표현들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집, 땅, 이스라엘 도시 안의 이방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시나이산 기슭의 유목민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고, 훨씬 후대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만 한다.
엄밀한 연구에 의하면, 지적된 말들은 정착하고 있는 상황을 추측하게 한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공식화는 팔레스티나에 정착한 후대로 내려온다. 그러나 십계명이 성서에서 두 가지 다른 구절로 발견되고(출애 20장, 신명 5장), 이 두 가지 공포에 있어서 핵심이 문자상 같으며, 단지 몇몇 계명의 노작만이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노작은 문화적인 변화의 대상이었을 뿐이라고 결론 내릴 필요가 있다. 변함없는 핵심은 간결하면서도, 문화에도 시대에도 매이지 않았던 두세 마디의 아주 짤막한 열 개의 구절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거의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한 구절들은 “시대를 뛰어넘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게다가 상(像)에 대한 존경 금지는, 비교 종교학의 자료에 의하면, 바로 유목 생활의 분위기, 즉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던 시대를 뜻하는 것같다.
예언자들이 시나이의 법에 결코 다시 나타나지 않는 사실은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아니다. 각 예언자는 그만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명에 압도되었고 현존하는 자료에 의거해야 할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선인들의 권위를 이끌어 내는데 익숙해 있지도 않았다. 그의 말은 하느님의 말씀이었고, 그러기에 그는 시나이의 법과 동일 선상에 있었다.
우리는 십계명의 노작에 있어서의 진보를 받아들이는 반면에 계명의 수에 관한한 발전을 인정할 의무는 없다. 사나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은 십계명을 통하여 종교적인 충만함에 이른다. 십계명에 드러나 있는 높은 윤리성은 오랜 기간의 발전 덕분일 수는 없고 오히려 계시의 하느님의 이례적인 활동 덕분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법의 발전
어느 날 예수께서는 변함없이 모세에게로 되돌아가는 백성의 완고한 지도자들과 논쟁에 휘말리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비난하셨다. “만일 너희가 모세를 믿는다면 나를 믿을 것이다. 모세가 기록한 것은 바로 나에게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5,46). 이 말씀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모세가 갈대펜을 손에 쥔 채 종이 두루마리 위에 몸을 구부리고 고대 히브리 문자를 기록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예수님 자신은 모세를 작가로 암시하신다. 그리고 이미 구약 성서에 언급되고 있는 그것으로 모세가 이스라엘의 법전을 직접 썼다고 단정되는 표현인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 종종 말씀하신다. 이 법전은 성서의 처음 다섯 권(초오경)에서 발견되므로 모세 오경이라 불리고 있다.
16~17세기까지 모세가 성서의 초오경을 직접 썼다는 사실은 거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그 뒤 이 의견에 약간의 의혹이 있었으나 이러한 의혹은 처음부터 단호하게 격퇴되었다. 그러나 18세기와 특히 19세기의 전통적인 명제들에 대한 반대 의견이 증대되어 그러한 명제는 거의 견딜 수 없게 될 정도로 쇠약해져 갔다. 가톨릭 측에서는 전통적인 관점을 교의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교의에 대한 공격이 흔히 불가지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충동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관점을 견고하게 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동기에서 20세기초 로마에서는 몇 가지 지침을 발표해 새로운 이론을 분명히 거부하였다. 그것은 가장 높은 교회 당국에서 내린 결정, 즉 신앙 교리는 아니었고 단지 성서 문제에 대해 특별한 권한을 가진 위원회의 실천 규범이었다.
이미 50년 간 생명력을 지녀온 위의 규범은 오늘날도 거기에서 나온 실천적 영향력을 통해 우리 시대의 원칙으로 권장되고 있다.
최근 20년 사이에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해지고 있다. 처음의 지나친 반응은 곧 보다 분별 있게 재정립되었다. 반종교적인 감정들의 대부분은 모든 의문이 보다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검토될 수 있을 정도로 약화되었다. 1906년에 위험스러운 비판적인 태도를 경고했던 로마의 그 위원회는 1948년에 비판적인 연구의 쇄신과 구명에 자극을 줄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법률이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발전되고 확장되었다는 것은 어느 학자에게나 이미 확고 부동한 사실이다. 가장 오래된 규범들이 원시적이며, 반유목민에게 적합한 규범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러한 원시 규범들은 훨씬 현대적인 지침 속에 포함되어 몇몇 성서 본문에 남아 있다. 많은 경우 후대의 구절들이 예전의 구절들을 대체하고있다.
성서 편집에 있어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부분을 거의 배타적으로 고려하였던 이전의 성서 해석에서는 모세가 율법을 쓰면서 예외적인 인식, 나아가 예언적인 비전을 자유로이 이용하였다고 믿었다. 인간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율법의 모든 요소들은 모세의 이러한 초자연적인 은사의 탓으로 돌려 버렸다. 그는 모든 것을 예견하고 규정하였다. 오늘날 해석학자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평가 절하함이 없이, 성서의 인간적인 측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모든 것을 쓴 저자의 인간적인 재능도 고려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아주 특별한 관심을 강고 당시의 역사적인 분위기에 의해 조건지워졌던 다양한 사건들을 고려하고 이러한 것들을 어떤 책 혹은 그 책의 어느 부분의 연대를 정하기 위해 이용한다. 그래서, 예를 들면, 왕과 관련된 법(신명 17,14-20)은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었던 시대에는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왕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법은 사울 이후에 작성되었다. 게다가 그것은 솔로몬의 기이한 통치, 군사 훈련 그리고 이방 여자들의 수많은 방(harem)에 대하여 비난을 퍼붓고 있다. 따라서 솔로몬 이후 시대에 해당한다. 왕에 관한 구절은 그러므로 새로운 것이지 모세의 젓이 아니다.
