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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예언자가 된 농부 아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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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3 조회수3,224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예언자가 된 농부 아모스

 

 

이스라엘의 예언직

 

구약 성서의 책장을 넘겨 보면 거의 언제나 예언자의 출현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역사서에는 그들의 위풍당당한 개성이 담겨 있는 떠들썩한 기적들이 묘사되어 있다. 일련의 그들의 작품에서 그들의 메시지는 다양하고 화려하며, 때로는 신비스러운 문체로 보고된다. 그리고 성서 전체에서 예언자들의 작품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중요성을 띠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그 고유한 문학 유형, 고유한 문체에 대해서도 논의한다.

 

“예언자”란 말을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은 설명할 수 없는 재능을 통하여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사람을 생각한다. 즉 통속적인 개념상, 예언자의 중요한 재능은 장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 반면에 미래에 대한 예언을 예언서들의 특징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예언들을 찾아보려는 사람은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예언 메시지에 미래에 대한 어떤 예언이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풍성하고 중요한 부분은 결코 그것이 아니다. 예언자는 우선 장래를 알려 주는 전령이 아니다.

 

한때 예언자가 기적을 행하는 사람과 동일시되었던 적이 있었다. 실제로,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엘리야와 엘리사에 관한 예언적 이야기에는, 이사야에 관한 예언적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떠들썩한 기적들이 있다. 그러나 기적을 행하지 않고는 예언자가 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틀린 일이다. 그 같은 신념 때문에 나인의 주민들은 예수께서 죽은 이를 살리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루가 7,16)고 외쳤다. 그러한 기적은 그들에게 예수가 예언자라는 증거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적들은 결코 예언자 혹은 예언 문학의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될 수도 없다. 예언서들은 아주 드물게만 기적들을 이야기하고 있고, 우리는 기적에 대해서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예언서를 여럿 가지고 있다.

 

예언자의 첫째가는 과제 혹은 중요한 특징은 하느님에 의해 파견되는 자가 되는데 있다. 그는 하나의 사명을 받고 나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말하고자 하시는 것을 대신 선포한다. 분명히 어떤 때 그의 예언적인 말은 기적을 동반하고 또 어떤 때는 다소 미래적인 사건들에 대한 예고가 계속된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상황이 다 특별한 방식으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예언자의 주요한 특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반면에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과 염려에서 유래하는 예언은 항상 이 백성에 대한 정신적 구원을 지향한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하느님을 포기하고 인접한 나라의 우상들에게 예배를 했을 때마다 매번 예언자는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대.”는 메시지를 갖고 우상과 우상 숭배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전시에 예루살렘의 왕이 위험한 이웃 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했을 때 예언자는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메시지를 갖고 왕궁에 출현했다. 번영 시대에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그 부를 늘려갔을 때 예언자는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같은 메시지를 갖고 그들의 호화스러운 저택에 출현했다.

 

모든 예언적 개입의 특징은 메시지의 선포와 그것이 직접적으로 하느님께 연결될 때 지니는 절대적인 확실함이다.

 

그러나 예언자가 출현할 때 동반하는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말은, 그가 자신의 모든 개입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현을 알고 있고 그러한 기적적인 접촉의 힘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확신에 차서 알린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가?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지극히 예외적인 특권이나, 구약 시대에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죽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예언적인 자각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설명을 찾을 필요가 있고 동시에 하느님의 특별한 작용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이 특별한 작용을 모든 예언자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환시 속에서 받았다. “대예언자들”의 경우, 그들의 예언적 소명의 시초에 있었던 하느님의 현현은, 그것을 읽고 우리 역시 당혹감을 갖게 될 정도로, 생생하고 인상적인 수법으로 묘사되었다.

 

유배지의 예언자 에제키엘은 “번갯불이 번쩍이는 것처럼”(에제 1,4) 하느님의 광채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땅에 얼굴을 파묻었고, 이려한 부르심이 있은 후 칠 일간 포로들 가운데서 얼빠진 채 있었다(에제 3,15). 예루살렘의 왕가 출신인 이사야는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의 영광과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본다(이사 6,1-8). 아나돗이라는 작은 마을의 예레미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께 지명된다. 그는 끓는 솥물이 북쪽에서 위협적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또 그의 집 창문에서 조숙하게 꽃핀 감복숭아 가지를 본다. 이는 백성을 파멸시키는 전쟁이 일어날 기미이나 하느님께서 어느 날, 모든 인간적 예측과는 달리, 다시 번창하게 하시리라는 상징들이었다(예레 l,11-15).

 

각각의 예언자는 그의 사명의 초기에 신비스럽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하느님께 사로잡혔고, 일생 동안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러한 개입에 대한 보상, 즉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백성 앞에 나타나게 된다.

