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메시아 탄생을 알리는 상징과 선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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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5 | 조회수3,672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신약] 메시아 탄생을 알리는 상징과 선물
동방 박사들의 별
주의 성탄과 공현 사이의 두 주간은 정말로 매력적인 암시를 주고 있다. 긴 저녁 시간은 성탄 나무에 매달린 초롱불들과 구유 가까이 있는 작은 초들로 더욱 시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이러한 장면의 정점에는 거의 모든 집에서 밝은 별이 빛난다. 이 모든 것이 아이들에게만 흥미롭지 않다는 것은 모든 초롱불이 한밤중까지 켜 있다는 사실로 드러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만 관련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동방 박사들이 긴 여행 끝에 구유에 다다른다는 사실이다. 박사들은 보통 방의 동쪽 구석에서 (즉흥적인!) 여행을 시작한다. 형상이 큰 경우에 그들은 융단의 구석에 있는 큰 방을 가로질러 여행을 한다. 만일 형상이 작다면, 벽 맞은편 상(床) 가장 자리를 가로질러 매일 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아이들은 박사들을 구유에 너무 가까이 이르게 할까봐 어떤 조바심마저 느낀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이러한 염려에 끼어들지 않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별에 대해 관섬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 드러난다. 이미 성탄 전야에 우리는 방안에 불을 매단다. 또한 구유 위에도 우리는 황금빛 꼬리를 단 별을 성탄의 천사와 얼마간 거리를 두고 매단다. 그것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사설을 말하자면, 이 두 사절 - 천사와 별 - 은 구유와는 별개의 것이다. 즉 천사는 베들레헴 들판에서 목자들에게 나타났고, 별은 적어도 성탄과 공현 사이의 기간에는 구유와 관련이 없다. 게다가 축제일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별은 그 자체로 문제를 일으킨다. 어떻게 별이 구유 위에 달려 있는가 하는 예리한 문제를 일으킨다. 심각하게 느끼는 어려움들은 이렇다. 이상한 별은 단 하나의 별이었는가, 성좌(星座)였는가, 성군(星群)이었는가? 게다가 어떻게 이 별이 표시가 될 수 있었는가? 더 나아가 예루살렘의 새로운 왕을 예고하기 위한 표시였는가? 그것은 어떻게 박사들을 이끌 수 있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이 ‘아기’가 발견된 장소 위에 멈추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나의 성군이라고 가정해 보면 앞에 말한 질문들 가운데 몇 가지가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이런 방향에서 해결을 찾는다. 예컨대, 두 혹성 - 아마도 목성과 토성 - 의 결합이라고 생각하거나 어떤 성좌에서 하나의 혹성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해석은 성서 본문도 증명해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채택되어 있는 말은 성좌나 성군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떨어져 있는 단일한 천체를 요구한다.
틀림없이 현자 혹은 천문학자들이었을 박사들이 어떤 별을 보고 그에 걸맞는 길조를 볼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사실 고대에는 어떤 영웅이든 상서로운 별을 동반한다는 것이 설득력 있었다. 따라서 하나의 특별한 별의 출현이 어떤 영웅 혹은 구원자의 탄생을 예고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박사들이 이 영웅을 찾아보기 위해 예루살렘에 어떻게 도착했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별의 위치가 이스라엘을 가리킬 수 있었다고 가정하는 천문학자들이 있다. 여러 해석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기대 - 여기저기서 별의 출현과 관계있는 - 가 유배 때부터 전근동에 퍼져 있었고 박사들에게도 알려질 수 있었다는 상황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박사들이 같은 별에 의해 예루살렘까지 인도되었다는 것은 환상으로서 거부되어야 한다. 복음서는 그들이 동방에서 벌을 보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동사의 형태(aorist : 단순 과거)에 의하면, 계속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한때의 행동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필요가 있다. 박사들이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마지막 행로를 시작했을 때에야 별은 새롭게 나타나고, 그 순간부터 그들에게 길을 가리켜 준다.
이 “길을 가리키다”는 중동 사람에게는 친숙한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낮의 열기 때문에 밤에 여행하는 데 익숙했고, 밤에는 자연히 별들을 관찰했다. 오늘날에도 별들은 단순 항해자에게 야간 항해를 인도한다. 박사들에 대한 이 이야기는 신비로운 별이 예루살렘 남쪽에서 발견되었고, 그 별을 따라 자연히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문제의 중요성은 어떻게 별이 아기가 발견된 장소 위에 멈추었느냐는 것을 아는 데 있다. 대답은 단순하다. 별은 이미 남쪽에 멈추어 있었던 것이다! 유명한 해석학자인 알프링크(Alfrink) 추기경은 여호수아 시대에 태양이 멈춘 것을 “빛나지 않음” 혹은 “사라짐”으로 설명했다. 그와 같이 베들레헴 상공 위에서 별이 멈춘 것도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사건은 아마도 이렇게 소개될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 남쪽의 이상한 별은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이끌었다. 이들이 아기의 집에 접근했을 때 별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고, 이것은 박사들에게 그 여행의 종착지에 이르렀다는 표시였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l).
