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복음사가들의 고유한 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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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5 | 조회수2,624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신약] 복음 사가들의 고유한 빛
교회의 선물로서의 복음서
교회의 박사 성 아우구스띠노는 이교도들과 싸울 때 강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나에게 그것을 명하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서들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 말은 조금은 이상하게 들린다. 사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출발하여 교회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 반면에, 아우구스띠노는 오히려 교회에서 출발하여 복음서 안에서 그의 신앙을 정당화한다.
복음서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고려해 볼 때 아우구스띠노의 정당화가 사실의 계승에 더욱 부합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 승천 이후, 혹은 적어도 성령 강림 이후 교회는 사실에 대한 논거였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성장과 신자들의 증가를 기술한다. 새로운 제자는 누구나 교회와 인식을 함께했고 교회 안에서 믿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적어도 20년쯤 지난 뒤 첫 번째 복음서가 등장했다. 오순절이 지난 뒤 60년, 대략 90~95년에 네 번째 복음서가 쓰여졌다. 몇 십년 전부터 이미 교회가 있었고 기록된 복음 없이 신앙이 있었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교회 안에서 그 기원을 갖고, 교회 자신의 선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가톨릭 측에서는 언제나 사도들의 설교를 강조해 왔다 이것이 복음서들의 기원이고 바로 그들 안에서, 특히 최초의 세 권 안에서 정착되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사도행전의 자료에 따르면, 사도적 설교는 예루살렘에서 발단이 되었고 거기서부터 온 팔레스티나를 통해 확산되었던 것 같다. 팔레스티나 경계 밖에는 두 개의 새로운 중심지가 있었다. 하나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있었고 또 하나는 로마에 있었다. 팔레스티나 설교는 마태오 복음 안에 성문화되고, 마르코 복음은 로마에서의 베드로의 설교를 참조하고 있으며, 루가는 바오로의 길동무로서 기쁜 소식의 안티오키아 메시지를 정착시켰다.
가톨릭적인 시각에 의하면, 전세기 동안 교회로부터 기원을 이끌어 내는 복음서들은 교회 자체 안에서 구두 설교의 연속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옹호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아우구스띠노의 문구에서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앙의 정식(定式)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새로운 교리는 루터에 의해 서서히 공식화되었으니, 바로 “오직 성서만”이다. 이것으로 교회와 성서 사이에 내재하던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유대는 끊어졌고 복음서들은 떨어져 있는, 독립적인 기록이 되었다. 그 결과 복음서에 대한 연구에서는, 이어지는 시대의 자유주의 집단에서는,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비판에 대한 규범이 뒤따르게 되었다. 아주 흔히 옛 본문에 대한 해부학적인 끌이 거리낌없이 사용되었다. 복음서들은 쉽게 식별되는 작은 조각으로 분쇄되었다. 그렇다. 마치 그리스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듯이, 그러나 뒤에 덧붙은 많은 것들과 함께……. 많은 것이 제멋대로 후대로 돌려졌고, 모든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비판에 의한 예수”가 되었다. 즉 예수의 모습은 지나치게 인간적인 것이 되었고, 이로써 초자연적인 모든 것은 제거되었으나, 예외적으로 그 모습에서 인간적인 얼굴은 아름답고 놀랍게 표현되었다. 그 결과, 예수는 비록 그리스도교의 창설자로 남아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선의를 가진 모든 추종자들을 위한 이상적인 모델로서 였다.
복음서들에 대한 그러한 취급에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던 중 1920년경에 독일-프로테스탄트 집단에서 새로운 방법이 제기되었다. 그것으로 놀랍게도 가톨릭의 전통적인 시각의 상당한 부분이 다시 취해지게 되었다. 그들은 제멋대로 분할하였던 최초의 세 복음서를 더 이상 개개인의 문학 기록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리스도교 초세기의 교회적인 설교의 담보물로 간주한다. 세 복음서 가운데 어느 것도 하나의 강한 일치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각 복음서는, 특히 마르코 복음서는 정돈되지 않은 짧은 이야기로, 임의로 수집된 적지만 치밀한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설교와 증언을 정착시키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숙고로부터 전통에 대한 새로운 존중심이 생겨나게 되고, 더 나아가 몇 가지 새로운 국면들이 밝혀지게 된다. 복음서들은 사도들과 그 청중들 사이의 접촉의 확인으로 보이고 그 안에서 가르치고 전해지는 교회의 바람들이 인지된다. 따라서 복음서가, 태어나는 (최초의) 교회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복음 사가의 개인적인 국면
우리는 가톨릭 신앙 안에서 성장하듯이, 성인들에 대한 전통적 의식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네 복음 사가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살찌운다. 게다가 우리는 개개의 복음 사가에 대해서 “성인전”을 통해 배운 몇 가지 사실들을 알고 있다. 다른 것은 모른다. 실제로 소수의 그리스도교인들만이 한 복음 사가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모든 복음서들이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면 그러한 관심은 오히려 불필요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 혹은 저 복음 사가에 “의한”이란 명기(明記)는 부수적인 명세인 것처럼 우리에게 보인다.