 

 

첫 번째 기록된 예언

 

대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른바 “예언 사화”를 통하여 그리고 그들의 영웅적인 행위에 대한 고대 보고서에 의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는 그 예언자들의 입에서 직접 나온 얘기나 담화가 드물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과 성격은 혼란스럽고 부정확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 사화는 목격 증인들의 보고서란 점에서, 비록 주의를 끌고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인식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몹시 중요하다.

 

다른 예언자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얼마 안되는 거의 예외적인 사건들만을 알고 있고, 따라서 그들의 담화 혹은 기록의 일부가 전해 오지 않는다면, 몇몇 예언자들의 경우처럼, 그들의 성격을 깊이 꿰뚫어보기 어렵다.

 

그러나 또한 성서에서 보고되는 그러한 기록이나 직접적인 훈시와 함께 다음과 같이 보다 어려운 질문은 남아있다. 즉 예언자는 원래 구두로 되어 있던 자신의 메시지를 어떻게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고 또 그것을 후대에 전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도 그가 하느님의 영에 의해 움직였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통상적으로 인간의 작업을 이용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가 그러한 협력에 대해 어떠한 지침을 우리에게 제공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약간의 설교가 기록으로 보존된 첫 번째 예언자 아모스를 살펴 보자.

 

아모스는 스스로를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7,l4)라고 부른다. 그는 유다 왕국에 있는 베들레헴 남쪽의 작은 도시 드고아 근처의 평야에서 살았다. 그 자신이 우리에게 말하듯, 그는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7,15) 하느님의 메시지를 유다 백성과 북왕국의 부족에게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북왕국에서 여로보암 왕은 예루살렘의 종교적인 영향을 막기 위하여 두 군데에 성소를 세웠다. 하나는 북쪽 국경 끝에 있는 단이었고,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베델이었다. 야훼는 송아지 우상 아래서 혹 어쩌면 그 우상 위에 앉히어 경배되었다. 어쨌든 예루살렘에서처럼 궤 꼭대기에 있는 거룹들 위에서가 아니었다. 따라서 북왕국의 부족들은 진정한 신에게 의식을 행하지 않았고, 참된 하느님을 부당하고 불법적인 방식으로 경배했다.

 

베델의 성소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고 특히 이교적인 의식 때문에 다윗의 성읍으로 순례를 떠나는 사람에게 스캔들이 되었다. 나아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과 하느님께서 친히 부르신 예언자들에게는 더욱 심한 스캔들이 되었다. 따라서 여로보암 2세 치하(기원전 790~780년 사이)에 하느님의 영에 의해 자극을 받은 아모스는 유다 국경을 넘어 베델로 간다. 그는 불법적인 성소를 상대로 위협적인 반란을 일으키고 그 벽을 향해 우레와 같은 소리를 퍼붓는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나를 거슬러 죄짓는 이스라엘을 찾아오는 날 내가 베델의 제단에 벌을 내리리라. 그 제단의 뿔들을 때려 부수어…… 흩어 버리리라”(아모 3,14). “베델을 찾지 말고 길갈로도 가지 말고 브엘세바로도 건너가지 말라. 길갈 주민은 끝내 잡혀 가고 베델은 빈터만 남으리라”(5,5). “이사악의 산당은 쑥밭이 되고 이스라엘의 성소들은 폐허가 되리라. 나는 칼을 들어 여로보암의 나라를 치리라”(7,9).

 

이러한 위협은 여로보암 왕에게 전달되었고 왕의 이름으로 베델의 사제인 아마지야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아모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선지자야, 당장 여기를 떠나 유다 나라로 사라져라. 거기 가서나 예언자 노릇을 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다시는 하느님을 팔아 베델에서 입을 열지 말아라. 여기는 왕의 성소요 왕실 성전이다”(아모 7,12-13).

 

북왕국에서 추방된 아모스는 드고아에서 또다시 외치지 않을 수 없었고, 야훼께서는 장차 닥칠 일을 환시를 통해 그에게 드러내셨다. “내가 보고 있는데 주께서 제단 옆에 서서 기둥머리를 치시고, 문 상인방이 흔들리는 가운데 말씀하셨다. ‘내가 지진을 일으켜 저들을 모두 멸하리라. 살아 남은 자들은 칼로 쳐죽이리니, 아무도 도망하지 못하리라.’”(아모 9,1). 이 메시지는 나중에 북왕국의 백성에게 기록으로 전달되었다. 추방당한 예언자에게는 이 기록이 그 메시지를 듣게 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될수 있었다. 기록과 함께 예언은 국경을 넘어 보급되었고, 기록을 통해 예언은 또한 후세대를 위해 보존도 되었다.

 

60년이 지난 뒤 베델이 무너지고 북왕국이 황폐화되고 백성이 유배지로 끌려가자, 드고아 목자의 빛바랜 책장이 의심의 여지없이 다시 읽혀지고 이해되었다. 예전의 말들은 그 의미를 여전히 보존했고 쓰여진 예언은 그렇게 성스럽고 지워지지 않는 가치를 획득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1년 7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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