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하루 동안의 암흑 끝에 얻어 낸 승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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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3 | 조회수2,704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구약] 하루 동안의 암흑 끝에 얻어 낸 승리
여호수아는 실제로 해를 멈추게 했나
“야훼께서 아모리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이시던 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야훼께 외쳤다. ‘해야,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멈추어라.’ 그러자 원수들에게 복수하기를 마칠 때까지 해가 머물렀고 달이 멈추어 섰다. 이 사실은 야살의 책에 기록돼 있지 않는가? 해는 중천에 멈추어 하루를 꼬박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야훼께서 이렇게 사람의 소리를 들어주신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 편에 서서 싸우셨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을 이끌고 길갈 진지로 돌아왔다”(여호 10,12-15).
갈릴레이가 여호수아기의 이 구절에 대한 지나치게 문자적인 해석에 대해 목청을 높인 순간부터 시작해서 구약 성서의 어떠한 기적도 여호수아시대에 있었던 해에 대한 기적만큼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갈릴레이 이전에는 해와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데 있어서 일정한 시간 동안 멈추었다 - 성서에 그렇게 자의적으로 쓰여 있지 않은가? - 는 생각에 이의가 없었던 반면에, 갈릴레이 이후에는 수많은 새로운 설명들이 안출되었다.
모든 새로운 설명들은 해가 우리 태양계의 중심이며 성서는 하느님의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원칙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해묵은 문제를 일치시키기 위하여 오늘날은 구성에 대한 문학 유형에 호소한다.
해에 대한 기적은 여호수아기 10장 12~15절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기적은 10장 1~27절에 기록된 가나안 남부의 동맹군들을 상대로 한 군대 파견이라는 무미건조하고 뼈대뿐인 보고서의 흐름을 끊어 버린다. 시적으로 삽입된 이 부분은 몹시 관심을 끌고 있다. 10장 16절의 이야기가 10장 11절에 상당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앞서 말한 삽입구가 “이 사실은 야살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라고 하였듯이 분명히 다른 책에서 취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성서의 다른 곳에도 야살의 이 책이 언급되어 있다(2사무 1,18; 1열왕 8,53). 그것은 국가의 노래를 모은 책이 분명하다. 나아가 여호수아기 10장 12~15절의 시적인 특성은 짜임새 있는 군사 보고서를 몹시 강하게 중단하고 있다. 그러므로 삽입구는 분명히 시적이다.
시인이 역사가보다 자유롭다는 것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쉽게 과장하고, 수사학적인 영상과 표상을 사용한다. 따라서 그를 자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흔히 가능하지 않다. 그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학자들은 여호수아기 10장 12~15절과 그 바로 앞에 나오는 짜임새 있는 보고서를 비교하였다. 이제 우리는 10절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적을 격파하셨다는 사실을 읽게 되나, 그것은 일어난 일을 사실 그대로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하늘로부터의 표지, 어떤 기상학적 현상을 떠올리고 있다. 그것은 10장 11절에서 확인된다.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쫓겨 뱃호론 비탈을 타고 아제카까지 달아나는데 야훼께서 하늘로부터 주먹 같은 우박을 쏟아 그들을 죽이셨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칼에 맞아 죽은 사람보다 우박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커다란 우박이 어두운 하늘로부터 쏟아지고 이어 어둠이 덮는다. 그러므로 이 기상학적인 현상은 몹시 맹렬한 폭풍우였을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 12~15절에서 자기 방식대로 묘사한 것은 이 어둠이다. “멈추다”와 “머물다”라는 말을 그는 거기서 “빛나지 않다”, 해와 달이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말 대신에 은유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때때로 우리는 지는 해에 대해서 쉬러 간다고 말하고 아이들 말로는 사라지는 해가 “자러” 간다고 한다. 일식의 경우에, 이스라엘과 일반적으로 고대 근동 사람들은 해의 휴식이라고 말했다는 정보들이 있다. 점성학 문헌들은 천체들의 휴식에 대해서 말한다. 성서는 달이 어두워지는 것을 지적하고자 할 때 “멈추다”라는 말을 사용한다(하바 3,11). 마찬가지로 해가 기브온 위에 머물고 달이 아얄론 골짜기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가나안인들은 여호수아의 군대에게 쫓기는 동안 어둠 때문에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몰랐다. 커다란 우박이 이미 가망이 없는 적을 내리치는 동안 여호수아는 해와 달이 휴식하고 있으라고 기도했다. 그의 기도는 받아들여졌다. 거의 하루 동안의 암흑 뒤에 이스라엘은 승리를 얻어냈다.