평가 절하된 동방 박사들의 황금
유아 시절부터 우리는 누구나 구유 곁의 동방 박사들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이러한 관심은 집의 문틀 위에 박사들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만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골의 순박한 농민에게는 전생애 동안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아가, 그것은 오래 된 복음 이야기를 계속해서 탐구하고 구분하는 성서학자들 자신에게도 실재하고 있다.
언뜻 살펴보면 동방 박사들이 단순한 현자, 점성가 혹은 더 낫게 말해서 천문학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즉각적으로 드러난다. 반면에 복음 이야기의 어떠한 요소도 그들이 숫자상 세 명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해주지 않는다. 게다가, 성서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별이 현자들을 먼 동방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이끈 것이 아니라, 단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동반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구유로 간 것이 아니라 “집”으로 갔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단순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구유 곁에서 자극적인 냄새를 풍기며 구름 연기처럼 하늘로 오르는 유향과 몰약을 본능적으로 본다. 그리고 유향의 연기 사이로 번쩍이는 금덩어리를 감지한다.
최근에 우리의 관심은 아기에게 바쳐진 바로 이 황금에 쏠려 있다. 누구나 마리아와 요셉이 이 고귀한 금속으로 해야 했던 일이 무엇인가 하고 자문한다. 학교에서 아이는 “상점에서 그것을 바꾸거나 사용했다.”고 천진스럽게 대답한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에 따르면, 이 선물의 물질성과 천상 아기를, 또는 유향과 몰약의 풍부한 정신적 상징성만을 한데 결합하기가 몹시 어렵다. 따라서 해석학자는 복음 일화 전반에 걸쳐 더 잘 들어맞는 설명을 찾아보게 된다.
거의 우연히 그 눈길은 대영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동방의 고대 분향 제단 위에 머물렀다. 그것은 단순히 벽돌들로 이루어진 봉헌용의 작은 상(床)으로 간주된다. 위쪽에는 네 구석에 자리잡은 네 개의 뿔이 놓여 있는 반면에 가운데에는 불을 피웠던 용기가 파여 있다.
이 불꽃 위에 유향 가루가 부어졌고, 그것은 타오르며 향기로운 연기 기둥을 이룬다. 네 군데의 측면에서 우리는 새겨 있는 네 종류의 향료 이름을 읽는다. 그 가운데 하나는 ZHB라 불린다. 그리고 이것은 “황금”으로 옮겨질 수 있는 말이다. 황금 가루가 결코 향기를 풍기는 연기의 소용돌이로 분해될 수 없기 때문에, ZHB, 즉 “황금”이란 말은 향료의 색깔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유향 - LBNH - 을 가리키기 위해 통상적으로 사용된 용어가 흰 빛깔을 묘사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심지어는 우리의 언어에서 LBN이란 글자의 조합이 albino, Libano란 용어에서와 마찬가지로 흰색과 관련 있기도 하다.
이렇게 가정해 볼 때 결론은 몹시 단순해진다. 이사야서의 구절(60,6)에서 시온의 주님, 즉 하느님께 돌려져야 할 영예는, 시편 141편 2절의 “나의 기도 분향으로 받아 주소서.”로도 부각될 수 있듯이, 그분께로 향해 오르는 기도의 상징인 황금빛의 유향과 봉헌을 통해 표현된다.
우리가 상상하는 세 명의 동방 박사가 그들의 부와 권력의 어떤 증거물로 황금의 보물을 아기에게 가져가야만 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 이야기의 현인들이 오히려 신비에 대한 그들의 통찰과 신앙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은 긍정적인 사실이다. 그들은 같은 선상에 있던 세 가지 상징적인 선물, 또는 그것으로 천상 아기의 주권을 인식하고 선언한 유일하고 위대한 상징적인 선물, 즉 황금, 흰 유향 그리고 몰약으로 그것을 이행했다.
따라서 동방 박사들의 황금은 아마도 인플레와 가치 하락의 주체인 금의 오늘날의 운명을 따르는가? 오히려 그 반대가 옳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찬란함을 잃었다면 동시에 더 깊은 상징적인 의미를 얻었기 때문이다. 사실 가상의 금은 출현한 메시아에게 경의를 표하여 봉헌된 희생과 일치하고 동일시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2년 5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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