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삼손의 머리카락에 숨은 비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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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3 | 조회수4,575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구약] 삼손의 머리카락에 숨은 비밀
작은 태양 삼손
이스라엘의 모든 판관들 가운데 삼손의 정력적인 모습만큼 그렇게 잘 알려져 있거나 기이하게 나타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어 성서와 가톨릭역 성서에서는 삼손이 그의 이름인 반면에 히브리어 성서를 참고한 프로테스탄트역 성서에서는 그를 심손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이름을 때때로 우리는 시장에서, 예컨대 아교가 담긴 붉은 통이나 특별한 저항력이 있는 다른 물질을 파는 데서 발견하게 된다. 관계는 명백하다. 그 이름은 힘이란 개념을 부여하는 데 적합한 것이다. 이 힘이 삼손의 주된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강건한 근력을 지닌 판관이었다.
사실 성서에 묘사되어 있는 삼손의 종교적인 면은 몹시 허약한 것으로 나타난다. 성서는 단지 두 번만 그리고 위험한 경우에만 그가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말한다. 성서 저자의 주된 관심은 영웅의 힘있는 행위에 돌려지고 있으며, 한편 그러한 행위는 세 명의 불레셋 여인과의 모험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의 유일한 칭호는 판관이었는데 이러한 자격으로 그는 판관으로서의 임무를 마땅히 수행할 수 있었고, 남서쪽에서 이스라엘 국경을 위협하는 불레셋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었다. 하느님의 영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방어하도록 삼손을 부추겼다.
판관으로서 그는 참으로 독특한 유형이었다. 다른 판관들이 언제나 다소 훈련받은 수많은 군대를 거느렸던 반면에 삼손은 개인주의적인 유형이었다. 그는 혼자 싸웠고, 홀로 가자읍의 문을 빗장째 뽑아 읍의 동편에 있는 산 위에 갖다 버렸다(판관 16,1-3). 난폭한 적들에게 사로잡혔을 때도 온전히 혼자서 당나귀의 턱뼈를 움켜쥐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였다(15,15). 죽는 순간에 그는 적의 추장들 가운데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홀로 전쟁을 치러 수많은 적들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살아서 죽인 사람보다도 더 많았다”(16,30). 그의 주된 과제는 전쟁을 하고 이스라엘의 적들을 개인적으로 없애 버리는 것이었고, 그는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결해 냈다.
그러한 임무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 삼손은 예외적인 위대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영웅적인 공적은 어떤 의미에서 원시적인 인물의 인상을 풍긴다. 가장 적절한 예는 여우들에 대한 일화로, 여우들은 꼬리에 횃불을 단 채로 익은 곡식밭을 가로질러 건너가게 되었다. 또한 가자의 문을 힘들여 뿌리째 뽑는 모습은 그러한 무지한 정신, 격정적이고 거의 미치광이 같은 기질을 가리킨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어째서 주님의 영이 그러한 과장과 그렇듯 통속적인 실추로부터 그를 보호하지 않으셨는지 자문하게 된다. 판관은 적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훗날 발전을 이룰 수 있고 종교적인 의미에서 위대해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되었다는 것이 그 답이다.
삼손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것은 하느님의 조력이 그의 긴 머리카락과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위가 그 머리카락에 닿지 않는 한 그의 힘은 손상되지 않으며 무적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비밀을 들릴라에게 밝히고, 들릴라가 그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을 때, 삼손은 적들의 처분에 맡겨지게 되었다. 감금 상태에 있는 동안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났을 때에야 그의 힘은 되돌아올 것이었다. 그의 머리카락과 힘의 이러한 연결은 어떤 마술적인 것을 생각나게 하나, 그렇지는 않다. 머리카락의 성장은 하느님께 바쳐진 성별의 표지였다. 그러한 성별은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그의 어머니에게 한 천사가 요청한 것이었고, 그 영원한 성별에 주님의 영의 특별한 도우심이 부응하였다. 따라서 그 비밀을 들릴라에게 드러냈을 때, 삼손은 동시에 그의 내적 성별을 포기하였고 주님의 영은 그를 버리셨다. 후에 그의 힘은 머리카락의 새로운 성장과 함께 돌아왔다. 그의 성별을 다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설제로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삼손은 언젠가 “다시 한 번 힘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따라서 그의 성공은 머리카락의 성장이라기보다는 기도에 더 달려 있었다.
삼손의 독특한 그 머리카락은 최근에 강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무용담, 전설 혹은 신화, 정확하게는 “태양의 신화”로 간주하는 사람이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은 ‘semes’의 축소형으로서 작은 태양을 뜻하기 때문이다. 작은 태양으로서 삼손은 불레셋 땅의 동부에서 떠올라 가자의 서부 도시에서 진다. 달리 말해서, 자유주의적인 해석은 삼손의 이야기에서 참된 역사를 발견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편에서는 모든 역사적인 요소의 부인도 받아들일 수 없고 동시에 자의적인 일체의 해석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판관기의 보고는 영웅들의 이야기이며 작은 서사시이다. 자유롭고 찬양적인 이야기이므로, 그 안에서 역사적인 표상의 역사적인 핵은 의심의 여지 없이 들어 있고, 이 역사적인 표상 안에서 하느님의 조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판관기의 중심 생각은 분명하다. 하느님께서 특히 당신 백성에게 몰두하신다는 점이다. 삼손이 한 것은 하느님의 백성인 그의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는 그의 독특한 공적을 통하여 하느님에 의해 파견되고 보호받는 자로 간주되었다.