역사적인 어려움은 라틴어 역, 즉 불가타에 번역된 14절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게 긴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그러나 정확한 번역은 이렇게 된다. “그와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성과가 풍부한 날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스라엘의 판관직
사무엘은 권위 있는 예언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판관이었으며, 마지막 판관들과 첫번째 이스라엘 왕 사이의 과도기에 있었던 영웅이라 불릴 수 있다. 그의 판관 기능은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해마다 베델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면서 그 가는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는 자기의 집이 있는 라마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거기에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거기에다 야훼께 제사 드릴 제단도 쌓았다”(1사무 7,15-17).
법정에 앉아서 온갖 애매한 문제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 있는 그를 눈앞에 보고 있는 듯하다.
판관기에는 바로 사무엘의 전임자들이 열거되어 있다. 사무엘과 마찬가지로 열두 명의 영웅은 이스라엘에서 판관직을 수행하였다. 그들 각자의 삶에서는 사무엘의 경우와 같이 법정과 판결 목록이 예감될듯도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판관들 중 유일한 여장부였던 드보라에 대한 묘사에서만 발견하게 된다. “그때 이스라엘을 다스린 판관은 라삐돗의 아내 여 예언자 드보라였다. 그가 에브라임 산악 지대 라마와 베델 사이에 있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밑에 자리잡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에게 나와 재판을 받곤 하였다”(판관 4,4-5).
이 여자 판관의 여장부다운 행위가 즉시 뒤따라 나온다. 남방 부족 군대의 우두머리 바락을 불러오게 하여 팔레스티나 북부의 하솔 왕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바락은 망설이다가 드보라에게 이스라엘 군대와 같이 가겠느냐고 묻는다. 만일 드보라가 자기와 함께 출발한다면 승리는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로 성서가 판관의 기능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판관은 이웃 사이든 동포들 사이든 소송에 있어서만 자신의 판결을 내릴 역할을 갖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선택된 백성의 국경 분쟁과 전쟁 상황에까지 마음을 쏟아야 한다. 그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의 적들의 잘못을 분명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시해야 하고 그들의 승리를 무효화해야 한다. 나아가 잃었던 땅을 다시 쟁취하고 전리품을 이스라엘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의 백성에게 평화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판관은 전쟁의 영웅이요,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하는 승리자이다.
판관기에는 단지 여섯 명의 “대판관”만 풍부하게 묘사되어 있고, 우리 모두는 그들 가운데 기드온, 입다, 삼손 같은 몇몇의 영웅적인 무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대판관들의 이야기 사이에 부수적으로 여섯 명의 “소판관”이 언급되지만,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게다가 이름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둘씩 여섯이라는 그 숫자다. 왜냐하면 열둘은 성서에서 흔히 충만함을 뜻하는 완전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열두 부족은, 묵시록(7,5-8)이 - 여기에는 단 지파가 거명되어 있지 않다 - 요셉의 아들 므나쎄의 이름으로 열둘이란 숫자를 완성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백성 천체를 대표한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의 완성된 제자단을 이루며, 이 때문에 마티아는 유다의 자리에 앉아야 했다(사도 1,15-26). 열두 판관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서던 때와 첫번째 왕 사울 사이의 시기를 완전히 채운다. 따라서 저자는 하나의 정밀한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시기를 요약해서 그리고 완전한 모양으로 나타낸 것이다.
달리 말해서 이 자유로운 역사 편찬 의도는 판관기 안에서 개괄적인 노선을 따라 고정되었다(2,11-19). 즉 ‘이스라엘은 주님의 면전에서 악을 행했고 바알을 섬겼다. 야훼께서는 격노하시어 적들이 들어오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께 간청했고 주님께서는 평화를 가져올 구원자 판관을 일으켜 세우셨다’는 노선이다. 각 판관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러한 주제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반복된다. 이렇게 저자는 몇 가지 예를 이용함으로써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 백성의 운명을 정하시고 이끄신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판관기에 근거하여 사울 이전의 시기를 그 가장 작은 상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복구하고자 했을 때, 해석은 틀린 것이 아닐까? 일련의 그러한 완성된 숫자로 이루어진 계산에서 불가피하게 혼동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대답은 쉽다. 판관기는 현대적인 역사 편찬을 제공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로지 독자에게, 바로 그 시대의 역사적인 정신으로 그리고 종교적인 경향이 강한 정신으로 어떻게 하느님께서 고대 세계에서도 세기의 왕이셨는가를 보여 주고자 한다. 달리 말해서, 역사보다는 도덕을 가르치고자 하는 고유한 문학 유형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1년 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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