1920년부터 시작된 복음서들에 대한 쇄신된 관심은 교회가 - 즉 설교자로서 신자들이 - 복음서들의 기원에 지녔던 몫을 명확히 했다.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복음서가 문학적인 단일체가 아니라 젊은 교회의 설교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독자적으로 지녔던 작은 단편들의 모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이 때문에 복음서들은 교회의 설교의 ‘담보’라고 일컬어 졌다.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복음 사가는 수집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다양한 요소들을 철두 철미 임의로 수집했고 기껏해야 그것들을 어떤 순서에 맞추어 배열했을 뿐이다. 그러한 해석에 의하면 복음 사가는 “저자”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승 안에서의 고리(중개인)” 혹은 “편집자”였다. 마치 신문 편집자가 통신사로부터 자료들을 모으듯이, 복음 사가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자료들을 모았다. 이렇게 가정해 보아도 “마태오에 의한” 혹은 “루가에 의한”이란 명기는 별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 대전 이후부터 복음 사가 한 사람 한사람의 업적에 대한 놀라운 관심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생애와 그들의 기적 - 즉 그것들에 의해 가톨릭 신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복음 사가로서의 역할 때문이다. 복음 사가들이 편집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명에 별로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태오, 마르코 그리고 루가의 고유한 업적을 발견하기 위하여 각자 안에 있는 “편집자의 국면”을 더욱 철저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복음 사가가 고유한 개성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개인적인 관점에서 전해진 자료들을 보았고 그것들에 귀기울였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어떤 설교를 백 사람이 주의 깊게 들을 때, 모두는 적어도 상세 한 대목에서 그것을 재생하거나 혹은 그들의 고유한 방식에 따라 적용한다. 따라서 예수의 설교를 들은 12명의 사도는 예수의 말씀과 인격에 인상을 받았으나, 각자의 방식대로 혹은 고유한 성격과 특별한 구성에 따라 독특한 인상을 받았다. 따라서 격렬한 베드로의 반응은 신비적인 요한의 반응과 달랐다. 그리고 유다 안에서는 전혀 다른 확신이 무르익어 갔다. 그러므로 모든 복음 사가는 예수의 말씀과 업적에 직면해서 고유한 결론을 형성했고, 이러한 개인적인 시각은 필연적으로 그 복음 제시에 영향을 미쳤다.
교회의 설교와 처음으로 마주친 마르코와 루가는 - 전자는 유다인이고 후자는 그리스인이다 -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한 사람에게 인상을 주었던 것이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했다. 한 사람이 환기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서는 어쩌면 인위적으로 생략되었다. 따라서 교의에 대한 개인적인 고유한 시각 때문에 각 복음 사가는 고유한 기준에 기초한 선택을 한 뒤 자료를 작성했다.
나아가 복음적인 이야기에서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복음 사가들에 의해 성문화된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은, 자연스럽게 독자들에 의해 그들의 마음에 맞는 방식으로 이해되고 설명되었다. 예컨대 유럽인은 결정적인 말 속에서 이교도들에 대한 언급을 찾아낸다고 생각한 반면에, 유다인은 같은 말을 그 자체로 직접 취할 것이다. 누구나 고유한 견해를 가질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의 각 단편은 그 고유한 빛, 하나의 특별한 의미, 즉 복음 사가의 업적에 돌려야 할 의미와 빛을 갖는다.
복음 사가가 단순한 수집자였다 할지라도 그의 개인적인 시각은 복음서를 구성하는 상세한 부분의 배열에서 밝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태오는 산상 설교로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예수님을 학자로 소개한다. 루가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나자렛에서 예수님이 배척당한 데서 시작하고 그 뒤 그분을 여행하는 은인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복음 사가의 개인적인 면은 무엇보다도 사실의 계승에서 부각된다고 말할 수 있다. “마태오에 의한” 혹은 “루가에 의한”은 따라서 부수적인 지적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복음 사가의 시각과 고유한 성격의 선언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2년 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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