초오경의 역사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계속적인 발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어떤 이야기들은 훨씬 후대의 저자들에 의해서 원시 문헌에 첨부되었다. 저자들은 이야기를 그 구두 전승에 의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창조 이야기(창세 1장)는 낙원 이야기(창세 2-3장) 앞에, 아주 늦은 시대에 첨부되었다.
따라서 한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이스라엘 법의 유일성은 표본으 로 생각된다. 그 안에서 이후의 거의 모든 세기의 단편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모든 법률의 제정이 그러하듯이 오래된 구절과 새로운 구절을 모아 놓은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모음이 여전히 “모세의 것”라고 불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풀린다. 그 답은 모세가 최초의 법전, 즉 오늘날의 율법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모든 쇄신은 모세의 이러한 자료에 근거하여 모세 자신이 지적한 지침에 따라 이루어졌다. 모든 새로운 요소는 모세의 계획을 지속시켰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율법은 모세의 정신에 의해 고무되었고, 당연한 권리로 모세의 율법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모세의 모습
웅장한 영화 “십계”의 마지막 부분에, 여호수아에게 다섯 가지 역할을 넘겨 주며 백성들을 떠나는 모세가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행동으로 모세의 전사명이 성서의 초오경 구성과 거의 부합하게 된다. 사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세를 저자로 상상하고 있으며, 모세가 오경 중에서 극히 적은 부분만을 종이 위에 정착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거의 모든 이가 놀라게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 현재의 표현이 성서의 자료와 일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자연히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또한 모세의 참된 성서적 이미지는 어떠한 것일까 하는 의문도 떠오른다. 성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모세를 분명히 활동한 작가로 보기도 하나(요한 5,46), 성서의 거의 도처에서 다른 비전이 나타난다.
사도 행전, 특히 스떼파노 부제의 말에서, 모세는 고통받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한 이스라엘인의 입을 빌어 나오는 비난(사도 7,27-28참조)은 모든 백성에게 해당된다. “그러자 자기 동료를 학대하던 사람이 모세를 떼밀며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나 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사도 행전은 모세처럼 예수님도 군중에 의해 거부되었고 둘 다 모두 백성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의해 판관과 구원자로 설정되었다고 말한다(사도 5,31; 7,35 참조). 둘 다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지도자가 된다. 성서에서 지도자의 사명은, 그 다양한 국면들이 구별될 수 있을 정도로, 모세를 통해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는 고통스러운 국면에서 백성의 선두에 있다.
정신적 종교적인 상황과 정치 문화적인 상황 사이의 구별 - 서구의 조건에 근거한 구별 - 에 기초를 두고 어떤 이들은 모세를 복종치 않는 소수의 사람들을 에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여 독립된 민족으로 만든 정치적 영웅으로 생각하기도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요소를 과대평가하고 모세를 하느님과의 중개적인 가능에 있어서 거의 배타적인 인물로 생각함으로써 그를 사제로 인식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시각은 모두 모세 시대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견해를 발전시킨 것으로서 배척되어야 한다.
성서 자체는 모세에게 다른 기능 혹은 더 낫게는 중요한 권한을 부여한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되고 다양한 색깔로 채색된다. 여기 저기서 그 색깔들은 뒤섞인다. 왜냐하면 성서 저자들이 종교적인 활동과 정치적인 활동을 구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세의 중요한 사명은, 지역적으로 고려해 볼 때, 에집트 국경과 약속의 땅 사이에서 설명된다.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도 에집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출애굽 이후 독립된 민족이 된 이스라엘은 엄밀히 말해서 종교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했고, 빼앗겨서는 안 될 수도 예루살렘을 둘러싼 땅에 종교적인 문화를 이룩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명에서 모세는 중개자로 처신하였다. 호세아는 이러한 의미에서 모세를 예언자라고 부른다(호세 12,14 참조). 기적을 통해 사명을 수행하였던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모세는 출애굽 동안에, 그리고 광야에서 기적의 비를 쏟아지게 하였다. 모세는 그 어느 예언자들보다 하느님과 분명히 접촉하였다. 그러한 만남은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시작되어 시나이산 위에서의 40일간에 절정에 이르렀고 느보산 위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작용하신 모세의 무덤으로 끝났다(신명 34,6 참조).
그 후에도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과 법을 백성에게 끊임없이 설교하였지만, 그들의 과제는 모세가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역사의 시초에 대해 말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모세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법의 창설자였다.
백성을 구원하고 재조직하면서 모세는 첫 번째 계약, 즉 구약의 창설자가 되었다. 예수께서 타볼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엘리야는 예언자들을 대표했고 모세는 원초의 시기를 대표했다. 가운데 계신 예수께서는 예언자로 선포되셨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활동을 계속하시면서 입법자, 신약의 창설자 그리고 새로이 선택된 백성의 구원자로 나타나셨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0년 1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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