이스라엘 역사 편찬의 절정
여호수아의 요르단 통과와 군사적인 모험이 있은 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약속된 땅의 주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팔레스티나 중앙의 원주민들에게는 침입자였다. 개개의 영토, 즉 그들의 견고한 성읍과 비옥한 골짜기가 있는 지역들은 아직도 정복 중에 있었다. 그러한 정복은 거의 판관들의 시대가 끝날 무렵에 실현되었다. 그러나 격퇴된 민족들은 잃어버린 영토를 다시 정복하기 위해 그들의 작은 군대로 국경을 통과하려고 끊임없이 애썼고, 아직 추방되지 않은 가나안 민족은 자기 방어를 위해 죽음의 투쟁을 벌였다. 사건은 대체로 지금도 이스라엘 국가와 팔레스티나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다양한 지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체제와 이스라엘이 도달한 문명의 정도에 대해 개념을 가지려면 상당한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 아브라함은 성서에서, 떠도는 아람인으로 불리었다. 광야에서의 40년 간의 생활은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원시적인 생존으로 강하게 하였다. 팔레스티나에 들어온 그들은 판관들 시대에도 불안정하고 반유목적인 생활을 고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자들의 부족은 차츰차츰 보다 안정되고 정착적인 생활을 전개해 나갔다. 사무엘 통치사에는 국가와 민족 안에 평화를 폈다. 서로 갈라진 부족은 확실한 하나를 이루는 데 성공했으며, 그 하나는 사울의 지도 아래 비록 원시적이고 불확실하지만 참된 왕국을 감각적으로 믿었다. 후에 이 성장하는 국가에 다윗은 위대한 조직가였고 으뜸 장인(匠人)이 되었다. 공무(公務)와 의식(儀式)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새로운 중심으로부터 전국가의, 나아가 국경을 훨씬 넘어서까지 종교적 정치적 영향력이 확산되었다. 후에 솔로몬 통치 하에서는 적어도 물질적으로 고려되는 이 영향력이 그 절정에 이르렀다.
사무엘 시대부터 솔로몬 시대까지 문명의 수준은 모든 국면에서 두드러지게 진보했다. 성서의 정보에 의하면 다윗은 노래하는 시인이었다. 아주 오래 된 전승에 의하면 솔로몬은 격언집을 구성했다. 나아가 후대의 전승에 의해 이상화된 이 지극히 현명한 왕은 수많은 지혜서의 저자가 되었다. 이러한 전승의 긍정적이고 확실한 핵심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생겨나 문학적 관심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같은 시대에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이 태어나, 아주 빨리 진정한 역사 편찬 형태로 발전했다. 이 시대에 대해 다루는 사무엘서는 그 전형적 서술 방식으로 강한 인상을 준다. 그것은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지도적인 백성에게 보다 반향(反響)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충실한 묘사를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확인된 전승 혹은 쓰여진 자료를 바탕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근동의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고대성으로 보나 정보의 충실성으로 보나 역사 편찬의 정밀성에서 탁월하다.”고 증언한 비오 12세의 말은 무엇보다도 사무엘서를 통해 입증된다.
성서를 단순히 읽다 보면 예언자 사무엘이 이 역사서를 직접 썼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일곱 개의 장만 사무엘에 대해 다루고 그와 관계 있는 묘사 뒤에 사울 왕과 특히 다윗이 첫줄에 짝지어 나타난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사무엘 자신이 그 책을 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즉시 분명해진다. 그러나 사무엘과 사울 시대의 사건들을 통하여 사무엘이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몇 가지 자료를 공들여 작성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두 권의 책에 사무엘이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언제 살았는지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그가 솔로몬의 죽음 이후, 즉 기원전 930년 이후에 기록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두 권의 책에 나오는 많은 자료에 의한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 그리고 아마도 2종의 문헌이었을 - 원천으로부터 저자는 치밀하게 그리고 매혹적으로 구성할 줄 알았다. 단지 그의 문학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그의 심오한 인간적 감정, 다윗에 대한 존경과 특히 인간의 전 역사를 이끌고 지배하시는 분, 즉 하느님께 대한 그의 신앙이 나타난다.
훨씬 후대에 살았던 열왕기 저자의 전개와 사고 방식은 전혀 다르다. 이 저자 역시 의심 없이 원천을 자신이 배치했다. 그는 그것을 지속적인 방식으로 작성했다. 그러나 문헌은 무미건조한 보고(報告) 그리고 고대에 고정된 자료로 남아 있다. 즉 그의 진술에는 활기 띤 동시대인들이 짝지어 나타나지 않고, 거의 인간적인 비전이 결여되어 있다. 단지 다윗 가문의 중단 없는 왕의 열거만이 그에게 중대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중단되지 않은 시리즈는 저자에게 있어서 하느님이 역사의 지배적이고 섭리적인 안내자라는 입증이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지금 암시하고 있는 시대, 이스라엘의 역사 편찬이 찬란히 꽃핀 시대의 두 역사 편찬자 모두는 그들의 직업에 있어서 종교적인 의향과 신학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진술한 사실에서 하느님의 개입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우리 시대에 그러한 처신은 역사에 대한 신학이라 불릴 수 있겠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1년 3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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