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그리스도를 통해 보는 하느님의 계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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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5 | 조회수2,941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신약] 그리스도를 통해 보는 하느님의 계획
비둘기 모양으로
하느님의 삼위에 대한 이미지를 묘사하려고 할 때, 성부를 정확히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내는 데는 누구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자를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도 육화 때문에 그만큼 어려움을 덜 느낀다. 나아가 신경(信經)에 따라 성자가 성부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모습도 만족스럽게 느낀다. 반면에 우리가 성령의 위격을 표현하고자 할 때는 어려움이 따른다. 성령 강림 때의 불꽃으로 묘사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세례 이야기에 나오는 비둘기로 묘사할 것인가? 불꽃은 어떻든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키는 반면에 비둘기에서는 모든 정신적인 요소가 빠져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어떤 이들은 비둘기에 대한 언급에서 모든 물질적인 요소를 제거하려고 애썼다. “하늘이 갈라지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마르 1,10)는 마태오나 마르코의 기록에 따라 성령의 ‘내려오심’만이 비둘기를 생각하게 한다고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비물질적인 것을 이미지로 취하게 된다. 게다가 이런 방식으로 성서와는 반대로, 비둘기 모양으로 된 성령에 대한 표현을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에든 구약 성서에든 이 새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비둘기 모양으로라는 표현의 비성서적 특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 유대법의 규정에서 비둘기는 가난한 이들의 희생물로 이용되었다. 예수의 성전 봉헌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그렇게 간주되고 있고, 성전 정화에 대한 묘사에서 우리는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 ‘여기서 이것들을 치워 버려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6)는 것을 발견한다. 홍수 이야기의 자료와 관련하여, 구약 성서에서 때때로 비둘기는 상징적으로 돌아오는데, 부리에 문 올리브 가지가 평화를 상징한다. 그의 서글픈 울음소리의 경우, 허약하고 무방비한 것의 상징이 된다. 신약 성서에서는 비둘기의 순박함이 사도들에게 예로 소개된다(마태 10,16). 그러나 구약 성서든 신약 성서든 어느 구절에서도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위격을 비둘기와 비교하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원하는 연결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의 세례 이야기에 나오는 비둘기의 이미지가 성령의 표시와 표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황과 내용 자체가 그것을 긍정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구약 성서에서 하느님의 영이 내려오심에 대한 몇 가지 묘사가 발견되는데, 그 모두가 은유나 비유 없이 말한다. 따라서 복음서의 묘사 안에서 문학적인 방편에 호소하는 것은 부당하다. 영을 묘사하기 위하여 하나의 표상을 채택할 때, 이것은 비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다.
게다가 본문의 내용 자체가 그것을 요구한다. 마태오와 마르코가 단지 비둘기가 내려오는 것에서 유추하여 성령의 ‘내려오심’만을 생각하게 할 수 있다면, “성령이 형체를 취하여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려오셨다.”(루가 3,22)는 루가의 묘사는 이러한 설명을 배제한다. 여기서는 육체적인 형상, 비둘기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게다가, 그들 역시 성령에 대해 볼 수 있는 육체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둘 다 예수께서 그것을 ‘보셨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네 번째 복음서의 자료에 의하면,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예수 위에 내려올 뿐만 아니라 그렇게 그분 위에 머물러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나는 영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요한 1,32).
그런데 이제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 어째서 하느님의 영을 표현하는 형상으로 바로 비둘기가 이용되는가?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실제적인 새에 대한 아시리아의 우화에 호소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일일 것이다. 그 우화의 새는 어떤 정해진 사람 위에 내려와 그를 뽑아 왕좌에 앉혔다.
그리고 구약 성서는 해명에 적합한 어떠한 요소도 제공하지 않는다. 기원후 초세기의 후기 유다 기록들도 신성(神性)과 비둘기 사이의 연결과 관련하여 별로 밝혀 주는 게 없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보다도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 혹은 서리어! - 있었다.”(창세 1,2)는 창조 이야기의 서두와 연결된다는 설명이 만족스럽다. 이 본문에 따라서 후기 유다이즘(유다교)의 어떤 저자들은 새 혹은 비둘기를 생각한다. ‘휘돌다’는 표현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하느님의 관심을 강조한다. 즉 하느님의 영은 바야흐로 혼돈(chaos)에 질서를 세우려 하신다. 하느님은 우주에 대한 창조적이고 질서 있는 작업을 시작하려 하신다.
따라서 우주는 예수 위에 성령이 머무시는 것을 비둘기의 형상으로, 세상의 영적인 재출산(再出産)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게 행하시는 하느님 계획의 선포로 드러낼 수도 있다.
광야에서 받은 유혹
견딜 수 없는 더위와 극심한 가뭄 때문에 광야(사막)는 생활, 특히 인간에게 무리한 생활과 싸워야만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광야의 경계에 거주하는 사람은 날마다 이러한 도전에 응하도록 불린다.
예를 들어 오늘의 이스라엘은 광야와 전쟁을 하고 있다. 네겝의 척박한 평야를 거대한 수로(水路), 개척 그리고 경작으로 다스리려고 애쓰고 있다. 3천 년 전에 바로 이 민족은 전쟁에 대한 방비를 하고 약속의 땅에 적응하도록 광야로 갔다. 그 역사적인 전쟁은 단지 물질적인 수준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목적까지 지녔다. 그것은 그 땅을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신을 위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사고에서 광야를 하느님의 적이기도 한 적대 세력, 즉 죄악, 악마, 죽음의 세력의 거주지로 생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그래서 화해의 날에 숫염소가 백성의 죄악을 등에 젊어진 채 그 죄악의 근원인 악마 아자젤에게 그것을 도로 가져가기 위해 광야로 내쫓겼다(레위 16,10). 여러 해 동안 젊은 토비아의 신부(新婦)를 괴롭혔던 아스모데오도 광야로 추방되었다.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뒤에 광야로 들어가셨을 때, 누구나 - 복음서의 단순 독자도 - 그분이 악마의 세력과 싸우려고 거기에 가셨다고 이해한다. 마르코의 짤막한 묘사는 그것을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곧 영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는 광야에 사십일 동안 계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르 1,12-13). 마태오와 루가는 계속해서 악마가 예수께 들러붙어 시도했던 세 가지 유혹을 이야기한다. 모든 믿는 이는 젊은 시절부터 그것을 알고 있고, 게다가 해마다 제대에서 그것을 읽는 소리를 듣는다. “이 돌들이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아래로 몸을 던지시오.” 그리고 또한 “당신이 내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 4,3.6.9).
우리에게 소개되는 첫 번째 물음은 이미 언급한 사실들과 관련 있다. 이 모든 것이 기록된 것처럼 문자 그대로 일어났을까?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혹과 관련해서는 망설이게 된다. “그때에 악마는 그분을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악마는 다시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마태 4,5.8).
문제는 단지 그렇게 높은 산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유혹자가 제멋대로 어떤 사람, 그것도 바로 그리스도를 데리고 제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잡게 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한 질문에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혹이 단지 마음속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함으로써 해결된다. 그러면 같은 유혹이 루가에 의해서는 순서가 뒤바뀌어 이야기된다는 것이 더 잘 이해된다.
오늘날의 문제점과 훨씬 더 밀착되는 다른 문제는 무엇보다도 묘사에 있다. 이야기가 거의 모두 신명기에서 취해진 수많은 구약 성서의 인용문들로 구성되었고, 그 고유한 맥락에서, 마치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시험이 있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묘사를 말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두 이야기를 정밀하게 비교해 보면 광야에서의 예수의 유혹과 이스라엘의 시험 사이에 놀라운 유비가 발견된다.
예수의 첫 번째 유혹에서, 신명기의 말씀은 광야에서의 백성의 기근과 신비로운 만나를 암시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3).
두 번째 유혹에 대한 묘사도 시편의 본문 뒤에 신명기의 말씀을 참조한다. 비록 여기서는 관계가 지나치게 명백히 짝지어지지는 않지만 어떤 접촉이 마찬가지로 표현된다. “마싸아에서처럼 너희 하느님 야훼를 시험하지 못한다”(신명 6,16). “마싸아”는 격분을 뜻하고, 무미 건조한 광야에서 격분한 백성에게 냇물의 필요를 환기시킨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시험했고, 예수는 비슷한 상황에서 그러한 주장을 부적절한 것으로 거부했다.
세 번째 유혹은 더욱 분명하다. 신명기의 본문은 우상 숭배에 대한 권고를 담고 있다.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서 어떤 신이든지 그 신을 따라가면 안된다…….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를 섬겨라……(신명 6,14 그리고 13). 이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유혹에 대한 암시요, 동시에 선택된 백성의 가장 큰 죄악에 대한 암시다. 그것은 광야에서 불꽃의 시험이었다.
이스라엘은 그처럼 40년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다. 에집트의 국경에서 굶주렸고, 광야 한가운데서는 불평을 했고 물을 기원했으며, 약속의 땅 가까이에서는 우상 숭배에 떨어졌다. 예수는 광야에서 40일 간 머물렀다. 이 기간과 유혹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짤막하게 요약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할 법한 일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떨어진 반면에 예수는 이겨냈다.
이러한 분석으로 예수의 유혹에 대한 묘사에서 몇 가지 일들을 상징적인 사실로 요약하고자 한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즉 예수의 유혹의 실재를 따르면서 묘사를 은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합당하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2년 7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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